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64화 (464/510)
  • 00464 악(惡)의 극본  =========================================================================

    용병들은 단숨에 도시를 유린했다.

    불시에 기습을 받은 탓일까. 잘츠부르크 수비대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저, 적습이다!”

    비상사태를 알리는 종소리가 도시의 첨탑에서 요란하게 울릴 즈음, 이미 우리의 선봉대는 야트막한 성벽을 넘어섰다. 용병이 휘두른 칼날에 붉은 핏물이 튀었다. 종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저녁 하늘을 갈랐다.

    잘츠부르크는 아름답게 잘 정돈된 소도시였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외성(外城)이 허술했다. 요새로 이루어진 도시가 아니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은 우리 제국과 국경이 맞닿은 도시를 전부 요새화 했으나, 잘츠부르크는 공화국의 남단, 즉 침입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지대에 놓여 있었다. 멀쩡히 평지를 내버려두고 산맥을 횡단하여 공격해올 줄은 몰랐겠지. 내가 일부러 알프스 산맥을 타고온 이유가 여기 있었다.

    “초전은 싱겁게 끝나겠군요.”

    내가 한손 망원경으로 도시를 둘러봤다.

    “하긴 우리가 사흘 만에 알프스를 돌파하리란 걸 어찌 예상했겠습니까.”

    “주군의 술수 덕분이다. 본인도 기껏해야 닷새가 한계라고 생각했다. 공화국의 통령도 그리 판단했을 거다.”

    라우라가 무뚝뚝하게 명령했다.

    “인간을 살려둘 필요가 없다. 여기서 놓치면 저들은 시민이 아니라 저항군이 되어 우리의 발목을 잡을 터. 철저하게 약탈하고 학살하여 후환을 남겨두지 않도록.”

    “예, 전하!”

    기병대장들이 명령을 하달받고 도시 주변의 평원으로 널리 퍼졌다. 시민들이 허겁지겁 사방으로 도망쳤으나, 기병대는 마치 토끼를 사냥하듯이 시민들을 쫓아서 사살했다. 약 1만 명으로 이루어진 잘츠부르크는 이날 밤 문자 그대로 소멸했다.

    우리군은 민가와 식량창고, 내성을 털어서 군량을 확보했다. 그다지 막대한 양의 식량은 아니었다. 보름에서 한 달쯤 넉넉하게 버틸 만했다. 창고에는 어째서인지 곡식보다 소금이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었는데, 딱히 쓰잘데기가 없어서 챙길 만큼만 챙기고 죄다 강물에 버렸다.

    “저게 다 돈인데…….”

    용병들이 소금가마를 강에 던져버리는 모습을 보며 롱그위 성녀가 중얼거렸다.

    “성녀가 구두쇠인 줄 미처 몰랐군요. 제법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처럼 돈이 썩어나가는 갑부는 제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겠죠. 꼭두각시 전쟁 이후로 우리 왕실이 얼마나 빚을 많이 지게 되었는지 알기나 하세요?”

    롱그위 성녀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아무래도 브르타뉴에게는 브르타뉴만의 고충이 있는 것 같았다. 롱그위 성녀는 무척이나 서글픈 눈동자로 강줄기를 바라보다가, 무언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아! 하고 말했다.

    “단탈리안 궁중백. 제가 축복을 한 번 내릴 때마다 금화 일천 장을 지불하세요!”

    “예?”

    “솔직히 저 덕분에 기습이 성공한 거잖아요. 애당초, 저는 당신한테 따라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축복까지 내려야 한다는 얘기는 사전에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건 추가 노동……계약상에 없었던 일거리……즉, 별다른 대가가 필요해요!”

    내가 짜게 식은 눈으로 성녀를 바라보았다.

    참고로 최고지휘관인 우리야 이렇게 잡담을 떠들었지만, 미리 말했다시피 잘츠부르크는 현재 온갖 방화와 학살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만 명의 무고한 시민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해당했다. 요컨대 롱그위 '성녀'께서는 학살의 현장 한가운데서 돈 얘기를 꺼내고 있었다.

    “저 같은 놈이 이런 말 꺼내는 것도 우습긴 합니다만……안 부끄럽습니까?”

    “제가 부끄러움을 참는 대신 왕실의 재정건전성에 헌신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괜찮아요.”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습니다만.”

