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58화 (458/510)
  • 00458 악(惡)의 극본  =========================================================================

    볼프람 하델베르크 외무상서가 임무를 완수했다.

    외무상서는 내가 빤히 지켜보는 가운데 황제한테 아티팩트를 발동했다. 아마도 흑마법을 감지해내는 기능이 있겠지. 볼프람 하델베르크는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으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

    외무상서가 이쪽을 무시무시하게 노려보았다. 눈에서 증오가 불타올랐다.

    볼프람 하델베르크의 입장에서 나는 단순히 제국을 몰락시킨 장본인이 아니었다.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를 살해한데다 그의 죽음을 조롱하고, 시체 인형으로 만들어서 농락한 자. 희대의 악마였다.

    나는 이 남자의 조국을 무너트리고 마지막 자존심까지 짓밟았다. 충분히 증오를 받을 법했다. 내가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었다.

    “황제 폐하께 문안을 올려야지요, 상서.”

    “저까짓 인간의 문안이 폐하께 무슨 소용이라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볼프람 하델베르크가 간신히 분노를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 전하. 당신은 지금 전쟁을 바라고 있습니다. 설령 통령 각하께서 전쟁으로 화답하시지 않을지라도, 이런 만행을 보고도 소인이 가만히 넘어가리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입니다.”

    “본인의 호의를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호의? 지금 호의라고 말했습니까……?”

    볼프람 하델베르크의 목이 붉게 달아올랐다.

    “소인의 가문은 합스부르크 황가를 섬겼습니다. 오래된 주인이 이리 몰락한 것을 눈앞에서 지켜보게 되었건만 당신은 그걸 호의라고 조롱하는 것입니까.”

    “저는 상서에게 진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영원히 비밀을 숨기고 내버려둘 수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걸 호의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세상에는 영원히 숨겨두는 편이 훨씬 더 좋은 진실도 있습니다!”

    내가 지그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상서.”

    “…….”

    볼프람 하델베르크가 붉으락푸르락 구겨진 얼굴로 나를 쏘아보았다. 내게 더 이상 어떤 비난을 퍼부어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겠지. 그리고 엘리자베트와 내가 벌이는 체스 게임에서 자신이 한낱 장기짝에 불과하다는 사실 또한 상기했으리라.

    “위대한 마왕 단탈리안은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전하. 제가 이곳에 발걸음을 들이기 전까지는 막연하고 불안한 감정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다르다는 얘기로 들리는군요.”

    “예.”

    볼프람 하델베르크가 차갑게 뇌까렸다.

    “전하께 작별인사를 올려야 하는 지금 저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우리 공화국은 아우스테를리츠의 참욕을 기억할 것입니다.”

    볼프람 하델베르크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황제를 향하여 허리를 숙였다. 젊음에서 노년으로 건너가는 중간다리에 걸린 이 외무상서는, 마지막으로 나를 씹어 죽일 기세로 노려본 다음 발걸음을 휙 돌렸다.

    그날 밤에 곧바로 볼프람 하델베르크는 공화국에 돌아갔다.

    이때부터, 물밑으로 외교전이 이루어졌다.

    이번 사건에 연류된 모든 당사자가 전쟁을 원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 그러니까 엘리자베트 통령은 이걸 최후의 기회로 여기고 있겠지. 공화국 대표회의가 무산되었으며 폴리투니아-사르데냐-공화국으로 이어지던 동맹도 붕괴했다. 만일 역전을 노린다면 바르바토스를 손에 넣은 지금이 기회였다…….

    아나톨리아 제국도 마찬가지. 그들은 대륙의 판세가 현재 지나치게 우리한테로 넘어온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아나톨리아 제국이 제2차 국화전쟁에 개입한 까닭은, 욱일승천하는 우리의 기세를 조금이라도 꺾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나머지 국가들은 어떠한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기 싫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겠지.

    프랑크, 사르데냐, 폴리투니아……국경이 인접한 주변국들은 하나같이 평화를 바라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제국과 아나톨리아 제국,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두 나라가 전쟁을 펼치는 것이었다. 확실한 이득이 보장되지 않는 이상, 주변국들이 적극적으로 끼어들 가능성은 낮았다.

