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69화 (469/510)
  • 00469 악(惡)의 극본  =========================================================================

    *  *  *

    자아, 하고 내가 일어섰다.

    전황은 난전으로 치달았다.

    아버님에게도 엘리자베트에게도 각자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 나는 그게 무엇인지 짐작하지 못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해서, 짐작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아버님의 말에 따르자면 엘리자베트 통령은 유일무이하게 아버님과 비견할 만한 심계의 소유자였다. 내가 어설프게 계략을 짜내도 간파당할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해답은 간단했다. 아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네놈. 어디를 가려는 거냐.”

    남자가 말했다. 우리 남매를 감시하는 검주였다.

    “가야 할 곳이 생겼습니다.”

    “전투가 일단락될 때까지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이미 사전에 얘기해뒀을 텐데.”

    자그마치 네 명의 검주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은발머리 통령이 의심암귀에 걸렸다는 증거였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통령은 오히려 경계심이 높아졌겠지. 국가의 명운을 두고 겨루는 이 전투에서조차, 검주를 네 명씩이나 나한테 딸려 보냈다.

    자기 재주에 제 발이 걸려 넘어진다는 얘기는 통령을 가리켰다. 결과적으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막강한 전력을 쓸모없는 곳에 묶어두었다.

    아버님도 그렇거니와 머리 좋은 사람의 약점은 생각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자기 생각에 자신이 잡아먹혔다. 나는 검주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는 가야만 할 곳이 생겼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데이지…….”

    루크가 엉거주춤 일어섰다.

    “정말로 가야 하는 거야?”

    “말했잖아. 이게 최선이야.”

    “하, 하지만.”

    루크가 비에 젖은 강아지처럼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딘지 우스워서, 나는 루크의 턱을 잡아서 가볍게 입술을 맞추었다. 루크의 눈동자가 커졌다.

    루크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나는 사람의 감정에 민감했다. 반년 전, 루크가 내 침실에 초대되었을 때 묘하게 허둥지둥거리는 모습에서 확신을 얻었다.

    그러나 나는 루크의 마음에 응답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남매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루크까지 신경을 써도 될 정도로 내게 여유가 넘치지 않았다. 나는 루크의 입술에서 내 입술을 살짝 거두어들이고,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잘 부탁해. 오빠.”

    “…….”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바르바토스를 잘 부탁한다. 아버님을 잘 부탁한다. 루크가 아무리 멍청해도 이 정도는 알아들었겠지. 신뢰하고 있어, 루크.

    내가 고개를 돌려 검주들을 쳐다보았다.

    “이제부터 저는 제 아버지를 처단할 것입니다. 방해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뭐…….”

    “통령에게 보고해도 좋습니다. 애당초 제가 망명할 때 내건 조건은 단 하나. 제 아버지를 처단하는 데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를 위해 이렇게 전장까지 마련해주었군요. 감사할 따름입니다.”

    검주들이 인상을 험악하게 찡그렸다.

    나는 바알의 대검을 쥐고 전선을 향하여 발길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검주들이 나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내가 무표정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방해는 용납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요.”

    “우리는 네놈을 감시하는 것이 임무다. 섣부르게 행동할 경우, 군중을 어지럽히고 반역을 꾀한 것으로 판단하겠다.”

    “반역입니까.”

    내가 희미하게 냉소했다.

    “합스부르크의 섭정이자 평원파의 거두인 바르바토스를 당신들에게 바쳤습니다. 정보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으로 협조했습니다. 더 이상 무슨 혐의가 남아 있습니까? 제가 이제 와서 당신들을 배신하고 다시 제국에 돌아간다 한들 제 목숨이 안전할 것 같습니까. 조금쯤은 머리를 사용해주셨으면 합니다.”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것이냐?”

    “이대로 침투합니다.”

    검주들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내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저는 아버지에게 불구대천의 원수입니다. 제가 전열의 한 곳을 뚫으면 아버님은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저를 포획하려 들 것입니다. 그때 제국군은 균형이 무너지고 맙니다. 당신들이 믿는 만큼이나 통령이 진실로 유능하다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겠지요.”

    “하, 말 그대로 특공이지 않은가.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예. 그렇습니다만. 무언가 문제라도?”

    “…….”

