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65화 (465/510)
  • 00465 악(惡)의 극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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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륙력 1513년 6월 7일.

    우리 합스부르크 제국군은 일만오천의 병력을 몰아 공화국의 수도로 진군했다. 조급해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비록 적지의 한가운데에 떨어져 있었지만, 병사들은 여유로운 마음을 잃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공화국 통령은 오우거를 그냥 내버려두는군. 기사단을 소수로 운용하면 어느 정도 오우거를 효과적으로 격퇴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기사단 전력을 최대한 아껴두려는 것이지요.”

    라우라와 내가 말머리를 나란히 움직이며 두런거렸다.

    내 말에는 특수한 안장이 설치되었는데, 덕택에 왼발이 의족으로 대체되어버린 나도 말을 탈 수 있었다. 딱히 주문하지도 않았건만 난쟁이들이 뚝딱 만들어왔다. 난쟁이들은 손기술이 정말 뛰어나구만.

    “병사들의 실력만 놓고 비교해봤을 때 우리군은 공화국을 압도합니다. 공화국군이 제아무리 엘리자베트 통령 아래에서 강병으로 훈련되었다 할지라도, 이쪽은 수십 년 동안 전장에서 구른 베테랑 용병……상대될 리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엘리자베트는 더더욱 기사단 전력을 보존하고 싶겠지.

    이백 명의 오우거를 사냥하겠답시고 기사단을 파견하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수가 있었다. 설령 마을주민들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릴지라도 최후의 일전을 위해 기사단을 아껴둔다. 그것이 엘리자베트의 결정이었다.

    “최후의 결전을 위해 모든 것을 비축한다는 것인가? 결국 공화국 통령도 위선자로군. 오우거가 국민의 농토를 마음껏 짓밟고 다니는 것을 허용했다. 대단한 양반이 아니다.”

    “뭐, 이쪽의 속내를 읽은 것 아니겠습니까. 조금 아쉽군요.”

    나는 실제로 적군의 기사단을 끌어내려고 오우거를 풀었다. 오우거처럼 막강한 마물을 상대하는 데엔 기사가 반드시 필요했다. 어쩌면 유인책에 걸려들까 싶어서 해보았지만 역시 안 되었다. 뭐, 이 정도로 뻔한 함정이었다. 엘리자베트가 걸려드는 게 도리어 이상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

    주변의 농가를 약탈하면서 천천히 전진했다. 농민들이 급하게 도망치느라 마을의 식량창고에 꽤 넉넉하게 식량이 남아 있었다. 덕택에 우리군은 진군하면 진군할수록 식량이 풍족해지는, 기이한 현상을 겪었다.

    마침내 6월 12일.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수도 무니헨 바로 코앞까지 당도했다.

    라우라는 항상 그랬듯이 직접 소수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정찰했다. 전군의 총사령관이 정찰을 다녀오는 것은 상당히 무모했지만 그게 라우라의 방식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라우라는 정찰 도중에 적군의 분견대와 마주치고 말았다. 만일 분견대가 공격해 들어왔다면 자칫 목숨이 위험했을 상황. 하지만 라우라는 눈 한번 깜빡거리지 않고 명령했다.

    “공격하라!”

    겨우 스무 명 남짓하는 기병으로 돌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이러자 공화국의 분견대가 오히려 놀라서 황급하게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아마 이쪽에 병사가 스무 명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도망쳤을 거다.

    “위험천만했군요. 어떻습니까.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까?”

    “아니. 마침 잘 됐다. 한동안 이 근방을 돌아다니는 적군이 없을 테니 마음껏 정찰하지.”

    그리하여 라우라는 네 시간 동안이나 느긋하게 주변 지역을 살펴보았다. 생긴 건 예쁘장하게 생겨서는 심장이 무슨 강철로 되어 있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라우라의 뒤를 따라다녔다.

    “쯧. 제법 단단하게 대비해두었군.”

    라우라가 저 멀리 평야를 내다보면서 혀를 찼다. 그곳에 공화국군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다. 공화국을 상징하는 푸른색과 흰색의 깃발이 무수하게 펄럭거렸다.

    “척 살펴봐도 병력이 이만을 훌쩍 넘긴다. 이만삼천, 사천, 그 정도일까. 우리군에 비해서 숫자가 확실하게 많다.”

    “이상하군요. 그렇게 많이 남겨두었을 리가 없습니다…….”

    공화국의 모든 병력이 사만오천.

    그중에 베네치아 방면으로 보낸 병력이 삼만이었다. 이건 가미긴의 와이번 부대를 동원해서 확실하게 정찰해두었다. 현재 공화국에 남은 병력은 아무리 많아봤자 일만칠천 가량을 뛰어넘을 수가 없었다.

    엘리자베트가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것일까? 그녀라면 뭐든지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갑작스럽게 병력 오천을 만들어내기란 어려워 보였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라우라가 “흐음” 하고 말했다.

