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63화 (463/510)
  • 00463 악(惡)의 극본  =========================================================================

    대륙력 1513년 5월 30일.

    이날은 딱 국화전쟁의 1주년이었다. 작년 5월 30일, 라우라는 헬베티카 용병을 이끌고 사르데냐 왕국을 침공했다. 헬베티카 용병은 그리고 전설이 되었다. 단지 날짜의 숫자가 같았을 뿐이지만, 여기서 어떤 대단한 의미를 찾으려는 병졸이 많았다.

    “전쟁의 여신께서 우리 군주(軍主)-대리를 수호하신다.”

    “여름은 우리에게 축복받은 계절이다. 패배할 리가 없다.”

    이른바 미신.

    그러나 이런 미신이야말로 장병의 사기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깃발에 글자를 수놓도록 명령했다. 아테네 여신께 영광을. 이미 용병들에게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여신의 환생쯤으로 여겨졌다. 짧고 효과적인 문장이었다.

    “아테네 여신이시여! 저희에게 축복을 내려주소서!”

    “오오, 여신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라. 이 얼마나 신성한가.”

    ……아니, 조금 효과가 지나치게 좋았을까.

    라우라가 검은색 군마를 타고 지나칠 때면 주변의 병사들이 우르르 무릎을 꿇은 다음, 마치 진짜 여신을 배알하듯이 감격의 눈물을 쏟아내거나 기도를 올렸다. 이게 꽤나 장관이었다. 라우라는 무덤덤하게 병사들의 환호성에 답례했다.

    “아테네 여신님, 이쪽을 봐주십시오!”

    “저에게 한번만 가호를 내려주세요!”

    거의 광신에 가까운 인기였다.

    문제는 저렇게 열광하는 사람들이 죄다 전쟁터에서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은 용병이라는 점. 웬만한 동네 양아치가 질겁해서 도망칠 정도로 험상궂은 아저씨 아줌마가 ‘여신니이임!’을 울부짖으니 가히 초현실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여기에 대해서는 라우라도 폭발했다. 군중을 돌아다닐 때는 의연했지만 막사에 들어와서 단 둘이 되면 삿대질을 아끼지 않았다.

    “여신님이 뭔가, 여신님이! 나는 인간이지 신이 아니다. 어차피 가라앉을 헛소리라 생각하여 방치해뒀더니만 아주 나날이 목청이 커지는군.”

    “군사들의 사기를 올리는 데 특효약이지 않습니까.”

    “부끄럽지 않은가!”

    라우라가 얼굴을 붉히면서 빽 소리 질렀다.

    귀여워라. 내가 살면서 생각해봤는데, 라우라는 역시 괜한 일로 쑥스러워할 때 제일 귀여웠다.

    “아예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병사들이 보기에 우리 라우라는 진짜 여신처럼 예쁜 겁니다. 전쟁도 잘 해요, 군사도 잘 챙겨줘요, 게다가 예쁘기까지 해요. 이 정도면 완전 여신 아닙니까?”

    “…….”

    그날 이후로 라우라는 여신 숭배에 대해 불평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오히려 환호성이 터질 때마다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자기 외모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부심을 갖고 있는 라우라도 귀여웠다.

    이런저런 분위기를 보면 자명하겠으나, 우리군의 사기는 최고였다.

    우리군이 주둔한 곳에서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수도로 직행하기 위해선 방해물 하나를 넘어야만 했다. 바로 알프스 산맥이었다. 국화전쟁에서 산맥을 돌파했듯이, 이번에도 우리는 이곳을 질주해야 했다.

    대군이 지나치는 것을 결코 쉬이 허락하지 않는 고령. 대륙에서 제일 험준한 산맥이자, 일찍이 만신이 거주하는 영산(靈山)으로 취급받은 곳…….

    라우라가 지휘관들을 불러놓고 딱 한 마디를 내뱉었다.

    “며칠이 필요한가?”

    “일주일만 주십시오, 공작 전하.”

    알프스 산맥이 일개 평지마냥 간단한 지형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나와 라우라가 마왕군 중에서 헬베티카 용병만 가려서 뽑은 까닭이 여기 있었다. 헬베티카인에게 알프스는 고향이었다. 고산 지대를 통과하는 데 있어 그들만한 숙련병이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알프스의 가장 가파른 부분을 통과하는 것도 아니었다. 국화전쟁에서 돌파한 경로와 비교하자면 거의 완만하다고 표현해도 좋았다. 물론, 이마저도 평범한 군대로서는 진군할 엄두도 나지 않겠지만.

    “일주일은 너무 길다. 엿새 안으로 끝내버린다.”

    “조금 과격한 소풍이 되겠군요!”

    지휘관들이 호기롭게 소리쳤다.

