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70화 (470/510)
  • 00470 악(惡)의 극본  =========================================================================

    용병들이 주춤거렸다. 단언하건대 난쟁이들의 턱수염마저 떨어댔다.

    여기서 완전히 전의를 상실해주면 편하고 좋으련만, 역시나 그건 과도한 기대였을까. 제법 계급이 되어 보이는 난쟁이 지휘관이 버럭 소리 질렀다. 목덜미에 핏줄이 두드러질 정도로 큰 목소리로.

    “고작 계집년 하나 못 잡아서 어쩌겠다는 거야! 이놈들, 당장 불알을 떼어버리든지 저 애송이를 죽여버리든지 알아서 해! 아니면 내가 손수……크흡!?”

    내가 허벅지에 끼워둔 단검을 뽑아들어 던졌다. 단검은 정확히 난쟁이 지휘관의 목에 명중했다. 난쟁이는 두 손으로 목을 부어잡은 채 인파 너머로 쓰러졌는데, 부하들의 몸뚱어리에 가려진 것이었다.

    조금 쓸데없이 시끄러워서 처리했다.

    내가 슬쩍 주위를 눈으로 훑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 남아 있는 분, 아직 계십니까?”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내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체 없이 발걸음을 움직였다. 정예병에게 충격이란 아주 잠깐만 유효한 법이었다.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금세 또 정신을 차려서 창칼을 이쪽으로 향할 게 분명했다. 최전선에 있던 난쟁이 부대는 내가 빠져나가는 모습을 멍하게 지켜보았다.

    그러나 충격에 몸이 굳어버린 것은 최전선의 일부 부대뿐이었다.

    “가까이 다가서지 마라. 방패병 앞으로!”

    “정확하게 조준해서 사격하도록!”

    밀물이 빠져나간 자리에 다시금 파도가 들이닥치듯이, 내가 기껏 부대를 정리해도 끝없이 병사들이 충원되었다. 그들은 나에 대한 전술을 바꾸어서 아예 거리를 떨어트린 채 화살을 쏘았다.

    “…….”

    나는 시체를 방패로 삼아서 화살 세례를 막아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엘프 궁병들이 이쪽을 사방에서 포위했다. 사각을 없애버리고 일제히 공격하려는 것이겠지.

    “쏴라!”

    엘프의 앙칼진 목소리가 터졌다. 한꺼번에 쉰 발에 이르는 화살이 들이닥쳤다.

    내가 시체를 내팽개치고 대검을 크게 휘둘렀다. 검풍(劍風)으로 화살의 기세를 죽일 심산이었다. 이런 방식은 체력을 많이 소모해서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 화아악!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바람이 화살의 속력을 꺾었다. 나는 그 틈을 타서 전방으로 몸을 날렸다. 화살들이 엉뚱한 방향으로 비틀어지면서 땅바닥에 소낙비처럼 꽂혔다.

    “읏……!”

    내가 한 차례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한 그때, 종아리에 날카로운 통증이 치달았다. 한 대의 화살이 내 오른쪽 종아리를 스쳐 지나갔다. 자칫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나는 고통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달려나갔다.

    “후우.”

    어떻게든 호흡을 되찾았다.

    방금 그건 우연히 이루어진 사격이 아니었다. 병사들에게는 일제히 쏠 것을 명령하고서, 지휘관만 일부러 한 박자 느리게 활시위를 튕겼다. 내가 화살비를 돌파하리라는 사실을 예측하여 의도적으로 빈틈을 노렸다. 누군지 몰라도 제법 교활한 작자였다.

    궁병대를 처리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어차피 병사들 틈새에 끼어들면, 아군을 빚맞히는 게 무서워서라도 화살을 쏘지 못할 터. 나는 궁병들을 무시하고 곧바로 제2전열에 돌입했다.

    “억지로 막아서지 말고 장창으로 처리하라!”

    “순차를 두어서 찌르는 거다. 옆에 있는 동료들과 보조를 맞춰!”

    다시금 보병들이 나를 맞이했다.

    ─ 꾸우욱.

    오른발로 땅을 밟을 때마다 격통이 몰려왔다. 아픔이 지나쳐서 발에 힘을 주기가 어려웠다. 아마도 화살촉에 독이 묻혀둔 모양이었다. 나는 임시방편으로 종아리보다 무릎과 허벅지에 균형을 실었지만, 말 그대로 변통에 불과했다.

    어서 빨리.

    조금이라도 빨리 아버님에게 가야 했다.

    “저놈은 오른발에 상처를 입었다!”

