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62화 (462/510)
  • 00462 악(惡)의 극본  =========================================================================

    *  *  *

    아나톨리아 제국에서 이십만 대군, 삼십만 대군을 보내온다는 뜬소문이 파다했다.

    아무리 그래도 삼십만은 지나치게 많겠지. 정말로 최대한 쥐어짜내도 이십만 명. 그것도 한꺼번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서 파견할 것이었다. 뭐, 언제나 그러하듯 전쟁이란 직접 맞붙어봐야 알았다. 직접 봐도 긴가민가하는 경우가 태반이었지만.

    “우리군의 대전략은 항구들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내가 최고위 지휘관들을 불러모아서 작전을 설명했다.

    “공화국은 숫자만으로 보면 대단한 적수가 아닙니다. 적군의 주요 전력은 아나톨리아 제국군. 그러나 아나톨리아군은 바다를 통해 건너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해안가의 주요 항구들을 점령해버리면, 원군을 보내고 싶어도 보내지 못할 터.”

    마왕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였다.

    “――틀림없이 공화국군도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나는 자신의 말을 뒤엎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우선 항구들을 내버려둡니다.”

    개전(開戰).

    머릿속에서 무심코 그런 단어가 떠올랐다. 지금부터 전쟁은 시작하였다.

    엘리자베트나 나 정도의 사람에게 전쟁이란 꼭 '직접 가봐야 아는 싸움'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전투가 발생하기 한참 전부터 우리들 사이에는 치열하게 수싸움이 벌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은 내 입술이 열린 지금 개막한 것이었다.

    “항구들을 그냥 내버려둬? 왜?”

    “공화국과 아나톨리아 사이의 알력을 이용하는 겁니다.”

    어두침침한 막사.

    하나하나가 역사의 산 증인이나 마찬가지인 마왕들이 진지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다들 분위기가 여유로웠으나, 그 여유로움 때문에 도리어 막사의 공기는 숨 막힐 듯 팽팽했다. 허튼 말이 튀어나오는 것이 허락되는 장소가 아니었다.

    “적군에는 크나큰 약점이 있습니다. 아나톨리아 제국이 지나치게 병력이 많다는 겁니다.”

    “병력이 많아서 약점이라니. 군량 때문에 그러는 거야?”

    “군량도 군량입니다만 더 본질적이고 더 악질적인 약점입니다. 바로…….”

    *  *  *

    “아나톨리아에 비해서 우리군의 숫자가 너무 적다.”

    엘리자베트가 말했다.

    작전회의실에는 공화국의 군부 수뇌가 전원 모여 있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 통령근위대장, 샤를 리히트호펜 친위기사단장, 막시밀리안 비텐마이어 막료총감……각자가 능히 전쟁터를 호령할 위인들로 채워져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군세가 많이 상륙하면 상륙할수록, 역으로 우리 공화국 군대의 입지는 좁아진다. 아나톨리아에서는 작전권을 독점하려 들겠지. 결국 우리는 아나톨리아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적어도 표면상으로 공화국은 아나톨리아에게 손을 벌리는 형태.

    아나톨리아가 공화국을 버리면 전쟁은 거기서 끝나버렸다. 비록 동맹국이라지만 한쪽이 다른 한쪽에 일방적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만약 적군이 항구 도시들에 집중해준다면 오히려 우리가 좋다. 아나톨리아군이 상륙에 난항을 겪는다면 그만큼 이미 전쟁에 뛰어든 우리군의 발언권이 높아진다. 하지만…….”

    엘리자베트가 미소를 지었다.

    “단탈리안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지.”

    그녀가 확신에 찬 어조로 얘기를 이어나갔다.

    “단탈리안은 우리가 아나톨리아와 알력 다툼에 휘말리도록 유도할 것이다. 해안가의 도시들을 일단 방치해둔 다음, 아나톨리아군이 충분히 많이 상륙하고 나서야 움직일 터. 여기까지 질문 있나?”

    “통령 각하.”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는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저쪽에선 일부러 아나톨리아의 대군이 바다를 건너오도록 내버려둔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

    “하지만 그건 조금 소탐대실의 전형적인 사례 같은데요.”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말했다.

    “자그마치 이십만입니다. 그중에 절반만 건너와도 십만이에요. 십만은 이번 전쟁에서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할 겁니다. 아무리 적들이 우리의 분열을 노린다고 해도, 십만이나 되는 위험을 짊어질 가능성은 적지 않겠습니까요.”

