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60화 (460/510)
  • 00460 악(惡)의 극본  =========================================================================

    *  *  *

    “도대체 왼발은 왜 또 잃어버린 거예요?”

    “사정이 그렇게 됐습니다. 세상사가 제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더군요.”

    롱그위 성녀가 벌레를 보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진군하고 있었다. 중립파 마왕들이 선두에, 내가 중진에, 나머지 마왕들이 후진에 위치했다. 슬슬 각군으로 나뉘어서 진군할 때가 되었지만 아직은 함께 움직였다.

    “아, 네. 퍽이나 그러시겠어요. 어차피 만날 일 저질러놓고 계획대로 흘러간다느니 예상헀던 그대로라느니 음흉하게 미소 짓는 게 댁의 취향이면서.”

    “이번엔 진짜입니다. 하나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이란 정말 미지의 연속이로군요. 아직도 제가 즐길거리가 잔뜩 남은 것 같아서 기쁩니다.”

    “확 낙마시켜버릴까.”

    롱그위 성녀가 짜게 식은 동태 눈깔로 말했다. 자클린 롱그위는 이렇게 과격한 농담을 던지는 것을 좋아했다. 나 역시 성녀의 이런 면모를 싫어하지 않았다. 롱그위 성녀가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마침 발도 한짝 없고. 조금만 밀어버리고 머리부터 떨어트리면 죽일 수 있을 거 같은데.”

    “…….”

    농담이 맞을 거다, 아마도.

    우리는 딱히 사이가 좋아서 말머리를 나란히 가져가는 게 아니었다. 현재 외교 무대에서 합스부르크 공화국 및 아나톨리아 제국은 연일 우리를 비난했다. 사악한 흑마법의 무리라거나, 황제를 모욕한 죄라거나, 여하간 뻔한 수식어들이었다.

    자클린 롱그위는 대륙에서 가장 인기 높은 성녀였다. 귀족들에게도 지지도가 높았고, 무엇보다 일반 백성들한테 압도적인 사랑을 받았다. 롱그위 성녀가 나와 같이 움직여준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외교적 제스처를 매우 강력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흑마법 따위는 말도 안 되는 모함이다. 성녀가 그걸 보증한다. 엘리자베트의 외교전은 별로 신통치 못하게 흘러가리라.

    “저기. 만약을 위해 말씀드립니다만, 제가 죽으면 브르타뉴의 뒷배를 봐줄 사람이 제국에 없어져버립니다?”

    “농담인 게 당연하잖아요. 당신 바보예요?”

    롱그위 성녀가 도리어 성을 냈다. 나는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조용히 말발굽이 따각거렸다. 내가 머릿속으로 전략을 검토하고 있자니 롱그위 성녀가 먼저 대화를 걸어왔다.

    “궁중백. 합스부르크 공화국은 소국이잖아요.”

    “예? 아, 뭐 그렇지요.”

    “구태여 이렇게 대군까지 동원하면서 총력전을 펼칠 이유가 있나요? 공화국 통령이 뛰어난 인물이긴 해도 궁중백이 극도로 경계할 만한 이유는 없어 보이는데요.”

    “경계할 만한 이유가 없다라…….”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성녀님은 모르겠지만 엘리자베트 통령과 제 악연은 매우 질깁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브루노 평원의 연설에서 시작해서…….”

    “아니요.”

    내가 말을 끊었다.

    “성녀님은 모르고 있습니다.”

    “……뭐예요, 무례하게.”

    롱그위 성녀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럼 제가 뭘 모르고 있는지 한번 말해보세요.”

    “엘리자베트 통령과 제가 본격적으로 충돌한 지점은 프랑크입니다. 우리는 다름 아니라 귀국을 내기판에 올려놓고 승부했습니다.”

    그렇다.

    첫 번째 충돌은 백합 전쟁이었다.

    “브르타뉴가 프랑크를 집어삼키면 엘리자베트 통령은 강력한 동맹국을 옆에 두게 됩니다. 우리 제국을 삼면에서 포위하는 것이지요. 즉, 프랑크의 독립을 지켜내느냐 마느냐가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습니다.”

    “예?”

    롱그위 성녀의 얼굴에서 불쾌감이 사라지고 대신 의문이 떠올랐다.

