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68 악(惡)의 극본 =========================================================================
화난 목소리가 군진 이곳저곳에서 터졌다.
“언제 돌입하는 겁니까, 부장님!”
“아직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기하라!”
“이러다 우리 병사들 다 죽게 생겼습니다!”
그들은 말에서 내린 기사들이었다. 오직 오우거를 막아내기 위해 긴급하게 중앙에 배치되었다. 기사도 한낱 인간인지라, 이백 마리의 오우거를 눈앞에 두고 불안에 떨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아군이 학살당하고 있었다!
오우거가 휘두른 몽둥이에 어느 민병의 몸뚱어리가 공중으로 날아갔다. 허리 위아래가 양단된 신체는 두 조각이 제각기 엉뚱한 곳에 떨어졌다. 기사가 소리쳤다.
“부장님!”
“아직이야!”
부장이 고함을 질렀지만 그 역시 이해하기 어려웠다. 시민병으로 이루어진 제1전열을 사수하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 아니었던가. 이대로 오우거가 난동을 부리는 것을 내버려둘 경우, 민병들은 그만 전의를 잃어버리고 도주할 게 분명했다.
그러나 총사령관인 엘리자베트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오우거의 돌격력을 민병으로 상쇄시킨다.’
엘리자베트가 냉정하게 전방의 추세를 지켜보았다.
‘오우거를 처리하는 것은 녀석들이 기세를 잃어버린 다음. 기사단의 피해를 최대한 줄인다.’
민병은 처음부터 버림패에 불과했다.
기사단을 제1전열 군데군데 섞어준 까닭은, 어디까지나 오우거를 쉬이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민병을 지킨다'와 '오우거를 사살한다'. 이 두 목적 사이에는 제법 거대한 차이가 있었다.
이백 명의 오우거가 순식간에 목책 방어선을 돌파했다. 천 명에 이르는 민병이 속수무책으로 꺼꾸러지는 동안, 합스부르크 제국군의 본대, 헬베티카 용병들이 천천히 전진해오고 있었다. 엘리자베트가 오른팔을 치켜든 것은 그때였다.
“지금이다!”
무엇이 지금인가.
굳이 설명해줄 필요도 없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그가 합스부르크어로 크게 소리쳤다.
“기사단에 출격 명령을 하달해!”
“예, 장군!”
부관들이 기다렸다는 듯 깃발을 흔들었다. 유독 한 옥타브가 높은 뿔나팔이 사령부에서 길게 울려 퍼졌다. 명령을 하달한다는 의미의 나팔 소리였다. 각 부대에는 귀가 밝은 병사가 두세 명씩 배치되어 있었고, 병사들은 서둘러 부대의 지휘관에게 뒤쪽을 가리켰다.
“명령입니다, 부장님. 출격 명령입니다.”
“거 빨리도 명령이 내려왔군, 그래.”
지휘관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공화국 기사단을 상징하는 보라색-흰색 깃발. 중앙을 의미하는 검은색 깃발. 그리고 공격을 의미하는 적색 깃발. 틀림없이 병사가 일러준 대로 명령이 하달되었다.
지휘관이 마음의 짐을 떨쳐버리고 투구를 바로 썼다.
“돌격하라! 더러운 괴물 새끼들을 도륙한다!”
먼저 하마(下馬)기사들이 장검을 쥔 채 뛰어나갔다. 그들이 가장 몸이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오우거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도, 전투에 앞선 초조함도, 일단 오른발을 들어서 땅바닥을 짓밟자 어디론가 가볍게 날아갔다.
“합스부르크의 영광을 위하여!”
“통령 각하 만세! 공화국 만세!”
어린시절부터 오로지 전쟁터에 버려질 목적으로 길러진 살인병기들이 떼를 지어 돌격했다. 그들은 교관들에게 공화국의 이념을 주입받았으며,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매일 먹고 자는 데 드는 비용이 국민의 세금에서 나왔음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위대한 공화국에, 그리고 아름다운 통령 각하께 은혜를 보답할 차례 아니겠는가!
─ 크르하아아아!
오우거는 드디어 자기가 상대할 만한 적수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안 그래도 시시한 살육에 피가 식어버릴 참이었다. 오우거들 역시 전사였다. 전장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만일 토끼의 두개골을 부숴트리는 것과 적병의 허리뼈를 날려버리는 것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무엇을 위해 귀찮게 전쟁터까지 기어오겠는가.
오우거의 팔뚝에서 힘줄이 꽈악 도드라졌다. 살육! 파괴! 본능에 새겨진 두 단어에 따라 오우거들은 쇠몽둥이와 도끼를 휘둘렀다.
“정면에서 맞서 싸우지 마!”
