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61화 (461/510)
  • 00461 악(惡)의 극본  =========================================================================

    *  *  *

    “잘 주무셨습니까. 카이사르 바르바토스.”

    작은 여자아이가 서서히 눈을 떴다. 약기운 때문일까. 황금색 눈동자가 초점이 없었다. 하긴 지금도 마약 효과가 있는 향을 피우고 있었다. 가장 강력한 물건이었다. 정신이 아득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실례합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인 다음 물수건으로 여자아이의 맨몸을 닦았다. 적당히 뜨겁게 끓여온 양동이 물에 수건을 몇 차례 담그면서 세심하게 이곳저곳을 문질렀다. 바르바토스에 대한 관리를 전적으로 내가 맡았으므로 이런 잡일도 나의 업무였다.

    “너……으, 아…….”

    “입을 열면 머리가 고통스럽게 울릴 것입니다. 지빠귀나무 수액에 자주빛 마탑 공방의 마취제를 섞었습니다. 약에 익숙하지 않은 분이라면 조금 효과가 강력합니다.”

    바르바토스가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아마 지금쯤 그녀는 온몸에 돌기가 솟은 것처럼 민감하겠지. 잔바람만 불어도 미친 듯한 통각에 시달릴 것이었다. 그 증거로, 내가 물수건을 움직일 때마다 바르바토스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마왕의 몸이란 신기하군요. 잡티 하나 없습니다. 도저히 전쟁터에서 수백수천 년을 구른 사람의 신체라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부럽습니다.”

    하고 내가 바르바토스의 쇄골을 스윽 닦았다. 약간 강세를 주어서.

    “흐윽……!”

    바르바토스의 허리가 튕겨올랐다. 일시적으로 전류가 흐른 것처럼 그녀의 몸이 저릿저릿하게 떨었다. 내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죄송합니다. 무심코 손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개 같은, 년……누구 딸내미 아니랄까봐, 싸가지가 아주 가관이야…….”

    바르바토스가 이빨을 으드득거리면서 이쪽을 노려보았다. 얼굴이 고통으로 비틀려 있는데도 눈동자에 담긴 적의만큼은 뚜렷하게 빛났다.

    뭐라고 해야 할까. 꼭 고슴도치가 필사적으로 가시를 세우는 것 같아서 귀여웠다. 과연, 이런 면모 때문에 아버님은 이 여자한테 마음을 한뺨 정도라도 허락한 것일까. 괴롭히는 보람이 느껴졌다.

    “바르바토스께서 건강하신 것 같아서 안심입니다. 카이사르께선 제국의 섭정이십니다. 무척이나 소중한 몸을 가지고 계십니다.”

    내가 손가락 끝으로 슬그머니 목을 건드렸다.

    그리고 천천히 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흣, 으흑……!”

    “행여라도 상처를 입으시면 안 되지요.”

    가슴을 지나고.

    “만일 카이사르가 다친 모습을 아버님께서 나중에 보시면 또 얼마나 슬퍼하겠습니까.”

    “아읏……아, 으으, 흐으읏!”

    “그러고보니 카이사르는 아버님의 본처를 자칭했지요. 깨끗하게 몸을 단정해서 얌전히 남편을 기다리는 것을 본처의 의무로 보는 사람들도 많더군요. 카이사르께선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배를 지나쳤다.

    “……!”

    바르바토스의 몸이 파르르 경련했다. 짧고 높은 숨결을 토해내더니, 바르바토스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허공에 쇠사슬로 매달린 채 축 늘어졌다.

    그럭저럭 보기 괜찮았다. 자기 분수를 모르는 짐승에겐 이 정도 자세가 딱 적당했다. 나는 한결 부드러워진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우스운 일입니다. 카이사르는 아버님께 민폐만 끼쳤습니다. 그러고도 본처를 운운하다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조금 건방지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위치에 올라서면 다들 카이사르처럼 염치가 없어지는 것일까요. 권력이란 꽤 역겹군요.”

    “……어져, ……아.”

    바르바토스가 중얼거렸다. 워낙에 목소리가 미약해서 들리지 않았다.

    내가 바르바토스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죄송합니다. 듣지 못했습니다. 부디 다시 말씀해주십시오.”

    그때였다.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치켜들더니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침이 정확하게 나의 눈 밑에 튀었다. 묽은 액체가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바르바토스가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지옥에 떨어져, 엿이나 처먹을 년아.”

    “…….”

    내가 무심하게 손으로 침을 닦았다.