    여하간 죽어도 자존심에서 밀리는 걸 싫어하는 족속이었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계책을 더했다. 익히 알려진 대로 헬베티카는 여러 부족이 연합해서 만든 연방이었는데, 그중에서 난쟁이 부족들과 엘프 부족들의 사이가 무척 안 좋았다. 한집살림인 주제에 서로를 원수처럼 보았다. 일종의 라이벌 심리라고 불러야 할까.

    “엘프 부대와 난쟁이 부대를 구분해서 각기 따로 진군시킵니다.”

    그 심리를 이용하기로 했다.

    우리는 그저 부대를 나누는 김에 종족을 기준으로 구분했다, 라고 설명했다. 시치미를 뚝 잡아뗀 것이었다. 어차피 가만히 내버려둬도 저들끼리 알아서 경쟁할 것이 분명했다.

    산맥 초입에 들어섰을 때는 다들 얌전했다. 적당히 강행군을 이어나가면서 쉴 때는 쉬고, 발걸음을 놀릴 때는 놀리고, 전쟁의 프로답게 확실히 정도를 지켰다. 문제는 이따금 엘프 부대가 난쟁이 부대를 지나칠 때였다.

    “훗.”

    자그마한 콧방귀.

    너희 같은 느림보는 언제든지 따돌릴 수 있지만 그냥 예의상 보조를 맞춰둔다는 것처럼. 엘프들은 난쟁이들을 아주 약간 추월하면서 비웃음을 흘렸다. 별다른 대화가 오가지 않았지만 코웃음이란 본래부터 적나라한 제스쳐였다.

    “아니, 저런 간나 새끼들이……?”

    “저 자식들 지금 우리 비웃은 거 맞지?”

    아무렴 난쟁이들이 눈치채지 못할 리 만무했다.

    진군이 시작한 지 겨우 한나절 만에 양쪽 종족의 자존심 대결이 시작했다. 어느 반나절은 난쟁이 부대가 살짝 앞서 나갔다. 당연하게도 난쟁이들은 엘프 부대를 스쳐서 지나칠 때 얼굴을 기하학적으로 구기면서,

    “후.”

    하고 비아냥을 날렸다.

    엘프들은 한동한 멍하게 난쟁이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얼굴이 썩어들었다. 소위 말해 꼭지가 돌아버린 것이었다.

    “저, 저 사시사철 땅바닥에 눌러붙다 못해 구멍에 쳐박혀서 사는 콧수염 새끼들이!”

    “지금 우리랑 한판 해보자는 거야, 뭐야?”

    그리하여 추월하고 추월당하는 접전이 불을 튀겼다.

    휴식이고 뭐고 없었다. 지휘관이 부관을 닥달했고, 선임병이 후배를 갈구었다. 하급 병사들은 자기가 받은 고통을 선임이 아니라 적수들에게, 즉 엘프 부대에 투사했다. 전형적으로 아름다운 상하 관계가 그곳에 있었다.

    애당초 헬베티카 용병은 동네별로 분대가 짜여졌다. 선임이나 후임이나 동향 출신이었다. 같은 마을의 큰형님이 까라고 하면 정말 명령대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저 재수탱이 없는 종족에 한방 먹여주는 것도 매우 중요했다!

    “희여멀건 허우대 새끼들!”

    “진흙에 코 박고 허우적거릴 땅딸보 놈들!”

    “위선자!”

    “변태 자식들!”

    그야말로 엎치락뒤치락.

    제3자 입장에서 보니 유치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유치한 싸움이 다 그러하듯이 당사자들에게는 더없이 심각하고 진지했다. 만약 라우라와 내가 정상적인 사령관이었다면, 이런 쓸데없고 무의미한 경쟁은 제지해야 마땅하겠지.

    하지만 라우라도 나도 정상인의 기준에서 조금 많이 떨어져 있었다.

    “성녀님. 부탁드립니다.”

    롱그위 성녀의 축복에는 장병들에게 기력을 회복시켜주는 효능이 있었다. 꽤나 오래전, 나는 롱그위 성녀가 브르타뉴군에 축복을 내리는 바람에 전투에서 패배한 경험이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써먹을 차례였다.

    롱그위 성녀가 시궁창 같은 얼굴 표정으로 병사들한테 축복을 내렸다.

    “……힘은 오직 내가 증명할지어니.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이 다시금 울창해지는 것을 용납하소서.”

    이튿날에 한 번.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자유를, 죽음을 가까이서 마주할 자유를 기꺼이 누리고자 합니다. 그것이 필멸자가 유일하게 향유하는 불멸임을 아는 까닭입니다…….”

    사흘째에 다시 한 번.