“주의를 끌어! 시선을 분산시키는 거다!”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고참 기사들이 침착하게 지시했다. 그러나 시선을 분산시킨다는 것은 바꾸어 말해, 적어도 한 명은 오우거를 상대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합스부르크 공화국 제1전열 곳곳에서 기사단과 오우거가 격돌하였다. 그중에 대다수는 운 좋게 오우거의 일격을 피했다. 운 나쁘게도 몇몇 기사는 정통으로 공격을 맞아버렸다. 오우거의 도끼가 방패를 통째로 분쇄하며 상대방의 몸을 찌부러트렸다.
“지벨! 제기랄, 지벨이 당했습니다!”
“멍청한 새끼, 죽은 놈에게 눈길을 주지 마. 우리 앞에 있는 게 그저 덩치만 큰 멧돼지로 보이냐.”
“공격하라! 쉴 새 없이 공격하는 거다!”
그리하여 최전선이 서서히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민병들에게는 천금과 같은 휴식이 주어졌다. 코앞에서 기사들이 죽어나가고 있었지만, 일단 재앙을 피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어떤 민병은 왜 이렇게 늦게 도우러 왔느냐며 분노를 터트렸다.
“게으른 자식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전부 죽을 뻔했지.”
“아이고, 인성부터 썩어빠진 친구야. 거 도와줬으면 됐지 뭘 또 투덜거려. 저기서 기사 나리들이 죽어가는 거 안 보이냐?”
“쯧. 쟤들은 원래부터 죽으라고 여기 있는 거야.”
오우거의 돌격에 잔뜩 뒤로 물러섰던 민병들이 다시 얼기설기 대오를 맞추었다. 곧바로 등을 돌려서 도망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민병들은 칭찬을 들을 만했다.
여기서 도망치면 공화국의 수도 무니헨이 함락당할 것이라는 사실. 자신들의 조국을 짓밟은 마왕군이 바로 코앞에 있다는 사실. 이것들이 민병으로 하여금 앞으로, 재차 앞으로 걸어나갈 힘을 주었다. 민병들이 악바리가 되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앞으로 걸어가! 오우거는 무시하고 걸어가라!”
민병들이 오우거를 지나쳐서 다시금 전열을 정비했다.
멀리서, 그러나 아주 멀지 않은 곳에서 적병이 다가오고 있었다. 헬베티카의 용병이었다.
용병들은 장창을 꼬나쥐고 오랜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군가(軍歌)를 부르고 있었다. 난쟁이와 엘프 특유의 창법이 평원에 음산하게 흘렀다. 고음과 저음이 동시에 진동하면서 노랫소리가 공기를 흔들었다.
머리 잘린 기간테스, 백 마리의 뱀이 울렁거리는구나.
태산에 깔려 하늘에 짓눌릴지라도
살육과 피에 대한 욕망은 화산을 터트릴지어니.
신들마저 도망치고 인간은 멸망하리라.
기가스들은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이었다. 한때 모든 신을 공포로 몰아넣어 세계를 끝장낼 뻔했다. 그러나 인간종의 영웅 헤라클레스가 신들을 도와 기간테스를 무찔렀다. 인간종에게 쫓겨나서 알프스 산맥에 틀어박히게 된 헬베티카인들은, 공공연하게 자신들을 기간테스로 비유하곤 했다.
“크르훕! 크후흡! 크훌라, 크르흡!”
용병들이 후렴을 넣어가며 발을 굴렀다. 어떤 엘프는 기묘한 창법을 구사하며 한없이 길게 아리아를 뽑아냈다. 야만스럽기 그지없는 노래가 그곳에 펼쳐졌다. 하지만 이 야만성에는 어떤 규칙적인 리듬이 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인간들의 귀에는 공포스럽게 들렸다.
엘리자베트가 전방을 노려보았다.
“양익을 출전시킨다.”
“양익에 명령을 하달하라! 출격!”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복창한 명령을 부관들이 반복했다.
기사단을 상징하는 보라색-흰색 깃발. 각각 우익과 좌익을 나타내는 푸른색 깃발, 초록색 깃발. 마지막으로 공격을 지시하는 적색 깃발이 힘차게 휘날렸다. 그와 동시에 뿔나팔 소리가 공기를 타고 널찍하게 울렸다.
“장군.”
“나도 귀 안 먹었다. 우리의 차례로군.”
금발의 친위기사단장, 샤를 리히트호펜이 콧노래를 불렀다.
샤를 리히트호펜은 우익의 기병대를 통솔하고 있었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전군의 총사령관이 담당하는 위치였다. 다만 지금은 엘리자베트가 총사령관이었으므로, 샤를 리히트호펜은 얌전하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얌전하게 내숭을 떨 필요성이 방금 전 사라졌다.
“헬베티카 촌놈들에게 환영인사를 던지러 가볼까.”
“예, 장군. 나팔을 불어라!”
기병들이 술잔을 들어 마시듯이 뿔나팔을 치켜들었다.