    미리 교통정리에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 귀국의 섭정이 정말로 납치되었다는 말인가?

    폴리투니아의 국왕, 스테판 바토리가 굵은 눈썹을 치켜들었다. 우리는 수정구를 통해서 서로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부끄럽게도 그리 되었습니다. 본래 제국 내부에서 깔끔하게 일을 끝내고자 했습니다만, 누군가가 개입하여 사태가 복잡하게 돌아가는군요.”

    ─ 큰일도 보통 큰일이지 않은가. 일국의 재상이 납치되었다면 이건 이미 국제적인 문제일세. 커스토스 공작. 내 바토리의 이름을 걸고 아낌 없이 협력할 것을 약속하겠네.

    바토리 대왕이 진중하게 내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한 마디의 말이 갖는 무게가 평범한 사람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것이 대왕의 위엄이라고 해야 할지, 수십 년 동안 집권하면서 쌓은 내공이라고 해야 할지.

    “감사합니다. ”

    내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바토리 대왕도 당연히 마계에 간자들을 심어두었을 터. 공개처형식에서 어떤 사단이 벌어졌는지 진즉에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이미 납치범이 어디로 도주했는지는 대략적으로 알아냈습니다.”

    ─ 호오. 벌써 말인가?

    바토리 대왕이 흥미 깊다는 듯 검은색 눈동자를 빛냈다.

    ─ 그래, 이번에는 어느 나라가 그대에게 무모한 도전을 신청했는고?

    “합스부르크 공화국입니다.”

    ─ …….

    바토리 대왕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 아마 지금쯤 바토리 대왕의 머릿속에서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시나리오가 순식간에 그려졌으리라. 합스부르크 공화국 뒤에는 아나톨리아 제국이 있다. 그건 다시 말해 최악의 사태를 의미했다.

    ─ ……참으로 일이 공교롭게 흘러가는군. 공화국이 범행을 저지른 것이 확실한가.

    “안타깝지만 확실합니다. 오늘 공화국의 외무상서가 황궁에서 폐하를 알현하고 돌아갔습니다. 무역 관세에 대해서 논의하기 위해 왔다는 사람이 고작 이틀만 머무르고, 정작 관세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귀환했지요.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 협박인가.

    “그렇습니다. 알아서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섭정 바르바토스를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리겠다는 얘기이겠지요.”

    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대왕께서도 권력을 위해서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희생시킨 적이 있으리라 감히 짐작합니다. 대왕. 바르바토스는 소인의 연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녀를 숙청하였으며, 제 두 손으로 직접 그녀의 목을 자르고자 했습니다. 소인이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차릴 수 있는 예의였지요.”

    ─ …….

    “엘리자베트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습니다. 아나톨리아 제국이 배후에서 사주를 했든 말든 저에겐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차분히 홍차를 홀짝이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녀가 왜 이리 강경한 수단을 취하는 것인지, 대체 무슨 장난질을 준비해두었기에 전쟁도 불사할 각오를 끝마친 것인지, 저로서는 아직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고합니다. 엘리자베트는 마땅히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 그대는 이미 전쟁과 평화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지 결정한 모양이로군.

    “예. 저는 그저 대왕께 미리 양해를 구해두고 싶었나이다.”

    ─ 단탈리안. 내 직위에 구애받지 않고 솔직하게 질문함세. 과인은 소국의 주인이나 자네는 대국의 주인이야. 대국이 거사를 행하는 데 있어서 소국에 양해를 구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대왕이라면 저를 이해해주시리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 이해라니 무슨 소리인가?

    “대왕께서는 자그마치 수십 년 동안이나 동생을 세간의 이목으로부터 지키셨습니다.”

    스테판 바토리한테는 문둥병에 걸린 여동생이 있었다. 젊은 시절, 여동생을 사랑한 바토리 대왕은 정치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동생을 비밀리에 은거시켰다. 지금 그녀는 내가 보낸 흑마법사에 의해서 완벽하게 치료가 되었다.

