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59 악(惡)의 극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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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각지에서 병력이 소집되었다.
나는 황제를 대동하고 제도(帝都) 바깥으로 나갔다. 문무대신이 우리의 뒤를 따랐다. 우리 모두 휘황찬란한 의복을 입었고, 나는 붉은색 망토를 휘둘렀다. 수백 명의 대소신료가 빠른 잰걸음으로 우리를 쫓아 걸어왔다.
“제국의 유일무이한 주권자이시자, 만신의 축복을 받으시고 만마의 충성을 거두어들이신, 위대한 합스부르크의 황제 폐하 납시오!”
도시 바깥의 드넓은 평원에는 연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시종이 우리를 보고 우렁차게 고했다. 마법으로 확성된 목소리는 평원 곳곳에 널리 울려 퍼졌으며, 이백 명 남짓하는 경비병이 일제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여기서 진귀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나는 말을 타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마에 올라타지도 않았다. 그저 의족과 지팡이에 의존하여 절뚝거리면서 걸었다. 황제는 내 걸음걸이 속도에 맞추었고, 그리하여 우리를 뒤따라는 수백 명의 사람도 퍽 느릿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
그것은 더없이 암묵적인 과시였다.
볼품없이 절름거리는 발걸음은 동시에 제국의 진정한 실세가 누구인지, 그 거대한 권력을 조용히 증명하였다. 사람들은 내가 황제와 함께 연단에 오르는 광경을 숙연하게 지켜보았다.
내가 높은 연단에 올라서서 평원을 둘러보았다.
신하들, 병사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각국의 사신들. 사신들은 연병장 한켠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긴장한 낯빛으로 이쪽을 훔쳐보았다. 내가 무표정하게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 부우우우우.
그러자 뿔나팔들이 울렸다. 바르르 떠는 잡초 이파리가 음산한 공기를 알려주었다.
잠시 뒤, 나팔소리가 잦아든 바로 그곳에서 북소리와 비슷한 무언가가 나지막하게 시작되었다. 울림은 평원 저편에서 조금씩 다가왔다. 나지막하게 흙먼지를 망토처럼 휘두른 채 달려오는 그것은 일단의 기병이었다.
수백 마리의 군마가 거칠게 씩씩거리며 이쪽을 향했다. 가장 선두에 서서 병사들을 이끄는 사람은 다름 아니라 마왕 마르바스였다. 마르바스는 옆구리에 투구를 끼운 채 한손으로 능숙하게 말을 이끌었다.
시종이 양피지를 들고 소리쳤다.
“판노니아의 존귀한 대왕이요, 합스부르크 황실의 영원한 수호자이자, 제국의 가장 거대한 기둥인 세바스토크라토르 마르바스! 정병 오천을 이끌고 황제 폐하의 지엄한 소집령에 응답하라!”
마치 원을 그리듯이 병사들이 연병장 외곽을 돌면서 천천히 연단 앞을 지나쳤다. 마왕 마르바스를 상징하는 깃발, 천칭을 손에 쥔 사자의 문양이 나부꼈다.
“…….”
마르바스가 이쪽을 향해 상반신을 돌렸다. 그는 오른쪽 가슴에 주먹을 턱 하니 올렸다. 군례였다. 일찍이 마왕군의 군례였으나 이제는 제국군의 군례가 된 손동작. 나는 마르바스와 멀리 눈을 마주치면서, 조용히 주먹을 가슴에 올렸다.
마르바스의 병력이 연단 앞을 지나쳐 평원에 가지런하게 열을 맞추어 섰다. 오천 병사가 뜨거워진 몸을 거친 들숨으로 식혔다. 그들이 말없이 열기를 토해내는 그때, 평원 저 너머에서 다시금 말발굽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였다.
깃발의 문양은 뿔이 세 개 달린 염소.
시종이 재차 소리쳤다.
“룩셈브르크의 고귀한 대공이요, 마인츠의 고귀한 선제후이자, 제국의 대시종장인 시트리! 정병 일만을 이끌고 황제 폐하의 지엄한 소집령에 응답하라!”
시트리가 거대한 산양에 올라타고 일만 대군을 이끌었다. 자주빛 망토가 거센 바람에 펄럭거렸다.
시트리는 파이몬의 사병을 모조리 거두어들였다. 숙청되어버린 산악파 마왕들의 병력 역시 흡수하였다. 단독으로 제일 많은 병사를 휘하에 둔 마왕을 뽑으라면 단연 시트리가 압도적이겠지.
