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72화 (472/510)
  • 00472 악(惡)의 극본  =========================================================================

    결국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내 팔은 이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심하게 떨렸다. 나는 숨을 고르려고 노력했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자꾸만 시야가 둔해졌다. 아마도 얼마 버티지 못하리라. 나는 곧바로 결단을 내렸다.

    앞으로 한 발자국.

    만일 아버님이 단 한 발자국이라도 다가오면 주저 없이 검을 휘두르겠다고.

    아버님은 언제나 내게 강조했다. 할 수 있는가 없는가, 그런 건 부차적인 문제다. 만약 무언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나는 그걸 할 수 있다. 따라서 나 또한 아버님을 죽일 수 있다…….

    그렇지요, 아버님.

    아버님께서도 저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내심 원하고 계실 테지요.

    항상 당신의 무덤을 찾아 해매던 아버님입니다. 어디에서도 찾지 못한다면 차라리 세계 전체를 황량한 묘지로 삼겠다고 맹세하던 아버님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망량처럼 배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제대로 미소를 지었는지 자신이 없었다. 입꼬리가 엉망으로 떨리는 것이 내게도 느껴졌다.

    “아버님과 함께 지옥에 떨어지겠습니다.”

    우리 부녀는 서로 미소로 마주보았다. 우리가 비웃음이 아닌 또 다른 종류의 미소로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이 되겠지. 아버님이 최초이자 최후로 내게 지어보인 미소는, 내가 꿈에서 갈망하던 것과 무척 달랐다…….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어.”

    아버님이 품속에 느릿하게 손을 집어 넣었다.

    아버님의 손에 들린 것은 유리병이었다. 투명한 액체가 가득 들어 있는 유리병. 모양새가 낯이 익었다. 그건 제레미 스승님이 아버님을 위하여 물약을 제조할 때 전용하는 용기였다.

    “…….”

    투명한 색깔의 물약이라니.

    연금술, 특히 각종 물약을 다루는 분야에서는 무엇보다도 색깔과 향기가 중요했다. 미리 색깔로 이런저런 약물을 구분해두지 않을 경우, 자칫 실수로 엉뚱한 액체를 사용해버릴 수 있었다. 예컨대 상처를 회복하는 물약은 반드시 붉은빛에 로즈마리 향기가 나도록 제조하는 것이 철칙이었다.

    반면에 저건 투명했다.

    달리 말해, 다른 사람이 알아볼 필요가 없는 약물. 혹은 이게 어떤 물건인지 다른 사람이 알아차리면 곤란한 약물이라는 의미였다.

    “아버님, 그건……?”

    아버님은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유리병의 마개를 열어 내용문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아버님의 목이 울렁거리면서 액체를 삼키는 것이 보였다. 금세 한 병이 비어졌다.

    아버님은 잠깐 얼굴을 찡그렸다가, 다시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품속에서 똑같이 생긴 유리병을 하나 더 꺼냈다. 나는 아버님이 두 번째 물약을 해치우는 것을 멍하게 지켜보았다.

    무색무취의 약물.

    “……!”

    독약이다. 저건 독약이다!

    내가 깨달은 것과 동시에, 아버님이 묽은 기침을 쏟아냈다. 각혈이었다. 검붉은 피가 땅바닥에 쏟아졌다. 식도가 아니라 내장의 차원에서 밀려나온 피였다. 그런데도 아버님은 세 번째 물약을 입에 물었다.

    내가 대검을 던지고 아버님에게 달려갔다.

    “아버님!”

    아버님이 휘청거리며 무릎이 꺾였다. 나는 다급히 아버님의 몸을 지탱했다. 가벼웠다. 너무나 가벼웠다. 아버님이 원래 이렇게 야위었던가. 여기까지 망가진 몸으로 아버님은 마왕군을, 거대한 제국을 짊어진 것인가.

    아버님의 눈동자는 초점이 흐릿했다. 그리고 점점 더 흐려지고 있었다.

    “안 돼……독약의 종류를, 이름을 말씀해주세요!”

    “…….”

    아버님은 입을 다물었다.

    내가 서둘러 땅바닥에 떨어진 유리병을 주웠다. 나는 망설임 없이 유리병에 아주 약간 남은 물약을 꿀꺽 마셨다. 순간, 강렬한 고통이 식도를 쑤셨다. 마치 식도가 녹아내리는 것처럼……아니, 타오르는 것처럼 아팠다. 겨우 몇 방울만 삼켰을 뿐인데.

    이건, 단순히 평범한 독약이 아니었다. 내장을 녹이는 수준의 독극물이었다. 아무리 아버님이 마왕이라 하더라도 이런 극약을 견딜 수는 없었다!

    “아, 아아……안 돼…….”