    “대왕께선 틀림없이 정치적인 괴물입니다. 일국의 지엄한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특히 폴리투니아처럼 왕권이 약한 곳에서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괴물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왕께서는 끝끝내 왕녀를 지키셨습니다.”

    ─ …….

    “대왕. 저는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바르바토스의 목숨을 거두는 것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결코. 절대로.”

    내가 시선을 웃음기로 위장한 채 대왕의 눈동자를 똑바로 직시했다. 대왕이라면 손쉽게 내 웃음 너머에 가려진 진짜 표정을 읽어내겠지.

    “우리에게는 각자 나름대로 풀어야 하는 문제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문제에 타인이 개입하는 것만큼 치욕스러운 일은 없지요.”

    ─ …….

    바토리 대왕이 제법 길게 침묵했다. 대왕은 다소 무심한 눈길로 지그시 이쪽과 마주보았다. 잠시 뒤에 그가 중얼거렸다.

    ─ 과인에게는 정병 5만이 준비되어 있다. 대국들의 싸움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할지라도, 시기를 절묘하게 노린다면 축 하나를 무너트릴 만한 기세는 능히 선보일 수 있겠지……. 여신께서 귀국을 보살피기를 기원하네.

    거기서 통신이 끊겼다.

    스테판 바토리 대왕이 암시하는 바는 명확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병 5만을 동원하여 우리 제국을 도와주겠다는 뜻이었다. 내가 대왕의 여동생을 치료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써. 나는 통신이 끊긴 이후에도 한동안 수정구를 향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다른 주변국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 귀국에 전면으로 협력할 수 없음을 미안하게 생각하오. 하지만 아국에 미리 통보를 해주신 이 은혜는 결코 잊어버리지 않겠소.

    ─ 지난 전쟁에서 공작이 우리를 잊지 않고 챙겨준 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바타비아는 영원토록 제국의 우방으로 남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 공화국은 이미 수 차례나 외교적인 결례를 범하였지. 공작의 말마따마 잘못에는 응당 대가가 뒤따라야 하는 법이라오.

    대놓고 협력하진 못할지언정 제국의 편을 들어주겠다.

    그것이 열국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여태까지 내가 항상 명분을 챙긴 이유가 여기 있었다. 명분에 앞서야만 여차할 경우 주변국에 도움을 쉽게 얻었다.

    더 나아가, 나는 프랑크 제국을 짓밟았을 때도, 브르타뉴 왕국을 몰락시켰을 때도, 사르데냐 왕국을 초토화시켰을 때도 결코 과욕을 부리지 않았다. 마치 개평을 나눠주듯이 언제나 주변국들에 무언가를 선물하였다.

    만일 내가 프랑크를 합병시키거나 사르데냐를 지배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주변국들이 우리를 편들어줄 일은 절대로 없었으리라. 국제무대에서 중도를 지켰으므로 오늘날의 호의가 가능했다…….

    당연하지만 내가 선하기 때문에 중도를 지킨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반드시 엘리자베트와 정면대결을 펼칠 날이 오리라 예상했기에, 아주 오래 전부터 미리 체스판을 만들어둔 것이었다.

    말하자면 최후의 결전.

    7년 전의 월맹군 전쟁, 브루노 평원에서 엘리자베트와 처음으로 마주친 그날부터 예정된, 예정되어버린, 우리 두 사람의 결착.

    본래 이 대륙의 주인이 되어야 했을 여제와 지금 대륙을 배후에서 지배하게 된 나 사이에 필연적으로 벌어지는 충돌. 엘리자베트가 자신의 야망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내가 나의 신념을 내버리지 않는 이상, 결코 피할 수 없는 결투였다.

    그리고 데이지.

    이쪽의 가면을 간파하고 나를 알아봐준―――나의 단 한 명뿐인 딸.

    “와라.”

    빛이 꺼진 수정구를 눈앞에 두고 내가 중얼거렸다.

    “우리들만의 결착을 지어야 할 때다.”

    대륙력 1513년 5월 초순.

    합스부르크 공화국과 아나톨리아 제국은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황제가 꼭두각시 시체 인형임을 공동으로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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