“…….”
시트리가 연단을 스쳐가며 날 향해 군례를 올렸다.
내가 황제와 바로 나란히 서 있었기에 멀리서 보면 시트리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겠으나, 이 위치에서는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내 연인으로서의 시트리가 아니라 산악파 수장으로서의 시트리, 냉정하고 무표정한 얼굴의 시트리가 그곳에 있었다. 나 또한 차가운 얼굴로 답례를 올렸다.
일만 병력이 마르바스의 병력 옆에 줄지어 정렬했다. 열기는 점점 더해졌다.
숫사슴 뿔이 달린 일각수(一角獸)의 문양.
“모라비아의 명예로운 공작이요, 제국의 모든 바다를 통솔하는 사령관이자, 불멸하는 황실의 후원자인 가미긴! 정병 사천을 이끌고 황제 폐하의 지엄한 소집령에 응답하라!”
면류관을 뒤집어쓴 악어의 문양.
“쾰른의 고귀한 선제후요, 황실의 지혜로운 조언자인 바싸고! 정병 삼천을 이끌고 황제 폐하의 지엄한 소집령에 응답하라!”
눈에 검은색 천을 두른 아누비스의 문양.
“자간의 백작인 아몬! 정병 삼천을 이끌고 황제 폐하의 지엄한 소집령에 응답하라!”
이빨로 독사를 물어뜯는 백곰의 문양.
“바이로이트의 백작인 푸르손! 정병 이천을 이끌고 황제 폐하의 지엄한 소집령에 응답하라!”
여태까지 살아남은 열다섯 명의 마왕들.
그들은 각기 서열의 순서대로 연병장을 돌아서 제 위치에 섰다. 누군가는 전쟁을 열망할 테고 또 누군가는 전쟁터에 끼어들고 싶지 않겠지. 그러나 모든 마왕이 연단을 지나치면서 나를 향하여 주먹의 손등을 보여주었으며, 내 답례를 받아야만 했다.
총 병력 42,000대군.
열다섯 종류의 깃발이 찬란하게 펄럭거렸다.
“…….”
사신들이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제국의 군세를 쳐다보았다. 단순히 사만 대군이라 해도 경의로운 숫자였으나, 이건 마인으로 이루어진 군단이었다. 최소한 인간의 군세보다 두 배. 상황에 따라 어쩌면 세 배까지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해, 인간군으로 따지자면 거의 십만에 이르는 정병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아직 평원에 도열하지 않은 군세가 하나 있었다. 이곳의 공기를 마음껏 들이쉬고 지배해야 하는 깃발이 하나 더 남았다.
먼 저편에서 흙구름이 피어올랐다. 대지를 진동시키면서 군단이 다가왔다.
수백 명이 내는 진동도, 수천 명이 내는 진동도 아니었다. 그것을 아득하게 뛰어넘은 숫자의 말발굽이요 발걸음이었다. 먼지구름을 뚫고 내리쬔 태양빛에 수만 개의 창날이 번쩍거렸다.
푸른 수국의 깃발.
“파르네세의 명예로운 공작이요!”
그 선두에서 대군을 이끄는 사람은 금발의 여인.
아미쿠스라고 이름지어진 흑마에 올라타, 샛파란 망토를 휘날리며 여인은 다가왔다. 그녀의 뒤에서 병사들은 엄숙하게 대열을 맞추었다. 아무런 구호도 오가지 않았지만 대열에는 흐트러짐이 전혀 없었다.
“황제 폐하의 유일무이한 대리장군인 라우라 데 파르네세! 정병 삼만을 이끌고 황제 폐하의 지엄한 소집령에 응답하라!”
그것은 나의 군대였다.
마왕 단탈리안을 상징하는 깃발은 어디에도 없었고, 단지 파르네세 가문을 나타내는 깃발만이 나부꼈으나, 이곳에 모인 마왕들은 모두 주지하고 있었다. 헬베티카 용병과 다국적 용병으로 이루어진 저 대군이야말로 마왕 단탈리안의 군세임을.
평원파가 몰락해버린 이상, 헬베티카의 용병은 중립파와 더불어 최고 수준의 정예였다. 게다가 이들은 바로 얼마 전에 제2차 국화전쟁을 성공리에 수행했다. 아니, 그걸 성공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지나치게 모자르리라.
