00474 무엇을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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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후퇴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뭐, 후퇴라고!”
한창 제국군의 기병을 상대로 곡도를 휘두르던 샤를 리히트호펜 기사단장이 소리쳤다. 공화국의 기병대는 근소하지만 적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샤를은 이대로 20분, 아니 10분이 더 주어지기만 해도 적을 내쫓을 자신이 있었다.
“바보 같은 소리를! 통령 각하께서는 내게 우익을 전멸시키라 명하셨어.”
“하, 하지만 정말로 후퇴기가 올라왔습니가.”
샤를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발굽이 낸 먼지 구름 탓에 시야가 썩 쾌적하지 못했다. 샤를은 왼손으로 품을 뒤져서 휴대용 망원경을 꺼내들은 다음, 거칠게 눈가에 가져갔다. 흑색 깃발. 틀림없이 전면적인 후퇴를 의미하는 깃발이었다…….
“말도 안 돼. 각하께서 이렇게 간단히 물러날 리가…….”
“장군님! 중앙의 아군 전열이 후퇴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우리가 포위되어버립니다!”
“크으……후퇴하라!”
샤를이 이빨을 질끈 깨물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헬베티카의 기병대를 밀어붙일 수 있었다. 기병대를 쫓아낸 다음 적군의 중앙을 후방에서 덮친다. 그러면 합스부르크 공화국이 승리를 거둔다. 통령 각하께서도 아시고 계실 텐데, 어째서.
“각하께선 누구보다 승리를 바라시지 않았는가……!”
“장군님!”
여전히 아쉽다는 듯 전방을 바라보는 샤를을 향해서 부관이 소리쳤다. 이미 퇴각을 의미하는 뿔나팔이 먼지 구름을 기이하게 흔들고 있었다. 아군 기병대는 다소 당황하면서도 질서정연하게 말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알고 있어. 제기랄!”
샤를이 억지로 말머리를 돌렸다. 군마가 뒤를 돌아 내달렸다.
중앙, 좌익, 우익. 모든 방향에서 공화국이 대대적으로 물러섰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총사령관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최전방에 나와 있었다. 덕택에 그녀는 전장의 바람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즉시 알아차렸다.
“추격하라!”
적군이 후퇴하고 있었다. 거짓 후퇴일 가능성은 전무했다. 이제 와서 거짓으로 후퇴하여 얻을 이익이 아무것도 없었다. 매복군을 숨겨둘 숲지대 따위도 없었다. 공화국은 패전을 예감하고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이기 위해 퇴각하는 것이었다.
“전군, 대열을 갖출 필요도 없다! 추격하라! 추격하라! 거침없이 추격하라!”
라우라가 직접 군마를 몰아 달려나갔다. 부관들은 그녀를 호위하면서 뿔나팔을 치켜들었다.
“돌격하라!”
“적들을 물어뜯어라!”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라우라의 뒤를 쫓아 앞으로 나아갔다. 엄중한 항오를 자랑하는 헬베티카 용병이었지만, 일단 추격전에 나서자 대열도 보조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용병들은 적병을 죽여서 탈취할 전리품에 눈이 시뻘개져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그건 극단적인 변형이었다. 여태까지 성벽처럼 빈틈없이 버티던 용병대가 이리떼로 돌변하였다. 용병들은 가장 먼저 적군의 중앙을 물어뜯었다. 다음은 우익이었다. 중앙과 우익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자, 공화국군은 본격적으로 후퇴를 감행했다.
“기병의 전력이 부족한 게 한이로군.”
라우라가 말발굽을 멈추었다.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들어 바로 옆의 땅바닥에 꽂혔다. 아주 약간이라도 방향이 달랐다면 라우라에게 정통으로 맞았을 뻔했다. 하지만 라우라는 코웃음도 치지 않고 부관들을 향해 명령했다.
“각 용병대장들에게 전하라. 전군, 약탈을 허용하되 무니헨까지 추격하지는 마라. 지금 상태에서 공성전으로 돌입하기란 불가하다. 그저 전과를 확대하는 것에 집중하도록.”
“예. 공작 전하께서는 달리 가실 곳이 있습니까?”
“주군의 용태를 확인하러 가야겠다.”
라우라는 수자기를 땅에 내려꽂았다. 그리고 후방을 향해서 터벅터벅 말을 몰았다.
라우라가 지나치는 부대마다 두 팔을 벌려 크게 환호했다. 위대한 공작 전하께서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머쥐셨다. 더군다나 너그럽게도 자신들에게 약탈을 허용해주셨다. 용병들이 만세를 부르짖었다.
“데 파르네세 공작 전하 만세!”
“아테네 여신께서 축복하시리라!”
라우라는 말 위에서 대충 근엄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병사들이 아무리 열광하더라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라우라에게 전쟁이란 일어나기 직전이 가장 흥미로웠고, 그 다음은 일어나는 도중이 재밌었으며, 전부 끝나버린 이후에는 아무런 흥미도 재미도 없었다.
