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67 악(惡)의 극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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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새벽의 서늘한 수증기가 걷히지 않은 무렵.
오우거들이 대지를 울리는 소리가 이곳,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사령부까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오우거 발자국 소리에는 불길한 마력이 있었다. 그 공포스러운 진동에 병사들은 오히려 침묵하고 마는 것이었다.
─ 꿀꺽.
누군가가 침을 삼켰다. 단일 전투에서, 그것도 양군의 총병력이 4만을 넘어서지 않은 전투에서 오우거가 이백 마리나 동원되는 경우는 거의 전례가 없었다. 공화국 군진이 기묘한 침묵에 휩싸였다.
“창을 높이 들어라!”
“제대로 땅바닥에 고정시키고! 허리를 숙여!”
“오늘 신나게 한번 놀아보자!”
어수선한 공기를 다잡으려는 것일까. 고참들이 병사들의 엉덩이를 차거나 등을 후려갈기면서 분위기를 전환했다. 거기에 몇몇 병사가 호응하여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제야 군중의 공기가 그나마 달구어졌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엘리자베트 옆에서 휘파람을 불었다.
“고참병들이 제대로 해주고 있군요. 하여간 짬밥을 많이 먹은 놈들은 달라도 뭔가 다르다니까요. 그런데 우리의 자랑스러운 공화국 국민들께서 잘 버텨주시려나 몰라.”
“슐라이어마허.”
엘리자베트가 무심하게 말했다.
“여긴 본인의 개인적인 집무실이 아니다. 입단속을 잘 하도록.”
“하, 하하. 죄송합니다. 각하.”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오른손으로 경례했다. 전투가 시작하고서, 아니 시작하기 한참 이전부터 엘리자베트는 냉랭하게 날이 서 있었다. 마치 엘리자베트 주변에만 보이지 않은 눈발이 조용히 휘몰아치는 것처럼 보였다.
“오우거를 양익에 두지 않고 정면으로 가져왔다. 우리의 기병 전력을 약화시키겠다는 것이지. 알면서도 당해줄 수밖에 없는가. 아니,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인가…….”
엘리자베트가 전방을 노려보며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쿠르츠는 얼마 전부터 엘리자베트 통령이 혼잣말하는 습관이 늘었다고 생각했다. 악몽에 시달리는 횟수야 전과 다름없이 많았지만, 왠지 혼잣말이 유별나게 잦아진 것 같았다. 처음에는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도 통령이 자기한테 의견을 물어보는 줄 알고 열심히 대답해보았지만, 이내 통령에겐 말상대가 필요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군로도 잘 잡았죠. 강이나 숲이 있는 곳은 기막히게 피해갔으니. 더 빨리 올 수 있었을 텐데도 일부러 진득하게 걸어왔습니다. 뭐, 저쪽에도 고수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쿠르츠도 대충만 맞장구치기로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통령이었다. 혼자서 중얼거리도록 내버려두어서야 멋이 없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자신의 깊은 배려심에 살짝 감동했다. 왜 자기와 같은 남자가 여자들한테 인기가 없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힘들여서 목책을 세워뒀는데 오우거가 상대여서야 쓸모가 없겠습니다요.”
“아니. 민병에게, 모든 병사에게 심리적인 위안이 되어준다. 눈앞에 튼튼한 목책이 있는 것과 아무것도 없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적어도 민병들이 도망치지 않도록 발목을 잡아줄 것이다.”
――오우거들이 그 목책을 수수깡마냥 가볍게 날려버리기 전까지는.
엘리자베트도 쿠르츠도 다음에 이어질 말을 구태여 언급하지 않았다. 어차피 공화국 사령부에게 민병이란 고기 방패 그 이상의 의미도 그 이하의 의미도 없었다. 순전히 주력 병력을 다치지 않고 보존시키기 위해 앞에 세워둔 몸뚱어리들…….
“하지만 소인도 놀랐습니다. 각하께서 아무런 주저도 없이 시민병을 그런 용도로 쓰시다니요. 전쟁은 어디까지나 군인의 영역. 각하가 항상 말씀하고 다닌 바 아니었습니까?”
“본인은 이 전쟁에서 모든 신념을 버렸다.”
엘리자베트가 싸늘하게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자조하는 기색이었다.
“어차피 단탈리안을 상대로 긍지를 지켜나가며 싸우기란 불가능하다. 자기 신념에 잡아먹히거나, 단탈리안에게 잡하먹히거나, 어떻게 해도 양자택일의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 남자는 어째서인지 상대방의 신념을 모조리 꿰뚫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전부 버렸다.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최소한의 윤리도, 국가란 국민과 동일하다는 명제도, 엘리자베트라는 인간이 그동안의 인생에서 쌓아올린 모든 믿음을 뒷전에 내팽개쳤다.