    이쪽이 아주 약간 주춤거린 것을 깨닫고 용병들이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나를 상대하는 방법이 점점 더 교묘하게 진화했다. 과연 헬베티카에서 엄선해서 파견한 병력이라고 칭찬해야 할까. 아니면, 이런 군대를 완벽하게 장악한 아버님을 우러러봐야 할까.

    ―――아버님.

    “제1조는 적의 오른발을 집중적으로 노려! 제2조는 후방에서, 제3조는 나와 같이 놈의 정면을 상대한다!”

    “사격 지원! 빌어먹을 멀대 새끼들. 제때제때 화살을 날리란 말이야!”

    내 대검이 검기를 일으켰다. 다음 순간, 어느새 용병들의 몸이 양단되어 있었다. 피바람이 일었다. 열댓 명의 용병이 사방에 내장을 흩뿌리며 흙바닥에다 콧수염을 처박았다. 내가 입꼬리를 들었다.

    “저, 저걸 어떻게 막아!?”

    “뒤로 물러서라! 뒤로 물러서라! 엄호!”

    아버님에게 사랑을 받고 싶었다.

    단순한 애욕이 아니었다. 조금 더 단단하고 조금 더 깊은 무언가를 원했다.

    삶이란 일종의 건축물을 짓는 것이라고 비유할 때, 한 명의 사람이 쌓을 수 있는 건축물이란 기껏해봐야 탑밖에 없다. 탑은 높으며 또한 올곧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탑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집이다.

    어찌할 도리가 없이 음울한 비석.

    “너희 소대는 후퇴해! 창대 전부 부러져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대장님! 이거 더 버틸 수가 없습니다!”

    또 다른 화살이 나의 팔뚝을 스쳤다. 피가 와락 튀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는 당신의 기둥이 되어주고, 당신은 나의 기둥이 되어준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하나의 문이다. 설령 우리가 그 안에서 머무를 공간이 없다고 해도 좋다.

    그때 비로소 나는 무언가를 맞이할 수 있다.

    일종의 비밀스러운 동맹이다. 우리는 우리만의 기준으로 무언가를 허락하고 거절한다. 세상을 투과하여서 우리 두 사람만의 영역을 만든다. 당신의 신념이 올바르다고. 당신의 가치가 올바르다고, 바로 옆에서 승인해줄 수 있게 된다.

    퇴폐적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버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고 싶었다.

    “전열이 돌파당했다!”

    “추격해! 아니, 궁병대만 추격해라! 여기서 대열을 무너트리면 끝장이야!”

    이번에는 화살이 조금 아픈 곳을 찔렀다. 푸욱, 하고 왼쪽 허벅지에 정통으로 날아들어서 깊숙하게 박히고 말았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아버님과 나는, 분명히 그런 관계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단지 우리가 만난 시간이 어긋난 것일까. 약간만 더 일찍 서로를 만났다면, 아버님이 아직 살육을 저지르지 않았을 때 만났다면, 내가 바라던 관계가 이루어졌을까.

    아버님은 나에게 미소를 지어주었을까?

    나는 조금 더 환하게 웃을 수 있었을까?

    ………….

    문득 눈앞에 평야가 펼쳐졌다.

    더 이상 내 주위에는 병사들이 없었다.

    “…….”

    눈가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그러자 시야가 멀리까지 보였다. 궁병들이 멀리서 원을 그리듯이 날 포위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이 보였다. 긴장하고 있는 것인지, 활시위를 당긴 손이 덜덜 떨렸다.

    시선을 조금 돌리자,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그곳에 아버님이 서 있었다.

    “하.”

    내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 나름대로 비웃음을 연기할 속셈이었는데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오히려 미약한 신음에 가까웠다. 여기까지 도달하느라 지나치게 많은 상처를 입어버렸다. 통한의 실수였다.

    하지만, 괜찮겠지. 응. 괜찮다.

    나는 제대로 마지막까지 분발할 수 있다.

    “완전히 넝마짝이 다 되었군. 그 볼썽사나운 몰골은 무엇이더냐.”

    아버님이 무표정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아버님이 말한 대로 조금 꼴불견이었다. 아버님에게 받은 시녀복이 엉망진창으로 찢어졌다. 인의 장벽을 뚫고 오느라 핏물까지 잔뜩 묻었다. 이래서야 누가 봐도 공작가의 여식이라고 소개할 수 없었다.

    자아.

    적당히 나 자신을 연기하자.

    그러니까, 아버님이 생각하는 데이지 폰 커스토스라면―――이런 상황에서 이런 눈빛으로, 이런 말투로, 이런 뉘앙스로 말하지 않을까.

    “아버님을 뵙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노력했습니다. 효녀라고 칭찬해주지 못할망정 옷차림을 지적하다니요. 사람의 외모보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이 평소 아버님의 지론이지 않았습니까?”