‘주군은 무사할까.’
라우라가 무심하게 병사들을 훑어보면서 생각했다.
‘자기만 믿고 맡겨달라고 호언장담했으니 별 탈이야 없겠다마는. 이번에도 또 몸으로 때워버리지 않았을지 걱정되는군. 하여간 주군은 자기 몸이 소중한 줄 모른다.’
주군이 바타비아에서 가짜 암살을 당한 뒤 열흘이나 드러누웠을 때 얼마나 놀랐는가. 얼마 전에 왼발을 스스로 잘라버렸다고 들었을 때는 또 얼마나 경악했는가. 라우라는 치가 떨렸다.
‘전부 화전민 계집년 때문이다. 이제 그 애송이의 면상을 보지 않아도 된다니 유일한 위안거리로군. 애당초 주군이 프랑크에서 그 년을 주워오지만 않았더라면……아니, 주군의 잘못이 아니다. 배은망덕한 계집애의 잘못이지.’
라우라가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전투의 흥분이 가라앉자 피로가 몰려왔다. 라우라는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스물두 살이 넘은 작년부터 눈가에 피로가 들러붙었다. 자고 일어나도 피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정말로 운동을 해야 되겠다 싶었다.
‘이번 전쟁만 끝마치고 마왕성에 돌아가면 주군을 꼬셔서 같이 운동을 시작하자.’
라우라가 굳게 다짐했다.
본래 라우라는 승마가 취미인데다 가볍게 검술도 즐기는 건강 소녀였건만, 단탈리안의 가신으로 들어간 이후로 주군에게 옮았는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침대’라는 사상에 깊이 심취했다.
“전하.”
라우라가 군진 막사에 당도했다. 경비를 서던 엘프들이 군례를 올렸다. 그들은 라우라에게 달려와서 군마를 잡아주었다. 라우라가 등자에서 가뿐히 뛰어내렸다.
“음. 수고가 많다. 주군은?”
“안에 누워 계십니다. 지금은 마왕 전하의 시녀가 곁에 있습니다.”
라우라가 양팔을 벌리자 엘프 병사가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흉갑을 벗겨주었다. 다른 병사는 헐레벌떡 물에 적신 수건을 가져와서 라우라의 얼굴과 목덜미, 손등을 정성스레 닦았다.
라우라가 눈썹을 찡그렸다.
“시녀?”
“예. 평소 전하의 시중을 드는 금발의 시녀 있지 않습니까. 왜, 눈동자가 자주빛인.”
“아아. 이바르 양인가.”
라우라가 안심했다. 시녀라고 하기에 또 누구인가 싶었다.
라우라는 병사가 들고온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화장은 안 했지만 충분히 주군에게 보여도 부끄럽지 않을 만한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라우라는 마왕성에서 게으르게 뒹굴거릴 때나 심지어 전쟁터에 나설 때조차 기본적으로 외모를 다듬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파르네세의 공작.
합스부르크 제국 황제의 대리장군.
라우라는 어떤 것도 자신의 정체성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한 사람의 군사요 신하에 불과했다.
단탈리안의 라우라.
그것 이외에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생각하건대.’
라우라가 머리카락을 단장하면서 생각했다.
‘그 계집애도 분수 넘치게 주군의 것이 되기를 원했지. 하지만 결코 주군의 것이 되지 못했다.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스스로 가치를 증명해야만 한다. 어디까지나 스스로. 하지만 계집애가 무엇을 증명했다는 말인가.’
라우라가 거울을 다시 한 번 유심하게 들여다보았다. 오로지 한 명의 남자를 위하여 오랜 시간 동안 닦아온 미모였다.
‘그럭저럭 싸움을 잘 한다는 것? 확실히 대단하다. 하지만 주군에게 녀석과 같은 싸움꾼이 필수불가결한가? 주군에게 있어 녀석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가?’
라우라가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다. 결코 아니다. 녀석이 없어도 주군은 얼마든지 패업을 이룰 수 있다. 그렇지만 라피스 언니는 어떠한가? 라피스 언니가 없으면 주군은 성공할 수 없다. 나는 어떠한가? 내가 없어도 주군이 대륙을 재패하기란 불가능하다.’
정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주군이 없는 곳에서 나는 나로서 존재할 수 없다. 주군이 없는 곳에서 라피스 언니가 마음껏 능력을 펼치기란 어렵다. 그렇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필수불가결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주군이 주군으로 있기 위하여――우리가 우리로서 있기 위하여.’
반면에 데이지라는 소녀는 거기에 실패했다.
데이지가 있든 없든 주군은 주군의 길을 걸어갔다. 걸어갈 수 있었다.
마왕 단탈리안이 나아가고 나아가야 할 패도(霸道)에 데이지라는 요소는 불필요.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에 가까웠다. 데이지 본인도 그 사실을 알았으리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노력했다. 필사적으로 학문을 배우고 검술을 익혔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라피스나 자신과 같은 위치에 올라설 수 없었다…….