지금 이 자리에 서서 평야를 노려보는 사람은 단지 전쟁에 재능을 타고난 한 명의 군인.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한 자루의 무기였다.
“본인은 전쟁이 끝나면 공식적으로 물러설 계획이다.”
“예?”
쿠르츠가 깜짝 놀랐다.
오우거의 발소리가 점점 저편에서 다가오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전투를 새까맣게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만 제정신이냐며 반사적으로 물어볼 뻔했다. 쿠르츠가 그나마 평범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이런 상황에서조차 농담을 던져대는 습성 덕분이었다.
“어, 어젯밤에 날밤을 새셨습니까요? 막 통령 각하의 입에서 헛소리가 흘러나오는데요.”
“자네는 입을 단속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군. 그런 성질머리로 어떻게 근위대장까지 올라섰는지 불가사의할 지경이야.”
엘리자베트가 어이없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야 원래 그림자 출신이기도 했고, 각하께서 실력주의를 제창하셨으니……아니. 괜히 말을 딴 데로 돌리지 마십쇼! 정말입니까, 각하? 아니. 각하는 농담에 처절할 만큼 재능이 없으니 당연히 진심이겠지요.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제정신입니까, 각하?”
“……일단 근위대장의 목을 자르기 전까지는 자리를 보존할 셈이니 안심하게.”
“아니. 갑자기 왜 그런 결심을?”
엘리자베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갑자기가 아니다.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자네에게 비밀로 감쳐두고 있었지만, 본인은 2년 전쯤부터 각종 환각 증세에 시달렸다.”
“…….”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저도 모르게 주변을 재빠르게 둘러보았다. 지금 두 사람은 칼마르어(語)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륙의 모든 언어에 능통한 두 명이었기에 가능한 묘기였다. 부관들이 대화를 알아들을 리 없었지만, 한 평생을 첩보조직의 간부로 살아온 쿠르츠였으므로 습관적으로 주위를 살핀 것이었다.
“각하.”
쿠르츠 슐라이어마허의 목소리 어조가 달라졌다. 장난기가 사라지고 한없이 차값게 가라앉은 음색이었다.
“이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또 누가 있습니까.”
“설마 본인이 이런 일을 떠들고 다닐 위인으로 보이는가. 만일 누군가 알아차렸다 한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
“……왜 통령 각하의 시녀들이 주기적으로 물갈이가 되나 싶었는데, 단순히 간자를 대비하는 차원의 작업이 아니었군요. 이해했습니다.”
엘리자베트는 시녀를 짧으면 3개월, 길어도 1년씩 갈아치웠다. 지나치게 외부의 개입을 조심스러워 하는 것 아닌가 암암리에 생각했건만 이런 속사정이 숨겨져 있었다. 엘리자베트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도와주는 시녀들은 얼마 안 가서 통령의 비밀을 알았다. 그리고 퇴직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차디찬 불귀의 객이 되었다.
“한 나라의 통수권자가 환각증에 시달리는 정신병자 후보생이라니. 농담이라면 적이 불길하고, 농담이 아니라면 더욱 더 웃을 수 없다.”
엘리자베트가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런데도 본인이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은 것은 오로지 하나의 이유. 아직 대륙에 단탈리안이라는 이름의 악몽이 배회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단탈리안을 상대할 인간은 본인밖에 없다. 과신이라 해도 좋다. 자만이라 해도 좋다. 그렇지만 적어도 본인에게 이건 냉정한 현실이요 진실이다.”
마치 서로가 불 타는 짚을 품안에 안고 달려가는 경주와 같았다.
두 사람 중 누군가는 쓰러져야만 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해서 달려나가다가는 자신조차 불길에 휩싸여서 파멸하겠지. 불에 타오를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발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단탈리안의 양녀가 망명했을 때 직감했다. 마지막 기회라고. 이대로 시간을 끌어봤자 단탈리안의 제국이 공고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본인이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 결착을 내고 싶었다…….”
어쩌면 엘리자베트 개인의 욕심이 섞였을지 몰랐다.
엘리자베트는 나날이 짙어지는 환청을 유심히 들으면서 생각했다. 이건 내 과업이다. 그러나 이리하여 나의 지능이 쇠퇴하고, 나의 판단력이 둔해질 경우, 누가 나서서 단탈리안을 견제할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자신이 아직 최고의 상태에 머무를 때 단탈리안과 승부를 보고 싶었다. 누군가가 과욕이라 욕해도 변명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트 통령은 각오를 굳혔다…….
