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73 무엇을 위하여 =========================================================================
“좋다.”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이라도 직접 달려가서 주군의 용태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라우라는 지금이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임을 알고 자제했다. 일단 무사하다는 걸 알았으니 인내할 수 있었다.
“전하, 우익에서 아군의 기마대가 패퇴하고 있습니다!”
“괜찮다. 예정된 수순이다.”
부관의 다급한 보고로 라우라는 단숨에 의식을 다시 집중했다. 이번 전투의 행방은 여기에 달려 있었다. 헬베티카 용병대가 중앙을 돌파하는 것이 먼저인가. 아니면 공화국의 기병대가 양익을 차지하는 것이 먼저인가.
“아직 좌익이 버텨주고 있다. 당황하지 마라. 기마대가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예……!”
“패퇴하는 아군에게는 최대한 멀리 도망치라고 전달하라. 조금은 시간을 더 빼앗을 수 있겠지.”
만일 이쪽에서 중앙을 돌파하기도 전에 공화국의 기병대가 양익을 점거하면, 제국군은 졸지에 3면에서 포위되어 집중포화를 당하고 만다. 그렇기에 상대편은 민병을 희생양으로 삼아 중앙을 보강했다. 반면에 이쪽은 오우거를 운용하여 기사단의 일부가 중앙으로 배치되도록 강요했다.
일수일퇴.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뚫릴 듯 뚫리지 않을 듯,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의 묘기가 이어졌다. 드디어 중앙이 돌파되는가 하면 엘리자베트가 곧바로 분견대를 동원하여 틈새를 메꾸었다.
“부대를 운용하는 능력은 호각인가……. 하지만, 나와 성향이 정반대로군.”
라우라가 미소를 지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기본적으로 부대를 크게 다루었다. 연대 하나당 병력이 대략 이천오백에서 삼천 명. 아무리 적어도 이천 명을 집어 넣었다. 반면에 엘리자베트는 아무리 많아봤자 일천오백 명을 연대로 삼은 것이 분명했다.
즉, 라우라는 보다 묵직하고 강렬한 한방을 선호했다. 반면에 엘리자베트는 비록 힘이 조금 떨어질지라도 재빠르고 섬세하게 병력을 조종했다. 충격력인가. 아니면 기동력인가. 군사(軍師)들의 영원한 난제가 이곳 평원에서도 맹렬하게 맞붙었다…….
개전하고 한 시간이 지난 무렵, 전황이 움직였다.
데이지가 일시적으로 뚫어놓은 구멍으로 엘리자베트가 병력을 집중시킨 것이었다. 공화국의 검주들이 일제히 사나운 늑대떼처럼 달려들었다. 이 가열찬 쇄도에 라우라는 식은땀이 흐르기도 했다.
도박!
이대로 전투가 이어지면 공화국이 불리할 것이라 판단했겠지. 엘리자베트는 즉석에서 검주들을 파견하여 전쟁터에 변화를 일으킨 것이었다. 라우라 역시 곧바로 예비병력을 중앙에 쏟아부었다.
“민병을 동원한 것이 네놈의 패착이다.”
승리의 여신은 라우라에게 손을 들어주었다.
검주들이 일거에 달려들자 과연 위력이 막강했다. 그들은 데이지가 만들어놓은 틈을 더더욱 넓게 벌려서, 결국 제국군의 제1전열을 뚫어내고 말았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라우라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우선 라우라는 제1전열을 뒤로 물리지 않았다. 그대로 제2전열을 전진시켜서 검주들을 막았다.
‘작금의 돌격은 분명히 날카롭고 가공스럽다.’
라우라가 끊임없이 명령을 내려가며 눈동자를 서늘하게 빛냈다.
‘그렇지만 검주들의 뒤를 바쳐줄 병력이 허약하다! 민병으로는 우리 제국군의 전열을 붕괴시킬 수 없다. 비록 틈새가 생겨버렸다고는 하나, 그뿐! 이쪽이 뚫릴지언정 결코 무너지진 않는다!’
라우라의 판단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검주들은 제국군의 제2전열에 가로막혀 돌파력을 잃었다. 마법사와 궁병이 아군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검주들에게 화력을 퍼부었다. 이에 검주들로 이루어진 특공대가 주춤거렸다.
“전군, 전진! 밀어내라!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라우라가 직접 군마를 몰고 돌아다니면서 깃발을 휘둘렀다.
부관들이 그녀를 허겁지겁 쫓아다니며 진땀을 뺐다. 일단 라우라가 이렇게 나오면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라우라는 제1전열과 제2전열을 오가며 “전진! 전진하라!”를 소리쳤다. 그건 과감하다 못해 거의 비상식적인 명령이었다.
제아무리 돌파력이 죽었다고는 하나 검주에 의해 제1전열이 돌파당했다. 군사를 뒤로 물려서 재편하고 숨을 골라도 모자를 판국. 그런데 오히려 전진을 울부짖다니!