    “지금 네 마음이 외모보다 아름답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게냐?”

    “다만 사실을 말씀드릴 따름입니다.”

    아버님이 피식 비웃었다.

    “올해 들은 농담 중에 제일 웃기는군. 네 녀석만큼 마음이 외양을 따라가지 못하는 인간을 내 평생 본 적이 없다. 겉보기라도 그럭저럭 괜찮게 태어나게 해준 것을 신들께 감사하도록.”

    “제 외모를 높이 평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님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여태까지 신을 믿어본 적이 없는 저도 하마터면 열렬한 신도가 되어버릴 뻔했습니다.”

    내가 살짝 눈을 돌려서 주변을 다시 확인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도, 자클린 롱그위 성녀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아버님을 버리고 다른 곳에 갔을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즉, 모종의 수단을 써서 내 눈에 보이지 않도록 조처했다고 추론하는 편이 합당했다.

    아마 투명마법을 써서 기척을 지웠으리라.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내가 방심하는 틈을 노려서, 나한테 치명타를 날릴 계획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미끼 역할은 다름 아니라 아버님인가…….

    위험한 역할을 자처하는 아버님의 버릇은 여전했다. 조금 불평하고 싶었지만 그래서야 만사휴의. 여기서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능청을 떨어야 했다.

    “신들에게 기도해야 하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오히려 아버님 아닌지요. 아버님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제 앞에 나온 것은 실수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제 대검이 아버님의 목을 그어버릴 가능성이 있으니 말입니다.”

    “정말로 그렇다. 큰 실수를 저질러버렸어…….”

    아버님이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뻔뻔한 연기였다. 아버님의 눈동자에서는 회한의 감정이, 자기 자신을 질책하는 감정이 강하게 드러났다. 너무나 뚜렷해서 도저히 가짜로 끌어올린 감정이라고 느끼기 어려웠다. 알면서도 속을 수밖에 없다는 말은 아버님을 위해 발명되었다.

    “아버님과 저입니다. 서로 간에 많은 대화가 필요하지 않겠지요.”

    내가 대검을 바로 세웠다.

    순식간에 긴장감이 공기를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멀리서는 궁병들이 당장이라도 화살을 쏠 것처럼 시위를 끌었다. 유일하게 태연한 것은 아버님이었다. 아버님은 어딘지 모르게 슬픔이 묻어나오는 눈동자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설마 아버님은 지금 상황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일까?

    그건 곤란했다. 이 무대에서 가해자는 오롯하게 내가 담당했다. 아버님은 피해자로 남을 필요가 있었다.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서 묘한 동정심을 품는 것 역시, 아버님의 나쁜 버릇 중 하나였다.

    하아.

    이래서는 안심하고 죽을 수 없었다.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놓자.

    “참. 궁금하실까봐 말씀드립니다만, 바르바토스 섭정은 무탈합니다. 공화국의 돼지우리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사지가 잘리더니 엉금엉금 잘도 기어다니더군요. 특히 공화국의 병사들은 예쁜 애완동물이 생겼다며 좋아했습니다.”

    “…….”

    “바르바토스 섭정도 잔뜩 귀여움을 받았지요. 아버님, 혹시 돼지가 교접할 때 어떻게 신음하는지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한 번쯤은 경청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과연 생살이 찢어질 때는 돼지도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내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아버님은 바르바토스를 사랑했다. 아버님 본인은 부정할지 몰라도 진실이 그러했다. 나는 내가 죽은 이후, 아버님을 위로하고 보다듬는 역할을 바르바토스에게 맡길 계획이었다. 이미 극본도 완성되어 있었다.

    “…….”

    아버님이 반응하지 않았다.

    아니, 반응하지 않는다기보다.

    도리어 눈동자에서 슬픔의 색이 진해졌다.

    나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이건 무슨 일인가. 바르바토스를 욕보였으니 어느 정도 분노를 보여주어야 정상이었다. 설마 내 도발이 약했을까. 아니, 꽤 괜찮은 연기였다고 생각했는데…….

    “데이지.”

    그때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견딜 수 없는 불길함에 휩싸였다. 방금 아버님이 발음한 '데이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음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버님은 결코 저런 방식으로 나를 부르지 않았다.

    마치.

    마치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을 위로하는 것처럼―――.

    “이제 괜찮아.”

    “…….”

    불길함은 더더욱 강렬해졌다. 무엇이 괜찮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아버님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이 무언가에 의해 강제로 고정되었다.

    아버님이, 입을 열었다.

    “이제 더는 연기하지 않아도 괜찮아. 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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