    “여기서 고민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다. 가볼까.”

    “가보다니. 어디를 말입니까?”

    “뻔하지 않은가.”

    라우라가 말고삐를 가볍게 휘둘렀다.

    “적진이다.”

    그리고 라우라가 대뜸 군마를 몰아서 적진을 향해 달려가는 것 아니겠는가.

    나와 기병대가 깜짝 놀랐다. 내가 다급하게 라우라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라우라를 따라서 달렸다.

    라우라는 평원 딱 정중앙에 가서야 멈추었다. 망원경을 사용하면 공화국 병사들의 얼굴까지 훤히 내다보일 정도로 적진에서 가까운 거리였다. 적병이 우리를 발견했는지 웅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라우라, 대담한 것도 좋지만 너무 경거망동하는 거 아닙니까!”

    “아아. 미안하다, 주군.”

    라우라가 전혀 미안하지 않다는 어투로 사과했다. 아예 내 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라우라는 망원경으로 적진을 살펴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잠시 뒤에 라우라가 씨익 웃었다.

    “그렇군. 적의 속임수를 알았다.”

    “정말입니까?”

    “주군도 직접 한번 살펴봐라.”

    하고 라우라가 내게 망원경을 건네주었다. 나는 오른쪽 눈가에 망원경을 갖다 붙인 채 공화국의 진지를 둘러보았다.

    마침 점심을 먹을 때라서 그런지 공화국 군졸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빵을 뜯었다. 열 명쯤 모여서 먹는 병사들도, 스무 명 서른 명쯤 모여서 먹는 병사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갑자기 평원에 출현한 우리의 모습을 요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무리도 많았다.

    “알아차렸는가?”

    “아니. 딱히 이상한 점이 안 보입니다만.”

    “주군은 정말 전쟁질에는 소양이 없다. 눈은 달아두었다가 어디에 써먹는 것인가?”

    라우라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망원경을 접어들어서 라우라의 이마를 콩, 하고 약하게 때렸다.

    “전쟁질 이외에는 아무데도 소양이 없는 라우라보다는 낫습니다. 그래서 뭐가 이상하다는 얘기입니까.”

    “밥을 먹고 있는 병사의 숫자다. 일정한 수의 병사끼리 모여서 밥을 먹는 게 아니라, 열 명, 스무 명, 서른 명, 숫자가 들쭉날쭉하지 않은가. 그게 속임수의 비결이다.”

    “하아.”

    밥 먹는 숫자가 뭐 어때서.

    내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시선으로 물끄러미 쳐다보자 라우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주군이 말한 바가 맞다면 합스부르크 공화국은 그동안 맹훈련을 받았다. 통령은 그중에서도 정예병력만을 뽑아서 이곳 수도에 배치했을 터. 그런데 가장 기본적인 숙식을 해결하는 데 병사들이 난잡하게 섞인다는 건 불가능하다. 다시 한번 잘 봐라.”

    “흐음.”

    내가 망원경을 재차 들어서 적진을 유심히 살폈다.

    그제야 비로소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눈에 띄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일정한 숫자를 이루어서 식사를 해결하고 있었다. 대충 열 명일까. 십인대 단위로 모인 것 같았다.

    반면에 중간중간 과도하게 많은 숫자의 병사, 예컨대 서른다섯 명쯤이 한꺼번에 모인 경우가 있었다. 다만 그런 경우가 아주 많지는 않았다.

    “…….”

    “어휴, 아직도 모르겠다는 얼굴인가.”

    라우라가 한숨을 쉬었다.

    조금 재수 없었다.

    “공화국 통령은 아마도 전군을 십인대 단위로 조직했을 것이다. 가장 정석적인 방법이니 말이다. 그런데도 중간중간에 십인이 아니라 수십 명으로 이루어진 분대가 있다는 것은, 그들이 훈련을 거치지 않은 부대임을 의미한다.”

    “아.”

    “틀림없이 급조해서 뽑아낸 병력이겠지.”

    라우라가 노래를 흥얼거리듯 평안하게 말했다.

    “왜 급조해낸 병력을 십인대로 편성하지 않았을까. 거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결론을 유추할 수 있다. 알겠는가, 주군?”

    “제기랄.”

    내가 기어코 욕설을 중얼거렸다.

    “모르겠으니까 알아서 설명해보십시오. 뭡니까? 저를 놀리는 게 재밌습니까?”

    “당연히 주군을 놀리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감미로운 미주(美酒)에 비견할 만큼 맛있다.”

    라우라가 깔깔 웃었다. 젠장할. 나는 툭하면 라우라를 바보라고 놀렸다. 평소에 나한테 당한 짓거리를 복수하려는 게 분명했다.

    “우선 이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 왜 공화국 통령은 신병들을 저리 엉망진창으로 내버려두었는가.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그쪽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십인대로 만들지 않는 편이 효율적이라고요?”