    “무슨 소리예요? 왜 백합 전쟁이 당신과 통령의 싸움인가요. 저희 브르타뉴의 싸움이었지.”

    “여러 관점이 있는 것입니다. 귀국의 여왕 전하께서는 수시로 엘리자베트 통령과 밀담을 주고받지 않으셨습니까. 그 전쟁에는 틀림없이 통령의 의사가 개입해 있었습니다.”

    “…….”

    백합 전쟁에서 나는 패배했다.

    패전의 영향은 상당했다.

    먼저, 내가 전쟁에 온통 신경을 기울이는 동안 마왕군의 정세가 거세게 요동쳤다. 아가레스와 가미긴이 연합하여 평원파에 대대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평원파는 자칫 잘못하면 몰락할 뻔했다.

    반대로 엘리자베트는 한숨을 돌렸다. 동맹국인 브르타뉴가 든든하게 지반을 다지게 되었고, 적대국인 합스부르크 제국은 내전에 휩싸였다. 이 황금과 같이 절묘한 시기를 틈타서 엘리자베트는 공화국을 재편했다.

    제1라운드는 엘리자베트의 승리. 내 완패였다.

    “생각해보십시오. 마왕 아가레스가 내전에서 패배하여 도망치자 귀국에선 망설임 없이 그녀의 망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건……여왕 전하께서 결정하신 일이에요. 훗날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그 훗날이란 단어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습니까?”

    롱그위 성녀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겠지. 모르고 있겠지.

    “마왕 아가레스는 양날의 검입니다. 우리 제국은 아가레스를 처단한다는 명분 아래 프랑크를 침공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녀, 정반대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정반대요?”

    “여러분이 마왕 아가레스를 앞세워서 도리어 우리 제국을 침공하는 것입니다. 아가레스는 억울하게 쫓겨났으며, 그 복수를 하기 위하여 다시 군사를 일으켜 돌아온다.”

    “……!”

    자클린 롱그위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하긴 롱그위 성녀의 정치적인 감각은 그리 날카로운 편이 아니었다.

    “간단합니다. 이쪽에서 쳐들아갈 때 유용한 도구는 저쪽에서 공격해올 때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습니다. 브르타뉴의 여왕 전하께서는 아가레스를 받아들였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 훗날 제국을 침공하는 데 교두보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저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어요.”

    “극비 중의 극비였을 겁니다. 공화국 통령과 여왕 전하 둘 사이에서만 계획이 오갔겠지요.”

    내가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공화국 통령은 궁지에 몰리면서까지 반격의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여왕 전하를 설득하여 마왕 아가레스의 망명을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만일 제국이 조금이라도 빈틈을 엿보였다면, 일말의 망설임 없이 이쪽을 물어뜯었을 겁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치에 집중했다.

    평원파-중립파-산악파의 연계를 강화했다. 만에 하나라도 내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없어지도록.

    대마왕 바알의 숙청은 그 연속선상이었다. 바알은 위험분자였다. 언제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마음대로 행동할지 몰랐다. 신속하게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마왕 아가레스가 살아 있는 이상 위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결국 저는 마왕군 전체를 동원하여 아가레스를 없애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는 김에 귀국의 기세를 꺾어두면 금상첨화였지요.”

    제2라운드.

    꼭두각시 전쟁.

    서로가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두고 프랑크를 전화로 물들였다.

    그러나 엘리자베트가 계산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나의 소중한 보물이자 대륙 제일의 전략가였다. 엘리자베트가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라우라는 브르타뉴의 군세를 무너트렸다.

    엘리자베트는 마지막에 가서 분견대를 파견하는 등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전세를 뒤집기란 불가능했다. 프랑크가 독립했고 브르타뉴는 몰락했다. 엘리자베트는 가장 든든한 동맹국을 잃어버렸다.

    제2라운드는 나의 완승. 엘리자베트의 참패였다.

    “…….”

    롱그위 성녀가 침묵했다.

    그녀는 얼굴이 분노와 당혹으로 일그러졌다.

    “당신의 얘기가 맞다면 꼭 우리 브르타뉴는……마치, 당신들 두 사람의 꼭두각시 인형처럼 이용되었다는 것처럼 들리잖아요.”

    “누구나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합니다.”

    내가 차분하게 성녀를 다독거렸다.