    “계속 눈치없게 굴다가는 당신도 새빨갛게 만들어버리는 수가 있어요?”

    전쟁의 여신을 섬기는 성녀님은 조금 화끈했다.

    *  *  *

    나는 라우라와 함께 잘츠부르크 외곽 평야에 나왔다.

    우리를 호위하는 인원은 열여섯 명의 기병에 불과했다. 롱그위 성녀도 여기엔 없었다. 성녀는 폐허가 된 도시에서 술을 마시다가 곯아 떨어졌다. 글쎄, 성녀에게는 성녀 다름대로 고민거리가 있으리라.

    “라우라. 저는 지금까지 수 차례 전쟁을 벌였습니다.”

    내가 어두컴컴하게 펼쳐진 평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중에 마물을 대대적으로 동원한 적은 단 한 번밖에 없었습니다.”

    “알고 있다. 꼭두각시 전쟁에만 마왕군을 투입하지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꼭두각시 전쟁만이 예외였습니다.”

    내가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에서 별빛이 각양각색의 색깔로 윤을 내고 있었다. 나는 이 세계에서 밤하늘을 목격한 다음에야 별이 때로는 초록색으로, 보라색으로, 붉은색으로 빛난다는 걸 알았다.

    “당시 브르타뉴 왕국은 아가레스를 끌어들였습니다. 그것이 좋은 명분이 되었지요. 만일 명분이 없는데도 마왕군을 동원했다면, 그 즉시 대륙의 열국이 반발하여 반(反)마왕군을 조직했을 겁니다. 저는 오직 적합한 명분이 주어질 경우에만 마물을 일으킵니다.”

    내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공화국은 우리의 섭정인 바르바토스를 납치했습니다. 마왕군을 총동원할 명분으로서 충분하고 넘치는군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공화국은 크나큰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한 마디의 단어를 속삭였다.

    그러자 눈앞에 푸른 빛이 투영되며 글자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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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몬스터명(B)]   [체력] [공격]  [방어]  [고용비]

    -오우거 보병    400   505   550   10000골드

    -트롤 보병     610   300   620   11000골드

    -살라만드라(상급)  220   400   190   15000골드

    -운디네(상급)    260   310   250   15000골드

    -노움(상급)     290   300   300   16000골드

    -실프(상급)     200   240   200   11000골드

    -은랑족(銀狼族)   390   560   450   17000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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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나의 전재산은 금화 이백사십만 장 가량.

    성녀가 표현했다시피 돈이 썩어 넘치도록 많았지만, 나는 예전에 몇 번 활용한 것 이외에 몬스터를 시스템으로 고용한 적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나치게 비싸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굳이 거금을 들여서 마물을 장만할 필요성도 적었다. 마물을 동원해도 괜찮은 전쟁이라면 마왕군을 쓰고, 마물을 동원하는 게 곤란한 전쟁이라면 용병을 쓴다. 그걸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오우거, 이백 개체.”

    그러나 이번 전쟁은 달랐다.

    마물을 사용하는 데 거리낄 것이 없었다.

    오우거들을 정말로 고용하겠느냐는 알림창이 떠올랐다. 내가 주저하지 않고 긍정의 의사를 밝혔다.

    “소환.”

    순식간에 내 전재산 수치에서 이백만이 삭제되었다. 나 역시 자린고비 근성이 있었다. 평소였다면 이런 거금이 날아가버린 것에 통한의 눈물을 흘렸겠지. 하지만 엘리자베트를 상대하는 데 들어가는 돈이라고 생각하면 아깝지도 않았다.

    수많은 보랏빛 마법진이 대지를 가득 메웠다. 밤하늘의 별이 무색할 정도로 강렬한 빛이 땅바닥의 마법진들에서 새어나왔다. 호위로 따라온 열여섯 명의 기병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뭘, 아직 놀라기는 일렀다.

    ─ 크라하아아…….

    마법진에서 거대한 형체의 괴물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오우거들이 내쉬는 증기와 같은 숨결이 공중에 흘렀다. 잠시 뒤에 빛이 완전히 사그라들자, 평야에는 이백 명의 오우거가 붉게 충혈된 눈동자로 살기를 피워내고 있었다.

    “오, 오우거다.”

    “백오십……아니, 이백은 거뜬히…….”