“공작 전하의 명령을 따르라!”
“애송이 새끼들아, 앞으로! 앞으로 밀쳐내!”
그러나 헬베티카 용병들은 주저없이 명에 복종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헬베티카 용병대는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사병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들에게 존경스러운 총사령관 전하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수천 명의 병사가 한 덩어리가 되어 전진했다. 공화국 민병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오우거들의 난동에도 굳건하게 버틴 민병들이었지만, 한바탕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전문적인 전쟁꾼들의 기세를 받아치기란 불가능했다.
전진, 전진, 끝없이 전진!
“적 중앙의 전력을 양쪽으로 압박하라! 뒤를 염려하지 마라! 그대들의 총사령관이 함께하고 있다!”
라우라를 태운 군마가 드높이 앞발을 들었다. 푸른 수국의 깃발이 바람을 가르며 찬란하게 펄럭거렸다. 마법과 화살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그녀만이 오롯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극적인 절대성이 그곳에 있었다.
“공작 전하 만세!”
“여신께서 전하를 수호하신다!”
헬베티카 용병들이 더더욱 거세게 민병대를 압박했다. 민병대가 서서히 허물어졌다.
이러자 공화국의 특공대는 적지 한복판에 고립된 꼴이 되어버렸다. 뒤에서 받쳐주는 병력이 없었다. 특공대의 놀라운 돌격은 전황을 바꾸는 데로 이어지지 못했고, 그저 조금씩 소모되기만 했다.
몇몇 검주는 순간전이 마법서를 꺼내들었지만 이미 마법사들이 반마법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포화 공격을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절망적인 미래가 결정되자, 검주들은 마지막 함성을 울부짖으며 돌격했다.
“공화국을 위하여!”
그들은 전원 장렬하게 옥쇄했다.
이 시점에서, 엘리자베트 통령은 패배를 직감했다.
“당했는가.”
그녀가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너무나 덤덤해서 바로 옆에 있는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도 어리둥절했을 정도였다. 엘리자베트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마저 감돌았다.
“이쪽의 공격이 일시적이나마 중앙을 양단했다. 그걸 오히려 포위의 기회로 삼아 이쪽으로 과감하게 돌격해오다니. 이제 민병대는 삼면에서 포위되는 형국에 처했다. 가망이 없다.”
“아직 우리의 정예병은 건재합니다. 이제야 호각이라 할 수 있습지요.”
“아니, 끝났다.”
엘리자베트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저들이 왜 막대한 피해를 무릅쓰고 민병을 삼면에서 포위하겠는가. 민병대로 하여금 유일한 탈출로, 즉 후방으로 후퇴하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후방에는 우리 공화국이 자랑하는 정예들이 버티고 서 있지.”
“그렇다면…….”
“그래. 민병들이 후퇴하는 것을 우리 군대가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엘리자베트가 끄응, 하고 기지개를 쭉 폈다.
한없이 태평한 몸동작이었다. 그 때문에 주위의 부관들은 설마 통령 각하께서 현재 아군의 패배를 예언했다는 사실을 예상하지 못했다. 엘리자베트는 칼마르어로 말했다.
“민병들은 어떻게든 후퇴하려고 발악할 터. 결국 우리 정예병들의 대열도 혼란에 빠지겠지. 후퇴하는 자와 후퇴를 막아서는 자끼리 충돌이 발생한다. 그 혼란을 틈타서 적군은 정예병까지 포위해버릴 게다.”
“……그렇군요. 큰일이지 않습니까, 각하.”
“아아. 큰일이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의 눈이 가늘게 늘어졌다.
“어찌 대처하실 생각입니까?”
“본인에게는 세 가지 선택이 주어져 있다. 하나는 패퇴하는 민병대를 추슬러서 혼란을 최대한 막아보는 것이다. 뭐, 논외이지. 그리 간단하게 패주의 혼란을 잠재우기란 어려우니 말이다.”
쿠르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첫 번째 선택은 논외였다. 그야말로 탁상공론. 이도저도 아니게 혼란만 가중할 게 분명했다.
“두 번째는 민병대와 함께 아예 후퇴해버리는 것이다. 무니헨에 틀어박혀서 공성전이라도 벌이면 된다. 다만 이 경우, 어떻게 후퇴하면서 적군의 추격을 막아내느냐가 문제로군. 꽤 막대한 피해가 생겨나겠지.”
“예. 기껏해야 차선의 선택밖에 되지 않습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이미 세 번째 대안이 무엇인지 예감하고 있었다. 쿠르츠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각하, 마지막 선택은 무엇입니까.”
“민병들을 사살하는 것이다.”
엘리자베트가 간단하게 말했다.