    내가 왼팔로 아버님의 몸을 지탱한 채, 오른손으로 허겁지겁 아버님의 품안을 더듬거렸다. 회복 약물. 아버님은 항상 회복 약물을 챙기고 다녔다. 이미 독약이 너무 많이 들어갔기에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마시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그것만을 생각했다.

    없다.

    어디에도 없다.

    손 끝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회복 약물이 없었다.

    어째서. 왜 아무것도 없는 것인가.

    “안 돼요, 아버님……안 돼…….”

    눈가가 희뿌옇게 물들었다. 눈물이 흘렀다. 일생을 살아오며 흘린 것보다 더 많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다시 아버님의 품속을 뒤졌다. 하지만 여전히 약물을 찾을 수 없었다. 내 손가락은 다만 아버님의 망토를 끝없이 허망하게 휘저었다. 결국 눈물 때문에 시야가 아예 안 보였다.

    손등으로 눈가를 닦았다.

    계속 닦았다.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아버님의 얼굴이.

    아버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싫어……이런 건, 싫어요……아아…….”

    나는 온힘을 다해서 아버님을 꾹 껴안았다.

    무언가가 떨리고 있었다. 내 몸이 절규하는 소리였다. 체내에 남은 마력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우직, 하고 대지가 갈라지는 소리가 울렸다. 땅바닥에 생겨난 틈새는 순식간에 나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사방에 뻗쳐나갔다.

    “……해! 당장……둬!”

    “안……지만, 끝날 때……수가……!”

    멀리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사들이 경악하는 소리일까.

    곧이어 모든 소음이 웅웅거리는 잡음으로, 희미하기 그지없는 웅얼거림으로 변했다. 갑작스럽게 마력이 폭발하여 주위의 공기가 일그러졌다. 잘기잘기 갈라진 대지는, 이윽고 작은 혜성이 떨어진 자리처럼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오직 아버님과 나만이.

    우리 둘이 발을 디딘 이곳만이 폭풍의 핵처럼 고요했다. 나는 아버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아버님의 옷을 끊임없이 적셨다.

    끝났다.

    끝나버렸다.

    아버님에게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언젠가 사라지고 말 온기가. 나는 추위에 떠는 새끼 짐승마냥 아버님의 몸안으로 더더욱 파고들었다. 문득, 따뜻한 손바닥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는 아버님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없이 자상한 눈길로. 그리고 나는 이것이 마지막 순간임을 직감했다. 내가 아버님에게 건넬 수 있는 말, 내가 아버님과 나눌 수 있는 시선, 전부가 찰나의 여유만을 남기고 있었다.

    내가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아버님이 내게 부드럽게 입술을 맞추었다.

    “――――.”

    눈앞의 모든 것이 정지했다.

    주위로 깊게 파인 대지의 구덩이도. 마력 때문에 사방으로 새하얗게 반사되는 빛도. 중력에 거슬러서 허공에 느릿하게 떠오른 흙더미와 바위도. 모두 정지했다.

    어떤 영원감 같은 것이 흘렀다.

    유일하게 나한테 느껴지는 감촉이란, 아버님의 입술.

    그리고 아버님의 입에서 내 입으로 흘러 들어오는 독약.

    아.

    그렇구나.

    아버님은 첫 번째 물약과 두 번째 물약을 삼켰다. 하지만 세 번째 물약은 입안에 간직해두었다. 아버님은 지금처럼 내가 다가와서 당신을 부둥켜 안았을 때 독약을 전달할 계획이었다.

    독약이 식도를 지나쳐 내장에 떨어졌다.

    몸속에서 천 개의 바늘이 내장을 꿰매는 고통이 느껴졌다. 아직 멀리서 지켜보는 것 같던 죽음이 나의 몸을 손아귀에 쥐었다. 그렇지만 나는 떨어질 수 없었다.

    오히려 아버님의 입술에 응석을 부리듯 달려붙었다. 조금이라도 길게 이 감촉을 느끼기 위해서.

    독약의 고통 따위는 이 감촉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기꺼이 아버님이 흘려보내는 독약을 그대로 삼켰다. 왜냐하면 아버님의 생각을 전부 이해했으므로.

    마침내, 독약이 전부 내 안쪽으로 흘러들었다.

    더 이상 아버님의 입안에서 전해지는 것이 없었다. 아버님과 나는, 두 사람 중에서 누가 먼저라 할 것도 누가 나중이라 할 것도 없이, 느릿하게 입술을 떼었다.

    “…….”

    “…….”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내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아파요, 아버님.”

    “제레미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만든 물건이니까.”

    “아팠어요……무척.”

    아픔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다행이었다. 아버님을 만났다. 아버님과 죽는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여전히 엉망진창이겠지만, 아까 전과 달리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아버님도 똑같겠지.