    “물론, 저들이 전쟁의 승리를 목표한다면 그렇겠지.”

    엘리자베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하지만 저들의 목적은 승전이 아니다.”

    “예?”

    “제군들. 단탈리안의 목적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패배시키는 것이다.”

    통령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회의실에 울렸다.

    “가령 이번 전쟁에서 아나톨리아의 전적인 도움을 받아서 겨우 승리했다고 가정해보라. 승리는 승리이지. 그렇지만 우리 공화국의 운명은 어찌 되겠는가? 기껏해야 아나톨리아의 위성국가로 전락할 뿐이다.”

    “과연……구태여 승전할 필요도 없이, 우리를 깔아뭉개기만 하면 되는 것이군요.”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략의 목적 자체가 다르다. 단탈리안은 아나톨리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직 본인을, 공화국을 경계할 따름이다.”

    “…….”

    오연하다 못해 오만한 발언.

    그러나 엘리자베트의 목소리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말로 그리 믿게 만드는 박력이 있었다. 실제 전적도 있었다. 지난 제2차 국화전쟁에서 엘리자베트는 단탈리안의 의중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문제는 '어떤 경우에 우리가 가장 곤란한 처지에 놓이느냐'이다. 단탈리안은 반드시 그런 전략을 노리고 들어오겠지. 이건 조금만 생각해보면 해답이 도출된다…….”

    *  *  *

    “항구 도시를 포위한다?”

    “예. 전면적인 포위전이 정답입니다.”

    내가 지팡이로 지도를 쓰윽 가리켰다. 외다리가 되고 난 이후 좋은 점이 있다면 따로 지팡이 비스무리한 물건을 지참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었다. 소소한 블랙조크였다.

    “우선 가장 거대한 항구 도시를 제외하고 나머지 해안가를 전부 점령합니다. 어차피 십만 단위의 대군이 상륙할 거점은 한 곳밖에 없습니다.”

    “수상도시 베네치아인가.”

    마르바스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군의 전략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해안가를 정리해버리고, 재빠르게 베네치아를 포위합니다.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여 아나톨리아군이 베네치아에서 꼼짝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마르바스가 미간을 좁혔다. 아직 내 의도가 잡히지 않은 듯했다.

    “아나톨리아군은 섣불리 우리의 포위망을 뚫고 싶지 않겠지요. 저들도 야전에서 마왕군과 맞붙는 건 거의 자살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승률을 높이기 위해, 아나톨리아군은 공화국에 요청할 것입니다. 포위망의 후방을 공격하라고.”

    그렇다.

    아나톨리아가 전방을 맡고 공화국이 후방을 맡는다. 앞뒤로 동시에 후려치면 전투에서 십중팔구 승리할 것이라고, 아나톨리아군은 판단할 것이다.

    “즉, 공화국은 원하건 원하지 않건 발목이 붙잡힙니다.”

    “……그렇군. 공화국군이 어떻게 행동할지 그 노선을 전부 예상할 수 있게 되는가.”

    마르바스가 천천히 턱을 주억거렸다.

    “게다가 공화국은 아나톨리아에게 작전권을 모조리 빼앗깁니다. 철저히 아나톨리아가 요구하는 사항에 맞추어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전국을 주도하고 싶은 엘리자베트 통령 입장에서는 고역이나 다름없겠지요.”

    따라서, 하고 내가 말했다.

    “엘리자베트 통령은 베네치아를 구원하는 데 전력을 쏟아붓지 않을 것입니다. 전군을 이끌고 베네치아로 가버리면 아나톨리아게 지휘권이 먹혀버린다. 그렇다고 아예 응원군을 보내지 않으려니 아나톨리아의 눈치가 보인다……답은 하나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자베트가 선택할 수 있는 수는 한정되어 있으리라.

    내가 마왕들의 눈동자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어두운 막사에 나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양면전쟁입니다.”

    *  *  *

    “우리의 전병력을 둘로 나눈다.”

    엘리자베트가 제장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우리가 보유한 사만오천 명의 군세에서 삼만을 차출. 베네치아로 향해서 원군을 보낸다. 단, 절대로 아나톨리아의 설득에 넘어가서 포위망을 공격하지 마라. 어디까지나 도와주는 시늉만 내는 것이다.”