저들은 라우라 데 파르네세라는 이름의 전설을 이룩했다.
사령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언제나 약속한 보수 그 이상을 챙겨줌으로써 생겨난 충성심.
자신들이야말로 대륙의 역사를 새로 고쳐 쓰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긍심.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정점으로 한 이 군단은 여타의 병력과 일선을 달리했다. 라우라의 뒤를 곧바로 쫓고 있는 수십 명의 용병단장들이 자신만만하게 주변을 오시했다. 그중에는 줄리아나 드 블랑 남작과 자크리 등, 내 눈에 익은 인물도 있었다.
“…….”
라우라가 연단 앞에 멈추어섰다.
다른 사령관들은 연단을 스쳐 지나갔지만 라우라는 군마에서 내렸다. 그리고 홀로 연단의 계단을 터벅터벅 걸어 올라왔다.
라우라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부복한 방향은 황제와 내 틈새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라우라를 내려다보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평원의 구석진 후미까지 나지막하게 울렸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공작.”
“예.”
“제국은 다시 한 번 도전에 직면하였다. 우리의 명예를 무시하는 도전이고,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도전이며, 우리의 미래를 방해하는 도전이다. 상승(常勝)의 파르네세여. 그대, 불손한 도전자들에게 철퇴를 내릴 각오가 되어 있는가.”
라우라가 고개를 숙인 채로 오른쪽 가슴에 손을 올렸다.
아름다우면서도 더없이 확고하고 뚜렷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소인의 모든 생명과 신념을 다하여 명령을 받들겠나이다.”
“파르네세 공작에게 전쟁의 전권을 대리시키는 바이다.”
내가 황제에게 검을 건네받고 다시 라우라한테 하사했다. 라우라는 양손으로 공손히 검을 받은 다음에 고개를 들었다.
라우라의 두 눈이 잔인한 복수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녀가 차갑게 고했다.
“이제부터 제국을 가로막는 역도들에게 허락된 것은 오직 하나. 공평한 죽음뿐입니다.”
라우라는 이번 사태의 진정한 내막을 알지 못했다.
그녀에게 데이지란 은혜를 저버리고 반역을 일으킨 배신자였다. 그로 인해 내가 왼발을 스스로 잘라냈다는 얘기를 듣고 라우라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엘리자베트가 데이지와 결탁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얘기에는 적의를 불태웠다.
“단지 죽음이 아니라 잔혹무비한 죽음을. 처절한 고통을. 인세의 지옥이 무엇인지 역도들에게 깨닫게 하겠나이다.”
지금 라우라를 이끄는 것은 순수한 증오였다.
라우라와 내가 지닌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바로 증오심에 마음의 언저리가 썩어 문드러질 때 더더욱 냉철해진다는 것이었다.
라우라는 단신으로 헬베티카 연방에 가서 그곳의 부족장과 용병단장을 설득시켰고, 사르데냐 북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용병단들을 단숨에 규합했다. 병사들을 고용하는 데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어갔지만 괜찮았다. 이바르와 내가 보유한 자금은 삼만 대군을 유지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
내가 사신들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중 한 사람, 롱그위 성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롱그위 성녀는 연단에 올라와서 황제의 옆에 섰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만약 황제가 흑마법으로 인해 소생한 시체 인형이었다면 성녀인 롱그위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을 리 없었다. 적어도 세상 사람들은 그리 생각했다. 롱그위 성녀가 황제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 자체가 엘리자베트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실제로, 황제는 이미 이바르의 인형으로 교체된 지 오래였다.
이제 와서 흑마법을 검사해본다 할지라도 아무런 증거도 얻지 못하리라.
“…….”
라우라가 일어서서 뒤로 돌아섰다.
칠만 대군을 내려다보며 라우라가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그것과 동시에, 하늘을 무너트릴 기세로 병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이름을 연호하는 목소리가 요동쳤다. 전쟁의 여신. 브르타뉴와 사르데냐를 거꾸러트린 대장군. 병사들은 창 끝으로 공중을 힘차게 찔러대며 피스톤처럼 끊힘없이 팔뚝을 움직였다.
대륙력 1513년 5월 하순.
합스부르크 제국의 칠만사천 대군.
황제의 대리장군 라우라 데 파르네세 및 열여섯 명의 마왕.
국내에 창궐하는 반란군 진압을 명목으로 내세워서―――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