    검주들이 가만히 나를 노려보았다. 시선을 맞받아 쳐주었다. 나는 아버님을 속인 인간이었다. 당신들 수준의 안목으로 내 연기를 간파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네들 입장에서 마음이 동할 만한 몇 마디를 남겨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왕 단탈리안은 제 마을을 파괴했습니다. 친아버지와 친어머니를 인질로 사로잡고, 마을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저는 5년이 넘도록 매일 밤마다 온갖 고문에 시달렸지요. 그리고 드디어 원수를 갚을 때가 왔습니다.”

    “…….”

    “마지막으로 경고합니다. 저를 방해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에게 제가 바라는 것은 그뿐입니다.”

    나는 검주들을 지나쳐서 터벅터벅 걸어나갔다. 그중 한 명이 내 어깨를 잡으려고 했지만, 손등으로 가볍게 쳐서 피했다.

    등 뒤로 목소리가 수군거렸다. 검주들이 책임자에게 급히 보고를 올리는 모양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발걸음을 천천하지만 묵직하게 놀리는 것이 중요했다. 이쪽이 서두르면 없던 의심도 생겨나기 마련이었다.

    전방에선 공화국군과 제국군이 본격적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양익의 기병들이 어지럽게 뒤섞여서 난전을 벌였고, 중앙에서는 보병들이 맞붙었다. 전황은 그럭저럭 호각일까. 오우거들이 날뛰는 바람에 공화국군의 민병대는 사기가 크게 약해졌다. 아마 얼마 버티지 못하고 패주할 것이다.

    “…….”

    나는 바알의 검을 쥐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제1전열과 제2전열의 사이. 길지만 좁게 트인 그 공백의 지대에서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고함과 비명, 날붙이끼리 요란하게 튕기는 소리, 말발굽이 시체를 짓이기는 소리, 온갖 잡다스러운 소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일류배우는 무대에 올라섰을 때 관객이 보이지 않는 경지에 이른다고 했다. 그것과 비슷하겠지.

    이제부터 아버님을 만난다.

    아버님은 나를 죽이기 전에 반드시 한두 마디의 말을 남기기 위해 직접 보러 올 것이다. 자신이 죽일 상대방에게서 유언을 들어두는 것. 그게 아버님의 버릇이라면 버릇이었다. 따라서 다시 한번 확실하게 나 자신을 세뇌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아버님을 증오한다.

    내 이름은 데이지 폰 커스토스. 마왕 단탈리안에게 무고한 마을사람들이 학살당하여 복수의 뜻을 품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연심을 이용하여 이간책을 뿌렸고, 결과적으로 마왕 파이몬의 죽음을 유도했다. 마침내 원수를 끝장내고자 적진에 뛰어든다…….

    그것이 나의 배역.

    이 세상에 오직 나만을 위해 마련된 자리.

    “……좋아.”

    내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른 아침이었다. 잿빛 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구름이 없는 곳도 색깔은 매한가지로 회색 빛깔이었다. 어쩌면 정오쯤에 소나기가 내릴지 모르겠다. 지나치게 햇빛이 희박한 하늘은, 어딘지 모르게 나의 유년시절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죽기 좋은 날인걸.”

    내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자아―――마지막 무대에 오르자.

    나는 전열을 향해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오우거들과 기사들을 지나쳐서, 민병대와 용병대가 어우러진 격전지에 도달했다. 나는 가뿐하게 땅바닥을 밟아서 뛰어올랐다. 어느 민병의 투구에 착지하여 재차 뛰었다. 그렇게 투구를 징검다리 삼아서 네 번 건너뛰자, 곧바로 장창의 숲이 눈앞에 펼쳐졌다.

    “검주다! 검주가 나타났다!”

    내 몸놀림을 보고 헬베티카 용병들이 급박하게 소리를 질렀다.

    “절대로 난입하지 못하게 막아!”

    “찔러버려!”

    용병들이 일제히 장창을 이쪽으로 내밀었다. 나는 곁눈질로 사방을 확인한 다음, 최적의 경로를 찾아내어 대검을 공중에 그었다. 장대들이 우스스 절단되는 감촉이 손바닥을 통해 전달되었다.

    다음 순간, 용병들이 내지른 수십 개의 장창은 모조리 허리가 잘린 채 땅바닥에 떨어졌다. 용병들은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괴물 같으니……!”

