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66화 (466/510)

00466 악(惡)의 극본  =========================================================================

우리가 돌아가려고 하자, 공교롭게도 적진에서 일단의 기병이 출격했다.

아마도 우리를 내쫓으려 뛰쳐나온 모양이었다. 허겁지겁 밥을 챙겨 먹느라 지각한 것일까. 반응이 느렸다. 이미 정찰로 확인할 건 전부 확인했다. 우리는 미련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공화국 기병대는 한참이나 쫓아왔으나, 우리의 말발굽이 피어낸 먼지구름 이외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

그렇지만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뒤를 돌아보았다.

군마들이 밟고 지나간 자리에 더러운 먼지가 부유했다. 그 너머로 무수히 많은 깃발들이 신기루처럼 느릿하게 펄럭거렸다. 아마 어느 깃발 아래에는 데이지가 서 있으리라. 녀석은 틀림없이 나를 발견했겠지.

“주군?”

“아무것도 아닙니다. 혹시나 덜미가 잡힐까봐 추격병을 확인해봤습니다.”

내가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망원경으로 최대한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거기엔 데이지가 없었다. 나는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데이지의 희생을 존중해주어야 하는가? 이대로 내가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척 넘어감으로써, 그녀에게 만족스러운 결말을 안겨주어야 할까.

아니라면……말해주어야 옳은 것일까.

네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가장 처절하고 비참한 방식으로 실패했다는 것을 눈앞에서 폭로해야 마땅한가. 그것이 도리어 데이지를 어떤 의미로 존중하는 길일까.

어느 쪽이든 자기만족에 불과했다. 너무나 당연했다. 문제는 어느 선택이 실제로 데이지를 더 위하는가, 그뿐이었다. 단탈리안이라는 역할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다만 데이지를 위해서.

“라우라. 이번 전투에 대해서 미리 말할 게 있습니다.”

“주군의 요망은 웬만하면 다 들어주겠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버님이었다.

스물네 기의 기병이 평원을 가로질러서 이쪽 진지로 다가왔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이미 아버님이 그곳에 있음을 다 알았다.

검은색 군마에 검은색 망토, 온몸을 흑색으로 도배하는 의복 따위는 아버님밖에 입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건대 아버님은 옷 고르는 눈썰미가 형편없었다. 재미난 점은 여자들 옷을 사줄 때는 또 능숙하게 잘 고른다는 것이었다.

“아버님이야.”

“어? 정말?”

루크가 밀빵을 내리고 타조처럼 고개를 올렸다. 루크는 평야 저편을 바라보더니 눈을 가늘게 감았다.

“너무 멀어서 안 보이는걸.”

“확실해. 어딜 봐도 아버님이잖아. 오빠는 눈구멍을 뒀다가 어디에 쓰는 거야? 아버님도 알아보지 못해서야 정말로 아무런 쓸모가 없네.”

“…….”

정오 무렵. 햇살이 찬란한데도 유독 아버님만큼은 반쯤 그림자에 덮인 것 같았다.

그 옆에 머리가 나빠 보이는 금발머리의 여자도 눈에 띄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저건 인간이 아니라 원숭이 내지는 나무 비슷한 생명체였다. 관심을 줄 필요가 전무했다.

“우리가 있는 걸 알아보실까?”

루크가 불안하게 속닥거렸다.

“많이 화나셨을 텐데. 솔직히 어떤 얼굴로 대부님을 봐야 할지 모르겠어.”

“오빠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무표정하게 있기만 하면 돼. 유일하게 오빠가 멍청해 보이지 않는 표정은 그거 하나뿐이야. 아무런 말도 하지 마.”

“……네.”

우리는 공화국의 신뢰를 얻어내서 이번에 출전했다. 바르바토스를 극악하게 고문한 것이 유효했다. 우리 남매가 이중간첩일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겠지. 정말로 너희가 배신자라면 어디 단탈리안의 군대와 싸워봐라. 그런 의미도 숨어 있을 것이다.

이제 와서 루크가 어수룩하게 연기하는 바람에 시나리오가 무너지면 안 되었다.

“……?”

시야에 이상한 부분이 잡혔다. 바로 아버님의 왼발이었다. 거짓말, 설마?

마왕인 아버님이 신체를 절단된 채로 내버려둘 리 없었다. 다시 말해, 저 왼발은 일부러 아버님이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이었다……. 어째서?

사죄의 의미다.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으며 그걸 영원히 잊지 않겠노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최근에 아버님께서 누군가에게 사죄해야 할 만한 사건은 단 하나. 양녀인 내가 처형식에서 난리를 피운 것이다.

꾸욱.