“후퇴하는 민병들에게 화살을 쏟아붓고 창날을 세운다. 민병은 당황하여 앞으로도 뒤로도 도망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 결국 절망에 빠진 민병대는 아군의 창칼에 죽느니 차라리 적군에게 죽겠다며 돌격할 것이다.”
그렇다면 혼란은 사라진다.
자포자기한 돌격이 무언가 커다란 성과를 얻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적군의 발목을 붙잡는 역할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패퇴로 인한 혼란이 없어질뿐더러 헬베티카 용병대의 체력까지 소모시킨다.
“이게 최선책이다.”
일거양득의 계책.
자국의 시민을 무참하게 학살함으로써 얻어내는, 계책.
“……각하께서는 무엇을 고르실 것인지요?”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조용히 물었다.
쿠르츠는 본래 권력자를 싫어했다. 그가 엘리자베트에게 충성을 바친 까닭은, 권력과 고결함이라는, 서로 완벽하게 상반되는 요소를 과연 엘리자베트가 성취할 수 있을지 궁금해서였다.
고결한 지배자란 불가능하다. 모순이다. 하지만 그 모순의 결말이 지켜보고 싶다.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라는 인간이 어떤 종착지에 이를지 궁금하다. 그것이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를 이끄는 원동력이었다.
만약 그 결말이 여느 권력자로 전락하는 것이라면, 쿠르츠는 더 이상 엘리자베트의 곁에 머무르는 것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자기 손으로 엘리자베트를 처단하는 것이 옳았다.
단탈리안, 그 작자를 만나고서부터 통령은 변질되었다.
본래 통령의 성격대로라면 이번 전투에 민병을 동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국가를 지배하는 것이 권력자라면, 국가를 지켜내는 것 또한 권력자여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지원병 이외의 시민들을 안전한 곳에 피신시켰을 것이다…….
‘뭐, 이미 당신은 단탈리안을 상대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신념을 저버렸습니다. 설령 지금 내 칼에 죽더라도 변명할 도리는 없겠지요.’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각오를 다졌다. 승리에 눈이 먼 독재자 따위를 모시고 싶어서 여태까지 살아온 것이 아니었다. 이런 자리에서 통령을 암살하면 자기 역시 죽겠지만, 어차피 인간이란 전부 죽기 마련이지 않은가. 쿠르츠는 가벼운 남자였다.
“물론 시민들을 희생한다.”
엘리자베트가 웃었다.
“그렇게 결단하고 싶다마는, 쿠르츠. 아무래도 본인은 끝까지 이도저도 아닌 인간인 모양이다. 신념 따위는 들개한테나 줘버리자는 심정으로 전쟁터에 나섰거늘 막상 이런 순간이 닥치면 그 남자처럼 행동할 수가 없어.”
“…….”
“내가 민병에게 처음 희생을 부탁한 까닭은 우리가 승리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본인의 오판으로 인해 궁지에 몰렸다. 거기에 대고 화살과 창칼을 겨누라고, 본인은 도저히 명령하기 어렵구나.”
엘리자베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니헨으로 후퇴한다. 적군은 절대로 우리를 쉽게 놓쳐주지 않겠지. 힘겨운 퇴각전이 될 것이야.”
“…….”
“슐라이어마허 장군.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 본인의 결정에 따라주겠는가?”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여간 사람 다루는 게 험악하시다니까요. 저처럼 피학에 쾌감을 느끼는 남자가 아니고서야 누가 통령 각하를 보좌하겠습니까? 뭐, 봉급이나 제대로 올려주십시오. 무니헨의 술집 아가씨들이 저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요.”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군.”
엘리자베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 공화국 정부는 만성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입에 풀칠이나 하며 살아주게, 근위대장.”
엘리자베트와 쿠르츠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잠시 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웃었다.
공화국의 본진에서 깃발이 올라갔다. 보라색 깃발과 검은색 깃발이 펄럭거렸다.
그건 전군의 후퇴를 의미하는 깃발이었다.
============================ 작품 후기 ============================
[리리플]
MukCheon// (도주)
사실파괴// 미완성이라고 하셔도 제 마음에 쏙 들어서요. 헤헤.
Omicron// 데이지의 자리는 바로 단탈리안의 정면입니다.
rrrt123// 얍얍.
오룔리// ㅠㅠ
NineBreaker//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요 ;ㅅ;
으악으아악// 흥겹다니 득도하셨군요.(...)
요플레를먹을때는껍질부터// 어째서인지 인기가 적은 라피스를 응원해주셔서 기쁩니다.
수천천사// 만약 파파콤 외전이 나온다면 데이지와 단탈리안을 제외하고 주변 인물들이 '쟤네 왜 저렇게 달아...' 하고 구토를 줄줄 흘리는 장면이 나올 것 같군요.
호박호박// (도망)
류파// 아뇨, 딱 10위이십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