    내가 지금 느끼는 고통을 아버님도 겪고 있었다. 온몸이 바스라지고 내장이 넝마짝이 되어버리는 통각을, 우리는 똑같이 나누었다.

    비록 아버님과 나는 정반대의 위치에서 태어났다 할지라도.

    마족으로, 인간종으로. 왕으로 태어난 자로, 천민으로 태어난 자로. 마왕이 되도록 강요된 자로, 마왕을 죽이도록 강요된 자로.

    겨울을 가져오는 사람으로.

    겨울을 다만 견뎌야 했던 사람으로.

    정반대편에서 피어났지만―――우리는 제대로, 함께 떨어졌다.

    그걸로 충분했다.

    만족할 수 있었다.

    나는 아버님에게 말했다. 아버님이 웃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입술을 겹쳤다.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마치 어릴 적, 언제인지 모른 날, 숲속 저 너머의 겨울 하늘을 올려봤을 때처럼.

    끝없이 아득하고.

    한없이 고요한 곳처럼.

    죄송해요, 아버님.

    아무래도 제가 아주 조금 먼저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주 조금만 더 먼저…….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라우라는 갑자기 불안해져서 뒤를 돌아보았다.

    주군은 자신에게 병력을 통솔해달라고 부탁했다. 그건 당연히 자기가 맡은 역할이었으므로, 라우라는 흔쾌히 허락했다. 데이지 폰 커스토스가 중앙 전열을 돌파했다 들었을 때는 불안했지만 라우라는 자신의 주군을 믿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습니다.’

    단탈리안은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저는 제 일을. 라우라는 라우라의 일을 마무리 짓도록 하지요.’

    라우라는 약간 불안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다름 아니라 주군의 명령이지 않은가. 지금까지 주군은 자기 스스로 장담한 바를 이루지 못한 적이 거의 없었다. 라우라는 누구보다 단탈리안을 신뢰했다.

    그리고 지금, 그 신뢰가 빛을 발했다.

    “틈을 보였구나, 통령이여.”

    라우라가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전장에서는 헬베티카 용병이 점차 공화국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엘리자베트 통령이 패착을 저질렀다. 데이지 폰 커스토스가 일시적으로 뚫어둔 틈새로 일부 병력을 집중시킨 것이었다.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틈새였다. 소탐대실이란 그대를 위해 만들어진 경고이겠지.”

    라우라가 자신만만하게 지휘봉을 휘둘렀다.

    “이대로 적의 중앙을 포위하라! 적을 양익으로 흘려보내지 마라! 뒤로 몰아세우는 것이다!”

    “예, 전하!”

    부관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공화국은 민병이 패퇴하여 본격적으로 혼란을 야기했다. 민병이 뒤로 후퇴하려 들자 공화국의 정예병이 가로 막아섰다. 그러자 민병은 양익으로 도망치려 했는데, 이걸 헬베티카 용병이 방해했다.

    결국 민병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절망에 빠졌다. 아군의 절망은 금세 동료들에게 전달되는 법. 라우라는 이 전투의 승리를 확신했다.

    “사령관, 단탈리안 전하께서 전령을 보내셨습니다!”

    “오오. 주군께서는 뭐라 하시는가.”

    아무런 문제가 없으리라.

    라우라는 아까 전에 엄습한 불안감을 억누르며 일부러 활기차게 물었다.

    전령이 입을 열었다.

    “적장 데이지 폰 커스토스, 전사!”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빌어먹을 시녀가 드디어 죽었다. 축배라도 들고 싶었지만 정작 라우라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걸 알았는지 전령도 서둘러 다음 사항을, 주군의 안부를 입에 담았다.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무사하십니다!”

    ============================ 작품 후기 ============================

    [리리플]

    xusaku// 만약 단탈리안이 여자로 태어났다면 만우절 외전에서 나타났듯 희대의 팜므파탈이 되었을 겁니다.(...)

    울반// 옙, 2등입니다.

    rrrt123// 저는 단지 평범한 신사일 뿐입니다.

    Omicron// (도망)

    한뫼사람// 얍얍.

    CurtisAxel// 자클린 롱그위 성녀, 의문의 인기.

    NineBreaker// 라피스라면 막을 수 있겠습니다만, 문제는 라피스가 막을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 다다음 화쯤에 라피스의 입장이 밝혀질 것 같습니다.

    Vanxii// 욥욥.

    오룔리// (도주)

    으악으아악// (도망)

    dnalsgy 님께서 431화-432화를 보고 피아노곡을 만들어주셨습니다. 멋진 선물을 해주신 dnalsgy 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자작곡은 <던전 디펜스> 공지사항 및 대문에 올려두었습니다.

    아래 주소에서도 동일한 곡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https://soundcloud.com/musicship/requiemby-teiad

    오늘 연재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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