내가 입술을 깨물었다. 한 줄기의 피가 턱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르바스, 가미긴, 시트리, 선제후 마왕들 전원이 아버님의 절대적인 우군이라 생각했다. 바싸고는 선제후이긴 하나 실권이 없으므로 안심했다. 아버님한테 과도한 책임을 지울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혹시 내 판단이 틀렸던 것일까.

“데, 데이지? 입에서 피가 나고 있어.”

마르바스나 바싸고, 그쯤에서 아버님에게 책임을 요구했을까. 분수를 모르는 작자들이 아니고 뭔가. 아버님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권좌에 오르지도 못했을 것들이 간단히 은혜를 잊어버리고 이빨을 드러냈다.

안타깝게도 나에게 그들을 응징할 방법은 없었다.

나는 이번 전투에서 죽을 계획이었다.

시나리오는 단순했다. 전투가 벌어지고 중반에 가서, 나는 아버님을 향해 단독으로 돌격한다. 아버님은 내가 당신을 노리고 있음을 예상했을 터. 이쪽이 철부지처럼 적진에 뛰어들었을 때, 모종의 수단을 동원하여 날 없애려 들 것이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망가트린 것에 대한 원한.

마왕 파이몬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에 대한 복수.

마지막으로, 마왕 바르바토스를 모욕한 것에 대한 단죄.

아버님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나를 죽이겠지. 순수하기 그지없는 증오로써 나를 처단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함으로써 아버님은 영원히 피해자로 남게 된다.

저 멀리서 아버님이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말발굽이 일으킨 먼지구름 때문에 아버님의 모습이 사라졌다. 나는 되도록 길게 먼지구름을 쳐다보았다…….

*  *  *

대륙력 1513년 6월 13일, 양군이 무니헨의 평야에 대치했다.

그야말로 사방이 훤히 트인 지형이었다. 어딘가에 복병을 숨겨둘 수도 없었다. 강줄기를 이용한 전술도 불가했다. 오로지 양쪽 지휘관의 순수한 전술 능력에 의해서 승패가 갈리겠지.

병력은 우리 합스부르크 제국군이 일만오천 명.

반면에 합스부르크 공화국군이 약 이만이천 명에 달했다. 병사의 숫자만 두고 보자면 제국군이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그러나 공화국의 이만이천 병력 중에서 칠천 가량은 민병이었다. 도저히 써먹지 못할 정도로 약하다, 라고 평가하기는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주 믿음직스러운 병력은 아니었다. 솔직히 인간 방패 그 이상의 의미는 없을 거다.

“역시 민병을 제1전열로 내세웠는가.”

라우라가 적진을 둘러보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고기 방패로 쓰겠다는 의도가 너무 적나라해서 도리어 쑥스럽군.”

“하지만 그만큼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무얼. 정석에는 정석으로 대응해줄 따름이다. 주군, 오우거들을 준비해주게.”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오우거 이백 마리가 천천히 움직였다. 쿠웅, 쿠웅, 하고 오우거의 욕중한 몸뚱어리가 움직일 때마다 땅바닥이 바르르 떨었다. 이윽고 오우거 이백 마리가 모두 최전방에 도열했다.

멀리 저편에서 공화국 군사들이 불안에 떠는 것이 눈에 잡혔다. 창날 끄트머리가 미묘하게 계속 움직인다는 게 증거였다. 이건 장창을 쥔 병사가 끊임없이 몸을 이쪽저쪽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뜻했다. 즉, 공포에 잠겨서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이것이 민병에 대한 라우라의 대책.

정예병이라면 또 모를까, 평범하게 도시나 농촌에서 자경단으로 지낸 민병이 오우거의 공포를 이겨내기란 거진 불가능했다. 오우거가 코뿔소처럼 미친 듯이 돌격해봐라. 민병은 그 기세에 짓눌려서 잠시라도 버티지 못한다.

─ 크르하아아.

─ 그르르으…….

오우거들이 걸쭉하게 침을 흘렸다.

그들에겐 일부러 한 끼를 굶겼다. 배고플수록 흉폭해지는 오우거의 습성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체력이 떨어지겠으나 오우거는 한 끼 정도야 굶어도 상관없었다. 인간들을 바라보면서 군침을 다시는 오우거의 모습에는 끔찍한 구석이 있었다.

“저것 보아라, 주군.”

라우라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어투로 적진을 가리켰다.

“기사단이 움직인다. 진형을 바꾸고 있어.”

“예상대로 흘러가는군요.”

우리가 오우거를 전방으로 내보내자, 공화국군도 즉각 대처했다. 양익에 펼쳐져 있던 기사단이 대거 중앙으로 배치된 것이었다.