    문득 절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버님은 바르바토스를 제법 아꼈다. 공개 처형장에서 바르바토스를 참수하려고 했을 때 눈물을 흘렸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버님은 본래 매우 드물게 눈물을 흘렸는데, 언제나 아버님을 곁에서 모신 나조차도 여태껏 세 번밖에 목격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제가 카이사르를 취하면 아버님께서 어찌 반응하실까요?”

    바르바토스가 미간을 좁혔다. 아직 지나치게 자극적인 통각에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그녀가 반문했다.

    “……뭐?”

    “분노하실까요. 얼마나 분노하실까요. 제가 카이사르를 엉망진창으로, 넝마짝과 다름없이 손상시키면. 카이사르의 자존심을 짓밟고 내팽개치고 모욕하면, 과연 아버님께서는 어떤 감정을 느끼실까요.”

    내가 희미하게 입가를 비틀었다.

    아버님은 더욱 더 가열차게 나를 증오하게 되지 않을까. 아버님이 바르바토스를 아끼는 까닭은 다름 아니라 바르바토스의 고결함에 있었다. 내가 온갖 약물과 고문을 동원하여 그 고결함을 약간이라도 손상시킨다면, 거기에 진흙을 묻혀버린다면, 아마 온갖 슬픔과 적의를 담아서 날 증오하지 않을까?

    좋은 발상이었다.

    아버님이 나를 증오하면 증오할수록, 아버님은 피해자로 전락하고 나는 가해자가 되었다. 요컨대 아버님이 올바른 위치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바르바토스가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와아. 이거 이제 보니까 완전 또라이 미친년이었네. 단탈리안 새끼는 무슨 정신머리로 네 같은 정신병자를 양녀로 삼은 거래. 부녀가 아주 쌍으로 염병을 떨어대는구만. 너희 설마 떡도 쳤냐?”

    “카이사르께서는 천박하시군요.”

    “단탈리안한테 엿 먹이려고 날 범하시겠다? 미친 년. 생각하는 꼬라지가 지 아빠 빼닮았네. 어디 마음대로 해봐라, 되바라질 것아. 내 참 어이가 없어서.”

    다시 한번 바르바토스가 침을 뱉었다. 이번에도 맞아줄 의리는 없었으므로, 나는 가볍게 고개를 비틀어서 침을 피했다. 바르바토스가 웃었다.

    “네 쓰래기 애비한테 먼저 강간당하고 와보시든가. 어디서 떡도 못 쳐본 처녀 새끼가 나를 넘보고 있어.”

    처녀라.

    나 역시 작게 웃었다.

    “그렇군요.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카이사르.”

    이틀 내내 밤낮으로.

    나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그녀를 고문했다.

    방안에는 비명과 신음이 끊이지 않았다. 바르바토스는 한 시간에도 정신을 수십 번 잃었으며 맥없이 혼절했다. 나는 그녀가 정신을 잃으면 물을 뒤집어 엎거나 허벅지를 불에 달군 꼬챙이로 지졌다. 그러면 다시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면서 바르바토스가 일어났다.

    바르바토스 본인이 자처한 일이었다.

    당신이 쓸데없이 파이몬을 암살하려 들었기에 사태가 여기까지 흘러왔다. 원흉은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였지만 당신의 잘못도 만만치 않았다. 나는 내가 배운 모든 약제조술과 고문기술을 동원하여 바르바토스를 문자 그대로 짓이겼다.

    “후우.”

    내가 한숨을 쉬었다. 땡그랑, 하고 쇠꼬챙이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방바닥에는 검붉은 액체가 자그마한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피로 이루어진 오물이었다. 쇠꼬챙이가 반쯤 핏물에 잠겼다. 내가 손등으로 이마를 가볍게 닦았다.

    “……, …….”

    눈앞에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꿈틀거리는 육체 덩어리가 하나.

    일찍이 아름다웠던 백발이 엉망진창으로 더럽혀졌다. 새하얀 살결은 흉측하게 난도질을 당했다. 마왕의 재생력이 어디로 사라지진 않아서 실시간으로 상처가 낫고 있었지만 속도가 매우 느렸다. 온몸에 마력을 봉쇄하는 아티팩트가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카이사르. 마지막으로 경고합니다. 저는 똑같은 걸로 두 번 경고하는 사람이 아니니 부디 유념해주시길 바랍니다.”

    내가 바르바토스의 머리카락을 쥐어잡아 끌어당겼다. 바르바토스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이쪽에서 잡아끄는 방향 그대로 고개가 들렸다.