그들은 지금 중앙에서 오우거와 분투를 벌이고 있는 동료가 불쌍했다. 모름지기 기사란 군마에 올라탔을 때 진가가 발휘되었다.
날카롭게 벼린 창을 허리에 차고, 비스듬히 공기를 가르면서, 진동하는 땅바닥의 울림에 짧지만 강렬하게 전율을 느껴가며, 이윽고 군마가 몰아쉬는 숨소리와 자신의 숨소리를 일치시킴으로써 끝없이 앞으로 돌격한다―――.
그것은 전쟁이었지만 또한 전쟁의 미학이었다. 달리는 군마의 안장에서는 모든 것이 가벼워졌다. 기꺼이 목숨을 버려도 될 정도로.
“마보(馬步)!”
“마보!”
샤를 리히트호펜이 소리쳤다. 그러자 우익에 배치된 일천 명의 기병이 나란히 속도를 높였다.
평원 저편에서도 일단의 기마병이 달려오고 있었다. 적군의 기마대였다. 마치 거울로 마주보는 것처럼, 이쪽에서 속도를 높이면 저쪽도 따라서 속도를 높였다. 샤를 리히트호펜은 마치 자기가 수천 명의 기병을 동시에 지휘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쪽이 멈추면 저쪽도 멈출까!’
샤를 리히트호펜이 씨익 웃었다.
‘그럴 리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되지!’
반대편에서는 줄리아나 드 블랑 남작이 기병대를 이끌고 있었다. 라우라를 따라 제2차 국화전쟁에서 활약한 이 기병대장은, 이미 몇 차례나 상대편의 기병에 전멸을 선사했다. 그녀는 이번에도 적군을 학살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속보!”
“속보!”
줄리아나 드 블랑 남작이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쓸려 흩날렸다. 드 블랑 남작은 투구 따위를 쓰지 않았다. 그런 건 시야를 방해할 따름이었다. 줄리아나 드 블랑 남작을 뒤따르는 일천 명의 기병이 일제히 가속했다.
─ 두구르르, 두그닥!
지면에 엷게 먼지가 깔리기 시작했다.
줄리아나 드 블랑 남작이 흙냄새를 맡았다. 이것이었다. 이 흙냄새를 느낄 때마다 남작은 온몸에서 피가 생생하게 폭주했다. 그녀는 땅 밑에서 맡는 흙냄새와 군마의 위에서 맡는 흙냄새가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건 전쟁의 냄새였다.
“거창!”
“거창!”
샤를 리히트호펜과 줄리아나 드 블랑, 둘 중 누가 더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외쳤다. 이편에서 일천 명의 기병이 창을 들었으며, 저편에서도 일천 명의 기병이 창을 꼬나쥐었다. 두 부대는 이제 완전히 서로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한 순간.
“돌격하라!”
“헬베티카 만세! 아테네 여신께 영광을!”
“돌격! 돌격! 합스부르크 공화국 만세!”
군마가 최고 속도로 내달렸다. 가열찬 입김이 군마의 마구로 튀어나왔다. 10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양군의 기마병이 거리를 좁혔다.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창을 찔렀고―――마침내 격돌했다.
“크아아아아!”
비명과 비명, 고함과 고함이 뒤섞였다. 한 병사가 적군의 창에 정통으로 맞아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어느 병사는 날카로운 창날에 목이 꿰뚫렸다. 낙마한 병사들이 피어내는 먼지구름에 핏물이 왈칵 튀었다.
“죽여! 모조리 죽여!”
“통령 각하 만세!”
최선두에 이어서 두 번째 대열이, 세 번째 대열이, 네 번째 대열이 순식간에 충돌했다. 어느 쪽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기병들이 부닥치는 소리가 전장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무니헨 전투는 이로써 두 번째 장(章)에 돌입하였다.
============================ 작품 후기 ============================
[리리플]
NineBreaker// 어떻게 하면 엘리자베트 루트에 돌입할 수 있을까요. 저도 궁금합니다.(...)
heybro// 얍얍.
오룔리// 예, 여러 의미에서 중요하죠. 여러 의미에서...
MukCheon// 감사합니다!
도즈// 단탈리안이 연극을 끝내자고 결의한 이 시간, 도리어 엘리자베트는 연극에 더더욱 몰입해야 한다며 질책하고 있습니다. ;ㅅ;
xusaku// 어제는 조금 서버가 심하게 맛탱가리 갔더군요.
수천천사// 경찰 아저씨! 제발 저에게 변명할 기회를!
스핀미트//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사실 엘리자베트는 어릴 적 아버지와 오빠들이 저질렀던 일 때문에 성욕 자체를 혐오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맥켄리// 과연 어떻게 될지. 참고로 저도 모릅니다.(...)
소설은제1의예술이다// 어제는 정말 마구마구 버벅거리더군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