    호위병들이 본능적인 공포에 몸을 떨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나한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오우거 이백 명이라면 거진 웬만한 기사단을 쓸어버릴 전력이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과인의 충실한 수하들이다. 겁 먹지 않아도 된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호위병들이 멋쩍은 듯 사과했다. 정작 보호를 받아야 할 라우라와 나는 태연자약한데 경호원인 자기네가 겁을 집어먹었으니 쑥스러울 법했다.

    라우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주군. 저들은 확실히 믿음직스러운 전력이다만, 아예 전투 도중에 소환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상대방이 방심한 사이에 허를 찌르는 효과가 있었을 거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저 오우거들을 평원파의 잔당이라 속일 것입니다.”

    오우거의 가죽에다 바르바토스를 상징하는 문양을 대충 그려넣고, 손에는 바르바토스의 깃발을 건네준다. 중간중간에 제파르 형님의 깃발과 벨레드 형님의 깃발도 끼워넣는다. 즉석에서 평원파 반란군이 완성되는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수준에 불과하겠으나 괜찮았다. 요는 저 오우거들이 ‘바르바토스를 되찾기 위해 공화국에 쳐들어왔다’라는 명분을 내세우게 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평원파의 반란군을 추격하느라 '의도치 않게' 공화국 영지까지 발길을 들인 겁니다. 라우라, 제 말을 이해했습니까.”

    “호오.”

    라우라가 감을 잡았는지 즐겁게 흥얼거렸다.

    “잘츠부르크를 파괴하고 불태운 것은 우리 제국군이 아니라, 복수심에 눈이 멀어버린 평원파 반란군의 소행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반란군을 몰아내고 잘츠부르크를 구원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단, 안타깝게도 한 발자국 지각해버리는 바람에 잘츠부르크는 이미 폐허가 되었지만요. 정말로 비극적인 일이 아니고 뭡니까.”

    “주군은 여전히 성격이 나쁘다.”

    라우라가 키득거렸다.

    “그래서, 사악하기로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나의 주군. 저 오우거들에게 내릴 명령은 무엇인가. 이미 소녀는 어느 정도 감이 잡히고 있다만 예의상 물어보겠다.”

    “잘츠부르크 주변의 마을들을 모조리 파괴할 것.”

    내가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오우거들이 일사분란하게 대열을 이루었다.

    “오늘 밤에 수천 명의 농민들이 공포를 맛보겠지요. 우리 제국군은 공화국 국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사방팔방 뛰어다닐 것입니다.”

    내가 다시 한 번 손을 털어내자, 오우거들이 육중한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백 명의 오우거가 흩어지며 쿠웅, 쿠웅, 하고 음산하게 발소리를 울렸다. 오우거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어두운 밤공기 너머로 사라졌다.

    “물론, 우리가 약간 늦어버릴지도 모릅니다만……그건 사람들의 운에 달린 것 아닐련지.”

    잘츠부르크 인근에 펼쳐져 있던 농토는 초토화되었다.

    섬세한 약탈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인간이 보이는 대로 물어뜯고, 찢어발기고, 농가를 짓뭉개버릴 뿐이었다. 기껏해야 마을 자경단 정도로 오우거를 막아내기란 불가능했다.

    우리 제국군은 기병대를 운용하여 각 마을을 도와주도록 했다. 무척이나 신기하게도, 제국군이 들이닥치면 오우거들이 슬그머니 마을에서 후퇴했다. 마을주민들 입장에서 제국군이 구원자로 비추는 것은 당연했다.

    운 좋게 살아남은 주민들에게 제국군은 이렇게 조언했다.

    “무니헨으로 피난하시오! 여러분의 통령이 도와줄 것이오. 이곳은 우리가 막겠소.”

    그리하여 피난민들은 수도를 향하여 힘겨운 발걸음을 재촉했다.

    피난민들은 수도까지 걸어가면서 소문을 퍼트리겠지. 오우거 수십 마리가 난동을 부렸으며, 합스부르크 제국군이 자기네를 구해주었노라고. 풍문은 금세 널리 퍼져서 제국군에 대한 인상을 좋은 쪽으로 왜곡시킬 것이었다.

    이런 소문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엘리자베트. 너는 자국의 피난민을 죽여서 그 입을 틀어막는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너는 차마 국민을 죽이지는 못하겠지. 너에게 국가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신념일 테니까. 마치 나에게 버릴 수 없는 신념이 있듯이 말이다. 전초전은 이쪽의 승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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