    당장이라도 지쳐서 떨어질 것 같았던 병사들이 용기백배해서 재차 발을 움직였다. 안 그래도 라우라가 아테네 여신의 환생으로 오해받는 상황. 거기에다 우연찮게 아테네 여신의 성녀인 롱그위가 축복까지 걸어주자, 이제 병사들의 미신은 집단적 광신으로 발전했다.

    “여신께서 우리에게 저 재수없는 엘프놈들을 족치라고 명령하셨다!”

    “가자, 친우들이여! 나의 고향 동료들이여! 난쟁이 자식들의 코를 짓뭉개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내려진 과업이다!”

    살짝 이상한 방향으로 신앙심이 폭발했지만.

    나야 아무것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언제 라우라가 진짜 여신이라고 말한 적이라도 있는가. 저들이 알아서 오해하는데 구태여 오지랖 넓게 착각을 교정해줄 이유가 없었다.

    다만 어째서인지 자클린 롱그위 성녀는 심각하게 정신적인 피해를 입은 모양이었다.

    “여신께서 소녀한테 내려주신 권능을 이런 식으로……신성한 전쟁터도 아니고 고작 자존심 싸움에……아아, 아테네 여신이시여! 당신의 미천하고 불민한 종자를 용서하지 말아주세요!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성녀는 병사들에게 축복을 내릴 때마다 땅바닥에 엎어져서 통곡을 했다.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원래 종교인이란 다 저러는 것일까. 새하얀 사제복이 흙에 더러워지는데도 무릎을 꿇은 채 절망하는 모습을 보노라니 조금 동정심이 일었다. 나는 성녀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토닥거렸다.

    “괜찮습니다, 롱그위 성녀. 왜 슬퍼하는지 몰라도 저걸 보십시오.”

    내가 손가락으로 부대를 가리켰다. 성녀가 내 손끝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막 축복을 받고 아테네 여신을 옹호하는 난쟁이들이 있었다. 물론 그들의 눈동자는 엘프에 대한 적의로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오늘에야말로 허우대들을 짓밟아버린다!”

    “아테네 여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곰발톱 부족의 명예를 걸고 깔아뭉개자!”

    내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성녀를 바라보았다.

    “어떤가요. 아테네 여신님에 대한 신앙이 쭉쭉 오르고 있지 않습니까. 성녀로서 참으로 보람찬 과업이 아닌지요.”

    “…….”

    “저들은 앞으로도 평생 아테네 여신님의 충실한 신도가 될 게 틀림없습니다. 롱그위. 당신은 여신의 사도에게 주어진 임무를 누구보다 훌륭하게 이루어낸 것입니다. 여신께서도 당신을 흐뭇하게 여기시겠지요. 자랑스러워 해도 좋습니다.”

    그러자 롱그위 성녀는 아예 목을 놓아 울어버렸다.

    “당신이랑 엮이고 나서 제 인생이 제대로 돌아간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여신이시여! 아아, 여신이시여!”

    “뭐, 뭐가 불만입니까? 말씀해주십시오. 노력해서 고쳐보겠습니다.”

    “전부 불만이야!”

    롱그위 성녀가 나한테 돌맹이를 마구 던졌다.

    명중률이 형편없어서 한 개도 맞지 않았지만 아무튼 간에 나는 도망쳐야만 했다. 참고로 나는 군단이 진군하는 내내 가미긴한테 빌린 와이번을 타고 다녔으므로, 일단 하늘 높이 도망쳐버리면 롱그위 성녀가 날 잡을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내려와! 이 나쁜 새끼, 내 인생을 이렇게 망가트리고 어딜 도망쳐! 책임져! 어떻게든 책임지란 말이야!”

    롱그위 성녀는 계속해서 의미없이 돌맹이를 난사하였다.

    그 모습은 어디를 어떻게 봐도 성녀가 아니라 광전사. 혼기를 놓쳐버리는 바람에 매일 히스테릭을 부리는 노처녀 환자였다. 불쌍하게도……인간이란 정신적으로 내몰리면 저기까지 몰락할 수 있었다.

    롱그위 성녀의 광분과 상관없이 우리 군단은 말 그대로 질풍처럼 진군했다.

    알프스 산맥에 들어온 지 나흘째 되는 날.

    우리는 경이적인 속도로 산맥을 돌파하였다. 강행군을 펼쳤음에도 군사들은 괴로워하는 기색이 거의 없었다. 라우라의 통솔력과 나의 계략, 롱그위 성녀의 지원이 합쳐짐으로써 역사적인 강행군을 성공시킨 것이었다.

    우리들 눈앞에는 저 멀리 잘츠부르크라는 도시가 버티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남단을 수호하는 핵심 도시. 달리 말해, 저곳을 함락시키면 공화국의 수도가 바로 지척에 놓였다.

    라우라가 지휘봉을 천천히 내렸다.

    “잘츠부르크를 지도에서 지워버려라.”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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