    “그렇다. 괜히 신병들에게 익숙하지도 않은 체계를 강요하느니, 차라리 신병들이 익숙한 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라우라가 적진을 바라보았다.

    “저 신병들은 바로 도시나 마을에서 징집한 민병이다. 도시나 마을의 자경단은 그들 나름대로 익숙해져 있는 편성이 따로 있다.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스물다섯 명, 서른 명 단위의 전투가 편안하다.”

    아하.

    과연 그럴듯했다. 막 뽑은 민병들에게 십인대-백인대 따위의 체계를 억지로 밀어붙인들 효과가 나올 리 없었다. 차라리 수 년 내내 함께 뒹군 고향의 동료들끼리 조를 짜주는 것이 훨씬 나았다.

    다시 말해, 점심 식사에서 열 명 이상 모여 식사를 해결하고 있는 병사들은 엘리자베트의 정예병이 아니었다. 인근 도시와 마을에서 급히 끌어온 민병이었다.

    “통령은 전투가 목전에 다가왔음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을 터. 유사시에 우리가 기습하더라도 곧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분대별로 숙식을 지키도록 엄격하게 명령해두었겠지. 그러니까 소수의 분대를 제외하고 나머지 병사들이 딱딱 열 명 단위로 모인 것이다.”

    “과연……요컨대 일만오천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전부 민병이겠군요.”

    “그렇다.”

    라우라가 미소를 지었다.

    “주군. 두 번째로 추측할 수 있는 결론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예이, 예이. 소인은 천하의 바보 멍텅구리이니 부디 공작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말씀하소서.”

    “후후.”

    라우라가 작게 웃었다.

    “생각해봐라. 만일 공화국의 통령이 정예병과 민병을 함께 움직일 생각이었다면,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민병을 십인대로 조직했을 거다. 편대가 들쭉날쭉인 군대를 갖고서 우리 제국군을 상대하기란 불가능하니까.”

    웃음기를 품은 라우라의 푸른색 눈동자가 순간 암사자처럼 날카로워졌다.

    “민병은 민병대로 가장 효율적인 편대로 구성한다. 정예병은 정예병대로 가장 효율적인 편대로 준비한다. 이런 상황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단 하나. 바로 민병과 정예병을 완전히 분리시켜서 운용하리라는 것이다.”

    “…….”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따로 포진시킬까? 민병을 별동대로 삼아버릴까? 그것도 불가능하겠지. 별동대로 활용하기에는 훈련도가 너무 떨어진다. 민병을 본대로 삼는다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우리군의 진격에 곧바로 무너질 테니.”

    라우라의 눈이 더더욱 가늘어졌다. 그건 사냥감을 노려보는 맹수의 눈짓이었다.

    “공화국에 별동대를 조직할 여력 따윈 없다. 정예병이든 민병이든 모두 본대로 삼을 수밖에 없다. 즉, 민병을 제1전열로 내세우고 정예병을 제2전열과 제3전열로 내세운다. 이것이 공화국 통령의 전술이다.”

    아테네는 지혜의 여신이자 전쟁의 여신이었다.

    예전에 나는 왜 지혜와 전쟁이 함께 취급받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라우라를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적진을 정찰하고 단 한번에 상대방의 전술을 읽어냈다. 이런 인간을 지혜이자 전쟁의 여신이라 부르지 않고 뭐라 칭하겠는가?

    “제1전열의 민병으로 우리 제국군의 공격을 일단 한번 막아낸다. 그리고 우리군이 민병을 상대하느라 약간 지쳤을 때, 정예병인 제2전열과 제3전열로 덮치려는 것이다. 흐응. 정석적이면서 교활한 방법이로군.”

    라우라가 말머리를 돌렸다.

    “돌아가자, 주군. 적의 의중은 파악했다. 이제 우리가 응답해줄 차례다.”

    ============================ 작품 후기 ============================

    [리리플]

    xusaku// 아뇨, 훨씬 더 끈적끈적한 관계를 바랐을 겁니다. 훨씬 더.(...)

    호박호박// 전쟁을 앞두고서 긴장해봤자 좋을 일이 없다는 사실을 라우라도, 단탈리안도, 롱그위도 많은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Omicron// 익명의 민중은 언제나 죽어나가는 작중 현실...

    NineBreaker// 이제 와서 롱그위 루트라니, 이 무슨 기적적으로 참신한 시나리오.(...)

    호박호박// 저도 요새 부쩍 피곤해져서 타자기를 두들기는 게 힘들더군요. 가을을 타는 걸까요...?

    ASKM// 감사합니다!

    매실농축액2// 오늘은 살짝 지각했습니다.

    수천천사// 대충 알고 있습니다. 대충.

    한뫼사람// 비너스빤스는 아마 다시 등장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룔리// 단탈리안과 라우라를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엘리자베트에게 무운을.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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