이대로 오우거가 돌격해버리면 민병의 제1전열이 형편없이 무너질 것이 뻔했다.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공화국은 제1전열 중간중간에 기사 전력을 섞어줄 필요가 있었다. 오우거를 상대할 수 있는 인간은 기사밖에 없으니까.

이것 역시 라우라가 의도한 바였다.

우리 제국군은 보병에서야 상대방을 압도했으나 기병에선 그러하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기사단 때문이었다. 초인들로 이루어진 기사단은 언제나 마왕군에게 위협적이었다. 물론 헬베티카의 용병도 다들 한 가락 하는 베테랑이었지만, 기사단이랑 정면에서 충돌할 경우 마냥 승패를 장담할 순 없었다.

요컨대 공화국의 기병 전력을 얼마나 약화시키느냐. 여기서 전투의 향방이 결정되었다.

“절반은 빠져나간 듯하군. 안 그런가?”

라우라가 기분 좋게 말했다.

라우라는 오우거를 전방에 배치함으로써 민병에 대한 대책과 기병에 대한 대책, 두 가지를 한꺼번에 잡아냈다. 민병은 오우거를 두려워하며 제대로 싸우지 못할 것이요, 기사단은 오우거를 처치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흩어졌다. 일거양득이었다.

“좋습니다. 뿔나팔을 부십시오.”

“호오. 연설전을 주고받지 않아도 괜찮은가?”

“마법사들의 체력을 아껴야지요. 어차피 엘리자베트와 저는 연설에서 엇비슷한 실력을 가졌습니다. 괜히 서로 전력을 낭비할 이유가 없습니다.”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부관들을 쳐다보았다.

“개전 신호를 알리도록.”

“알겠습니다, 공작 전하!”

부관들이 깃발을 크게 좌우로 흔들었다.

곧이어 평원에 수십 자락의 뿔나팔이 울리기 시작했다.

─ 부우우우우.

이쪽에서 뿔나팔을 불어대자 저편의 공화국도 소리를 울렸다. 야만적이고 음산한 마왕군의 뿔나팔과 깔끔하고 정갈한 인간군의 뿔나팔. 두 음색이 평원 정중앙에서 맞물려 얽혀들었다.

라우라가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전군, 전진하라!”

부관들이 라우라의 명령을 그대로 큰소리로 복창했다. 전진하라! 전군, 전진하라! 순식간에 하나의 명령이 여러 갈래의 목소리로 군중을 메웠다. 헬베티카 용병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힘차게 발을 내딛었다.

따로 구보를 맞출 필요가 없었다. 맨 앞에서 오우거들이 발걸음을 뻗으니 대지가 일정한 박자로 흔들렸다. 헬베티카 용병들은 낄낄 웃으면서 그 박자에 자신들의 발걸음을 맞추었다.

그러자 우리군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가 된 것처럼 정확한 박자로 오른발과 왼발을 내딛었다. 오우거 이백 명과 용병 일만오천 명이 한 순간에 땅을 짓밟자, 마치 작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대지가 요동쳤다.

양군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졌다. 라우라가 두 번째 명령을 하달했다.

“마법사 부대, 발포하라.”

“발포하라!”

서른여섯 명의 마법사들이 공중에 큼직한 불덩어리를 쏘아올렸다. 불덩어리는 길게 궤적을 그리면서 적군을 향하여 쇄도했다. 그러자 공화국에서도 수십 개의 불덩어리를 발포했다. 상대방의 포격을 막기 위해서 마법사들이 분주하게 손을 놀렸다.

비록 불덩어리가 이곳에 떨어지기 직전, 아군의 마법사가 펼친 방어막에 상쇄되었지만 열기만큼은 막지 못했다. 전쟁터는 점점 더 뜨거운 공기로 달아올랐다.

전투의 시작이었다.

============================ 작품 후기 ============================

[리리플]

MukCheon// 엇, 오랜만이었나요? 저는 왠지 모르게 꼭 매일 뵙는 것 같네요. 헤헤.

소설은제1의예술이다// 아깝게도 2위입니다. 사실 아까울 건 하나도 없지만요!

NineBreaker// 대륙의 평화는 우리가 물리친다! (...)

Omicron// ;ㅅ;

사실파괴// 얍얍.

수천천사// 라우라가 정치에 재능이 없음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졌죠.

요플레를먹을때는껍질부터// 닉네임이 상당히 인상적이군요.(...)

호박호박// 황금화살이 아니라 납화살을 쏘는 에로스군요. 알고 있습니다.

Kaminell// 헉, 그렇습니까? 당장 보러 가야겠네요.

바람귀공자// 얍얍.

지각해서 죄송합니다 ;ㅅ;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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