    “제 아버님을 함부로 모욕하지 마십시오. 당신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

    이미 바르바토스에게는 의식이라 할 만한 게 남아 있지 않았다. 40시간이 넘도록 연달아서 나의 고문을 받았으니 당연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녀의 탁한 눈동자에는 어떤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발레포르 같은 마왕과는 다르다는 것일까.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휙 놓았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나갔다.

    “아, 데이지…….”

    방문 바로 바깥에서 루크가 쭈그려 앉아 있었다.

    나는 이틀 동안 방을 고문실로 사용했다. 그 바람에 잘 곳을 잃어버린 루크는 복도에서 모포 한 겹만 두르고서 버텨야 했다. 루크가 초췌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루크의 표정이 굳었다.

    “너, 그게……대체 무슨.”

    아무래도 내가 피투성이가 된 모습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처참한가 싶어서 내가 옷자락을 집어서 코 끝으로 냄새를 맡아보았다. 기분 나쁜 냄새라곤 전혀 없었다. 마왕의 피와 내장은 다른 생명체와 다르게 악취가 감돌지 않았다. 이건 상당히 좋은 점이었다.

    “왜? 뭐가 이상해?”

    “…….”

    “정보부 사람들한테 방청소를 부탁하고 올게. 미안하지만 아직 방에 들어가지 마. 아니, 들어가도 괜찮은데 오빠한테는 조금 버거운 광경일 수도 있어.”

    나는 루크를 내버려두고 복도를 걸어갔다.

    외길로 난 복도를 걷자 덩치가 좋은 사람들 다섯 명이 나타났다. 전원이 검주(劍主)의 경지에 오른 실력자들로서, 나를 감시하기 위해 엘리자베트 통령이 보낸 감시원들이었다. 그들이 나를 차가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아시겠지만 방이 조금 더러워졌습니다.”

    내가 치마의 양끄트머리를 잡아서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방에는 각종 감시도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내가 바르바토스를 고문하는 광경도 틀림없이 실시간으로 새어나갔겠지. 이 감시자들 또한 목격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청소용구라도 있다면 제가 직접 처리하겠습니다만, 아무리 찾아봐도 방에 없더군요. 다소 번거러울지라도 방을 치워주시겠습니까?”

    “미친 년 같으니.”

    검주 중 한 사람이 싸늘하게 뇌까렸다.

    “내 평생 살다가 마왕을 동정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군. 저주받을 부르노의 악몽이 양녀를 품었다길래 어떤 인간인가 싶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괴물 새끼였어.”

    “…….”

    “이쪽을 쳐다보지 마라. 불쾌해서 숨도 쉬기 싫어지니까. 통령 각하의 명령만 아니었으면 벌써 진즉에 네 년의 목을 베어버리고도 남았다.”

    검주가 복도바닥에 가래침을 내뱉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네 명 모두 나를 쓰레기 바라보듯 흘겨보며 침을 뱉었다. 나는 이렇게 눈앞에서 침을 뱉는 사람을 볼 때마다 인간이란 얼마나 과장스러운 존재인가 감탄스러웠다.

    “제 질문에 대한 답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걸레는 챙겨줄 테니 그걸로 네 년이 알아서 해.”

    “물을 가득 담은 양동이도 일곱 통 필요합니다.”

    “얼른 꺼져.”

    내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발걸음을 돌렸다. 등 뒤로 재차 가래침이 뱉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저들은 얼마나 폐가 썩었길래 몸안에 가래를 저수지처럼 저장하고 있을까. 조금 신기했다.

    이로써 공화국 정보부에선 내 결백을 더 신뢰하겠지.

    혐오스러울지언정 바르바토스를 적대하는 것은 사실이다. 데이지 폰 커스토스의 배신은 신뢰할 만하다. 그렇게 판단할 것이다. 이틀의 고문은 그걸 노린 바이기도 했다.

    그저께, 아버님이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총사령관은 라우라 데 파르네세 공작이라는 것도…….

    지금 아버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역시 나를 증오하고 있을까.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가 교활하고 교태로운 얼굴로 아버님을 위로하고 있을까. ‘괜찮다, 주군. 주군의 곁에는 내가 영원히 함께 있다’하고.

    두근.

    “…….”

    그 모습을 상상하니 심장이 조여왔다. 나는 품안을 더듬어서 담뱃대를 꺼냈다. 아주 조금 다급하게 연초에 불을 피우고, 깊이 입안에 빨아들였다. 천천히 마음이 안정되었다.

    괜찮다.

    나는 끝까지 해낼 수 있다.

    마지막까지 제대로, 아버님을 속일 수 있다.

    그러니까 괜찮다.

    부디 후회가 남지 않도록 최후까지.

    최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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