    “너무 불쾌하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만일 공화국 통령이 바라는 대로 극본이 진행되었다면 브르타뉴 왕국은 지금쯤 전성기를 누렸겠지요. 브르타뉴에도 이득입니다. 그러니까 귀국의 여왕 전하께서도 통령한테 동의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

    하지만 실패했다. 다름 아니라 나에 의해서.

    “뭐, 저는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했습니다. 브르타뉴를 끊고, 폴리투니아를 끊고,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공화국의 우방은 사르데냐밖에 없었습니다. 명줄을 끊어내기 위해 저는 다시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제3라운드.

    국화 전쟁.

    이번에 엘리자베트는 라우라의 존재를 인지했다. 서로가 무엇을 노리는지, 서로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도 모조리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때야말로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제3라운드는 무승부.

    무승부로 끝나고 말았다.

    “저는 사르데냐를 붕괴시켰지만 그 대신 통령은 아나톨리아 제국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최후의 결전이 뒤로 미루어졌지요. 우리는 각자가 최후를 약속한 채 헤어졌습니다.”

    그 최후가 지금 다가왔다.

    엘리자베트는 무리를 해서라도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현재 마왕군은 극심한 진통을 겪고 있었다. 무투파 마왕들의 집합소나 다름없었던 평원파가 전멸했다. 게다가 평원파의 잔당들이 이곳저곳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절호의 찬스였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합스부르크 제국을 거꾸러트릴 수 없다. 여태까지 자기가 쌓아온 모든 것을 내걸어서 전쟁터에 뛰어들어야만 한다. 틀림없이 엘리자베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롱그위 성녀.구태여 대군을 동원해서 총력전을 벌일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습니까.”

    내가 미소를 지었다.

    “이게 저의 대답입니다. 확실히 공화국은 소국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엘리자베트 통령은 다릅니다. 그녀는 소국을 이끌고 여기까지 저와 승부를 나누었습니다. 월맹군이 일어났을 때부터 계산하면 벌써 7년입니다. 길고 긴 악연이군요…….”

    물론 아무도 몰랐다.

    백합 전쟁도, 꼭두각시 전쟁도, 국화 전쟁도――전부 엘리자베트와 내가 둘이서 펼친 반상 위의 대결이었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비록 성녀가 내 얘기를 들어서 진실을 알게 되었다지만 세간에 퍼지는 일은 없으리라.

    과연 역사서에서는 세 개의 전쟁을 어떻게 평가할까. 합스부르크 제국이 팽창하는 과정이었다고 서술할 것인가? 공화정과 군주정이 충돌하는 가운데 필연적으로 발생한 사태였다고 기술할 것인가.

    어느 쪽도 진실에서 한없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재밌는 것이었다.

    대륙의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곳에서 엘리자베트와 나는 대륙 전체를 장기판에 올려둔 채 싸웠다. 다시 말해,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스러운 게임이었다.

    “롱그위 성녀는 끝까지 우리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지난 번에 사르데냐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제가 무엇 때문에 브르타뉴한테 개평을 떼어주었다고 생각합니까.”

    “…….”

    브르타뉴는 프랑크의 대귀족들을 물리치고 홀라당 점령지를 꿀꺽해버렸다. 이 계략의 배후에는 내가 숨어 있었다.

    여왕과 성녀는 내게 큰 은혜를 입었다. 이번 전쟁에서 롱그위 성녀가 나를 전폭적으로 도와주는 까닭은 그때 받은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궁중백은 승리를 자신하고 있는 건가요?”

    “아니요. 자신감 따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야지요.”

    다만.

    이 게임에는 엘리자베트도 나도 고려치 못한 변수가 끼어들었다. 바로 데이지였다.

    녀석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국면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었다. 비록 내가 데이지의 속내를 짐작했다 할지라도 녀석의 행동까지 전부 예측할 수는 없었다. 과연 어떻게 될련지…….

    데이지.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어떤 심정으로 내 앞에서 증오를 연기했느냐. 엘리자베트를 어떻게 할 속셈이고, 또 바르바토스를 어떻게 처리할 속셈이냐. 나는 당장이라도 너와 대화하고 싶다.

    하지만 우리가 남은 삶에서 얘기를 나눌 시간은 분명히 얼마 없겠지.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서로의 최후를 준비해두자…….

    후회가 남지 않도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