라우라는 데이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능력으로 자신을 증명해내지 못한 사람은 과장된 행동을 통해서, 즉 ‘나도 얼마든지 당신을 위협할 수 있다’라고 위협함으로써 자신의 거짓된 가치를 만들어냈다.
주군의 약에 독극물을 탄 이유도 일맥상통했다. ‘나는 언제든 주군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 그 정도로 위험한 인간이다. 나를 경시하지 마라.’ 그런 심리가 작용한 것이었다. 라우라가 거울을 집어넣으며 생각했다.
‘천박한 년.’
라우라는 그 같은 인간을 제일 경멸했다.
‘나는 단탈리안의 라우라이며, 주군은 라우라의 단탈리안이다. 이런 위치를, 이와 같은 관계를 아무나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나는 사십만의 생명을 도륙했다. 주군을 위해서!’
라우라가 손을 저어서 병사들을 물렸다. 병사들은 흉갑과 수건 등을 껴안고 주변으로 물러났다. 라우라가 고개를 까닥거린 다음 막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
라우라가 막사 안으로 들어서자, 금발의 시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바르였다.
이바르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았다. 그녀가 일어서서 인사하려 들자, 라우라는 조용히 얼굴을 흔들었다. 주군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마도 깊이 잠든 것 같았다. 괜히 말소리를 크게 내서 깨울 필요가 없겠지.
라우라가 한껏 목소리를 낮추었다.
“주군께서는 용태가 어떠한가.”
“무탈하십니다. 다만 독약의 영향으로 잠시 정신을 잃으셨습니다.”
“으음.”
라우라가 인상을 찡그렸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어쩌다 주군이 독약을 들이켰는지 새삼스레 질문하고 싶지도 않았다. 계집애를 죽이려고 어떤 계략을 꾸몄겠지. 어차피 자기가 불평해봐야 주군이 꿈쩍할 리 없었으니, 잔소리는 라피스 언니에게 모두 맡길 속셈이었다.
“어휴. 하여간 주군은 항상 무리하는 게 문제다.”
라우라가 쓴웃음을 지으며 침대에 가까이 다가섰다. 주군은 무표정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다만 숨소리가 무척 안정되어 있어, 그것만으로도 라우라는 마음이 상당히 편해졌다. 다행이었다. 별로 아프지 않아 보여서…….
라우라가 부드럽게 단탈리안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이바르가 옆에서 수건으로 닦아준 것인지 단탈리안의 이마와 얼굴은 깨끗했다. 그 광경을 이바르가 괴롭게 바라보았다.
“군무상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음? 무슨 일인가.”
“잠깐 바깥으로 나와주셨으면 합니다.”
이 막사에는 이야기를 들을 귀가 없었다. 그런데도 나가자고 제안하는 것은, 단탈리안이 있는 자리에서 꺼내기 싫은 주제라는 뜻이었다. 라우라가 이바르와 함께 막사 입구로 나왔다.
“군무상서. 우선 이 사항은 극비임을 말씀드립니다.”
“말해보게. 내 입은 주군이 상대만 아니라면 매우 무거우니.”
“바로 그 주군께도 당분간 말씀드리면 안 됩니다.”
라우라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것이 주군을 위한 길인가?”
“예. 제 모든 생명을 걸고 맹세하여.”
라우라가 데이지를 처치하고자 결심했을 때, 이바르는 거기에 따라준 동료였다. 라우라는 이바르를 제법 신뢰했다. 주군에 대한 그녀의 충성심과 연정은 진심이었다.
“좋다. 비밀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아무래도 전쟁이 일어난 틈을 노려서 합스부르크 공화국이 특공대를 파견한 것 같습니다. 현재, 마왕성과 연락이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뭐라……!”
라우라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바르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마왕성이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군무상서. 마왕 전하께서 의식을 잃고 계신 지금, 군무상서께서 결정을 내려주셔야 합니다. 라줄리 국무상서가 마왕성에 있음을 유의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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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리플]
사실파괴// (도주)
NineBreaker// 엘리자베트는 끝까지 엘리자베트였습니다.
xusaku// 그러게요. 진즉에 목이 뎅거덩 잘렸을 텐데.(...)
물고기인간// 이 무슨 무시무시한 시나리오.
asd메이지// 히이이익!
용자마스터// 승리를 믿기에 희생을 요구하는 것과 위험을 피하기 위해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아마도 엘리자베트에게는 다른 모양입니다.
Omicron// 저도 여타 소설을 보면서 '죽지 마... 죽지 마...' 하는 심정이었는데, 이번에는 제가 그런 심정을 안겨드리니 알쏭달쏭한 일입니다. ;ㅅ;
수천천사// 안타깝게도 착란이 맞습니다.(...)
냅킨김// 하이룽, 방가방가 >_<)
요플레를먹을때는껍질부터// 단탈리안 시점에서는 당분간 진행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