    누구 보고 괴물이라고 하는 것일까.

    내가 얼굴에 미소를 품은 채 대검을 휘둘렀다. 난쟁이들의 험상궂은 머리통이 허공에 날아들었다. 그리하여 한 순간이지만 제국군의 전열에 빈틈이 생겼다. 나는 그곳으로 몸을 던졌다.

    “제기랄, 검주가 난입했다!”

    “막아! 어떻게든 막으란 말이야!”

    용병들이 장창을 버리고 칼을 꺼내잡았다. 창을 찌를 공간조차 없기 떄문이리라. 그들은 난전에 익숙한 듯 비좁은 공간에서도 정확히 나를 향해 칼을 내리찍었다. 나는 다시 곁눈질로 사방을 확인했다.

    동시에 공격해 들어오는 칼날의 숫자가 열한 개.

    그 다음에 이어서 쇄도하는 칼날의 숫자가 열세 개.

    최적의 경로를 그려봐도 전부 막아내기는 어려웠다. 적어도 한 개. 운이 나쁘면 두 개가 내 몸에 닿는다. 그렇다면 막을 수 없는 검격을 깔끔하게 포기하는 편이 나았다. 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판단을 끝마쳤다.

    한 호흡.

    “죽어라, 괴물!”

    내가 허리를 잔뜩 낮추었다. 다섯 개의 칼날이 이로써 무의미하게 공중을 휘저었다. 나는 낮춘 자세 그대로 대검을 수평으로 그었다. 일곱 명의 난쟁이들이 무릎째로 잘려져 나갔다.

    두 호흡.

    “크아아아악!”

    “멈추지 마! 저 년을 몰아세워!”

    어떤 난쟁이가 대지에 쓰러지면서 칼을 놓쳤다. 데겐. 비교적 길이가 짧지만 유용한 검이었다. 허공에서 천천히 떨어지는 그 검을 왼손으로 낚아챘다. 오른손에 대검. 왼손에 데겐. 오른쪽 칼날은 위로, 왼쪽 칼날은 수평으로 치켜든 채, 내가 무릎을 튕기며 한 바퀴 몸을 돌렸다.

    “크흡! 내 팔, 내 팔이! 흐아아악!”

    “멈추지 말라고 했잖아, 개새끼들아!”

    세 호흡.

    이때 미리 예측한 경로로 검격이 들어왔다. 이건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가볍게 내주었다. 용병이 뒤에서 휘두른 칼은 정말로 아슬아슬하게 나의 등에 닿았다. 등줄기에서 화끈한 통각이 덮쳤다.

    “좋았어! 이대로 전부 한꺼번에 덮쳐―――.”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데겐을 역수로 쥐어잡아 내리찍었다. 푸삭, 하고 두개골이 산산조각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오른손의 대검으로 크게 반원을 그렸다. 대검은 자기가 지나치는 데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을 절단했다.

    네 호흡.

    “크흐흡……!”

    전방에서 달려들던 세 명의 난쟁이가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사이좋게 목줄기에 선명한 검상이 그어졌다. 목구멍에서 터져나오는 핏물을 집어삼키며, 용병들은 힘없이 쓰러졌다.

    나는 마지막으로 데겐을 던졌다. 싸움 내내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지휘관의 이마에 칼날이 부드럽게 꽂혔다. 마치 두개골이 검집이라도 된 것처럼 부드럽게. 난쟁이 지휘관은 두 눈을 부릅뜨고 서서히 뒤로 꺼꾸러졌다.

    ─ 풀썩.

    지휘관이 쓰러지면서 자그맣게 먼지가 피어났다.

    나는 그리하여 다섯 번째 호흡을 내쉬었다. 내 주위에는 스물네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갑작스럽게 적막이 찾아들었다. 시끄러운 전장에서 오직 이곳에만 침묵이 가라앉았다.

    “으, 어어……으아아…….”

    주변을 둘러싼 용병들이 한 발자국 물러섰다. 제아무리 용감무쌍한 헬베티카 용병일지라도 눈 깜짝할 사이에 소대 병력이 지워져서야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겠지.

    “제 이름은 데이지 폰 커스토스.”

    내가 바알의 대검을 똑바로 세웠다.

    “용맹한 헬베티카 군인이여. 부디 저의 길을 막지 마십시오. 제가 당신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죽음 이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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