    엘리자베트는 각탁에 펼쳐진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가 빈틈없이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나머지 일만오천은 국토를 방위한다는 명목으로 남겨둔다. 그리고 기다린다.”

    “기다리다니요. 무엇을 기다리는 것입니까, 통령 각하?”

    “뻔하지 않은가. 단탈리안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엘리자베트가 단언했다.

    “단탈리안은 군대를 둘로 나누고, 대부분의 병력을 베네치아 포위전에 사용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본인은 따로 별동대를 추려서 이곳으로. 우리 공화국의 수도를 향해서 진군하겠지.”

    엘리자베트가 자신의 가슴을 툭툭 건드렸다. 심장이 위치한 부분이었다.

    “단탈리안 입장에선 본인만 잡으면 성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최고의 정예를 추려서 공격해올 게 분명하다. 우리도 정예병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비텐마이어 막료총감.”

    “예, 각하.”

    머리가 회색으로 샌 청년이 자리에서 기립했다. 불면의 총감이라 불리우는 막시밀리안 비텐마이어였다.

    “그대에게 삼만으로 이루어진 제1군을 맡긴다. 아나톨리아와 적당히 협조하면서 마왕군의 본대를 포위하라. 적의 발목을 붙잡아두는 것이 귀관의 유일무이한 목표이다.”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슐라이어마허 대장.”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빠릿하게 일어섰다. 그렇지만 어딘지 장난기가 사라지지 않은 몸동작으로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군례를 올렸다.

    “예이, 통령 각하.”

    “그대와 리히트호펜 단장은 본인과 함께 일만오천의 제2군을 담당한다.”

    “이 한 목숨을 다 바쳐서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농담이 아니다.”

    엘리자베트가 씨익 웃었다.

    “정말로 목숨을 바쳐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이야. 그것도 여러 번.”

    “……그거 참 기대되는군요.”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등골이 저릿했다. 엘리자베트 통령은 웃었지만 눈빛에 진심이 담겼다.

    상당히 높은 확률로 전사하리라. 그런 직감이 쿠르츠의 뇌리를 스쳤다. 아직 결혼도 못한 노총각 신세로 죽게 되는가……쿠르츠는 씁쓸했지만 동시에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마음도 있었다.

    “제군들. 단탈리안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두어라. 우리도 그와 목적이 똑같다. 마왕 단탈리안을 잡기만 하면 이번 전쟁, 우리의 승리이다. 서로가 최선의 준비를 갖춘 채 충돌하는 것이다.”

    엘리자베트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기나긴 악연에 종지부를 찍도록 하지.”

    *  *  *

    “엘리자베트가 원하는 대로 내버려두십시오.”

    나는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확실히 우리의 본대는 발이 묶이게 됩니다. 하지만 적군도 사정은 똑같습니다. 아나톨리아의 대군과 공화국의 본대는 속절없이 베네치아에 붙잡혀서 시간을 낭비합니다. 그 틈을 노려서, 저와 라우라 데 파르네세 공작이 이끄는 별동대가 공화국의 수도를 불태워버립니다.”

    즉,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눈다.

    전쟁을 질질 길게 끌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단숨에 공화국의 수도로 진격한다. 바르바토스를 되찾고 데이지를 잡아버린다. 속전속결이다.

    “마르바스 전하. 외람되오나 제1군을 맡아주십시오. 아나톨리아와 공화국이 연합하면 그 병력은 물경 십오만에 이를 것입니다. 이중에서 그만한 대병력을 감당할 분은 마르바스 전하밖에 없습니다.”

    “기쁘게 내 역할을 받아들이겠다.”

    내가 머리를 숙여서 감사를 표했다.

    “이번 전쟁은 단판승부가 될 것입니다. 엘리자베트 통령이 전사하느냐, 혹은 제가 전사하느냐. 둘 중 하나의 가능성밖에 없습니다.”

    “단탈리안. 그대는 어느 쪽에 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미소를 지었다.

    “저는 패배라는 단어를 제국에 허락한 기억이 없습니다.”

    5월의 막바지에 이른 무렵.

    나는 라우라와 함께 일만오천의 헬베티카 용병을 이끌고 진로를 틀었다. 이 군세는 제2군단이라고 불리었으나 사실 전쟁의 향방이 여기 달려 있다는 사실을, 마왕군 전원이 알고 있었다.

    목적지는 무니헨.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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