“고로, 우리의 목적은 제국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다. 단탈리안. 그 남자의 목을 베어버리기만 하면 우리의 승리다.”
엘리자베트가 주먹을 꾸욱 쥐었다. 한때 합스부르크의 에메랄드라고 불린 그녀의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도 불타올랐다.
그때 오우거들이 거의 공화국 군진에 접근했다. 민병들이 벌벌 떠는 모습이 여기서도 훤히 보였다. 그들은 목책을 마음의 성벽으로 삼아 어떻게든 장창을 붙들고 있었다.
“거창!”
“거차아아앙!”
부관들이 목청이 터지라 소리 질렀다.
민병들이 이빨을 깨물며 장창을 앞으로 내밀었다. 창 밑바닥을 땅바닥에 단단히 고정시키고, 오른손으로 장창을 쥐어잡은 채 왼손으로 오른손을 지탱했다. 본래 기병대가 돌격해올 때 취하는 자세였다. 그러나 눈앞에 밀어닥치는 것은 기병대보다 아득하게 공포스러운 마물이었다.
“궁병대, 발사!”
“쏴라!”
간격에 들어오자 궁병들이 굳은 얼굴로 활시위를 놓았다. 수백 개의 화살이 공중을 가로질렀다. 표적이 워낙 거대하기 때문인지, 화살 자체는 상당히 괜찮은 명중률을 자랑하며 오우거의 살갗에 떨어졌다.
─ 크라하아아아아!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제아무리 날카롭게 벼린 화살촉이라 할지라도 오우거의 두꺼운 가죽을 꿰뚫기란 어려웠다. 대다수의 화살은 꽂히지도 않고 튕겨져 나갔다. 오우거들은 따끔한 장난질에 분노가 치밀어서 더더욱 가열차게 돌격했다.
“으, 아아……아아아…….”
“막을 수 있을 리가……이걸 어떻게…….”
“주먹에 힘을 놓지 마라!”
민병들이 발뒤꿈치를 물리려는 순간, 부관들이 능숙하게 소리쳤다.
“손에서 힘을 놓는 순간 너희는 전부 죽은 목숨이야! 창대를 꽉 쥐어! 오우거의 눈알이 꿰뚫리도록 단단히 잡으란 말이다!”
창에서 주먹을 놓지 마라.
간결하고도 직접적인 명령에 민병들이 본능적으로 복종했다. 마치 이 주먹에 자신의 생명이 달렸다는 것처럼 온힘을 집중했다. 그렇다. 전에 없이 단단한 목책도 놓여 있지 않은가. 괜찮을 거다. 틀림없이 괜찮을 거다.
민병들의 헛된 희망이 부숴지는 데엔 단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 콰아아아앙!
오우거들은 거대한 쇠몽둥이를 휘둘렀다. 단 일격에 목책들이 산산조각 나서 하늘에 붕 떠올랐다. 나무 파편들이 흩날리는 장면을 민병들이 경악하며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눈이 전부 떠지기도 전에, 오우거들은 한 발자국 내딛어서 두 번째 일격을 날렸다.
“크아아악!”
“사, 살려줘!”
육편이 튀었다.
검은색 핏물이 허공에 떠올랐다가 땅바닥에 엎어졌다. 내장과 뼈도 함께였다. 오우거들은 마치 코앞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마냥 거침없이 질주했으며, 그들이 무릎을 처올릴 때마다 사방에 인육이 난자했다.
“통령 각하.”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엘리자베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다. 기다려라.”
엘리자베트 통령은 민병이 학살당하는 광경을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 작품 후기 ============================
[리리플]
MukCheon//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수천천사// 데이지는 아직 16살-17살이에요!?
Omicron// 엘리자베트가 엄마, 단탈리안이 아빠, 데이지가 딸인가요.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가족.(...)
오룔리// 이 전투에서 운명이 갈릴 인물이 한두 명이 아니군요. 과연 어찌될지...
heybro// 저 역시 죽음보다는 그쪽이 더 합당한 처벌이라고는 생각합니다.
halem// 프렌/다가 되어버리는 겁니까!?
호박호박// 데이지의 계획대로 단탈리안을 죽이다니요 ?_? 데이지는 단탈리안을 죽일 계획이 없습니다.
레이어즈// 얍얍.
플레이어드// 네에...? (당혹)
사실파괴// 욥욥.
조아라가 많이 튕기네요. 으으, 지각해서 죄송합니다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