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57화 (457/510)
  • 00457 DANTALIAN  =========================================================================

    “…….”

    내가 말없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바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무시하고 집무실을 걸어나갔다. 발걸음이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심장이 거세게 요동칠수록, 몸이 발걸음을 재촉할수록, 내 얼굴은 차갑게 식었다.

    “전하? 전하, 갑자기 어디를……국무상서! 전하께서…….”

    등 뒤로 이바르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황궁의 화려한 복도에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따각거렸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계속해서 한 걸음.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마냥 기계적으로 발을 움직였다.

    시녀들이 도중에 나와 마주쳤다. 그녀들은 헐레벌떡 자세를 바로잡은 다음 허리를 숙였다.

    “위대한 존재를 뵈옵니다.”

    “위대한 존재를 뵈옵니다.”

    그중에는 제법 행동거지가 그럴듯한 시녀도 있어서 우아하게 치맛자락을 들어올렸다. 자신이 꽤 훌륭하게 인사했다는 사실을 시녀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거기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뭐가 저렇게 자랑스러운 것일까?’

    시녀들이 연달아서 내게 인사하는 광경을 바라보며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단지 몸동작뿐만이 아니었다. 위대한 존재를 뵈옵니다, 라고 말할 때 시녀는 미세하고 미묘한 발음 하나하나에 자신의 자부심을 실었다. 이런 인사를 올리는 것 자체에 대단한 의미가 숨겨진 것처럼. 그러나 대체 무엇이 대단하기에?

    정답은 명확했다. 시녀라는 역할. 거기에 그들은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제국의 위대하고 화려한 황궁. 호화롭기 그지없는 만마전을 위하여 봉사한다.

    깨끗하게 청소한다.

    아름답게 유지한다.

    아무에게나 주어진 영광이 아니다. 오로지 시녀에게만, 전문적인 실력과 드높은 교양을 겸비한 사람한테만 허락된다. 그것이 시녀들의 자랑이었다.

    그렇지만 시녀들의 자부심이 나의 두 눈에는 얼마나 가당찮게 비추는가.

    제국은 위대하지도 않으며 영광스럽지도 않다.

    이미 예전에 죽어버린 반시체 꼭두각시가 황제에 올라 있다는 것부터 대단한 넌센스다.

    인간의 제국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주제에 실상은 마왕들이 권력을 쥐고 있다. 황제국인 주제에 사실은 온 대륙의 공화주의를 지원하고 있다……확실한 정체성이라곤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제국이나 제국이 아니다. 합스부르크이지만 합스부르크의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시녀들은 도대체 무엇을 자랑스러워 하는 것일까.

    “위대한 존재를 뵈옵니다.”

    나 역시 처지가 똑같지 않은가.

    시녀들이 제국의 황궁에 봉사한다면, 나는, 단탈리안은 단지 이 세계를 위해 봉사했다. 그녀들이 시녀의 배역을 맡았듯이 꼭 그처럼 단탈리안이라는 배역이 이곳에 있었다. 나는 거기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건 즐거운 자부심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확고한 자부심이었다. 내가 아니라면 누가 이 역할을 해냈겠는가? 감히 내가 아니라면 누가 '여기'까지 도착할 수 있었을까?

    이곳은 모든 산맥 중에서 가장 드높은 산맥이고, 모든 밑바닥 중에서 가장 드넓은 밑바닥이다. 나는 단지 위로 올라가는 사람이 아니다. 단지 아래로 추락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나는 몰락한다! 그러나 지구를 반대로 뒤집어서 본다면 그것은 상승이다.

    그렇다. 나는 몰락함으로써 위를 오른다.

    모든 몰락하는 사람 중에 누가 이런 길을 선택했던가. 누가 세계를 위해 자신을 거꾸로 뒤집을 수 있었는가. 도대체 인간이란 자신을 위해서 세계를 뒤집어버리는 것밖에 모르지 않았던가.

    이 헌신. 이 희생. 배역에 대한 몰입과 무대에 대한 존중. 이것이 나였다. 이것이 단탈리안이었다.

    ‘그렇지만 나의 자부심은 또 얼마나 가당찮은가?’

    내 눈이 가늘어졌다.

    ‘제국의 황궁은 전혀 대단하지 않다. 단지 시녀들이 황궁을 대단한 것처럼 꾸밀 뿐이다. 똑같지 않은가! 세계 따위는 전혀 대단하지 않다. 그저 내가 세계를 꾸미고 있을 뿐이다.’

    내가 입술을 깨물었다. 피냄새가 혓바닥에 번졌다.

    ‘하지만 아무도 이 세계를 존중하지 않는다!’

    그것이 차이점이었다.

    이 황궁을 청소해주는 시녀는 많았다. 수백 명에 이르렀다. 제국이 유지되는 이상 황궁은 언제까지라도 수백 명의 정성과 수백 개의 손길로 가꾸어지겠지. 그러나 이 세계는? 누가 세계라는 이름의 궁전을 보살피고 있는가?

    잭 올란드의 죽음이 부당하기 그지없었다는 사실을 누가 기억해주는가.

    월맹군 전쟁으로 스러져간 이십만의 생명을 누가 정당히 평가해주는가.

    파이몬이 얼마나 고귀한 여인이었는지 누가 알아주는가.

    너무나 많은 사람이.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소리 없이 잊혀 간다.

    내가 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전부 내가 역사를 비틀고 마음대로 연출해낸 내 책임이라는 사실을, 오로지 나만이 알고 있으므로.

    내가 해내지 않으면―――.

    “응? 단탈리안?”

    나는 접견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선제후 마왕들이 모여 있을 터인 접견실에는 그러나 가미긴만이 홀로 소파에 누워 있었다. 가미긴은 반쯤 옷을 헐벗고 포도주를 진탕 마셨다.

    “뭐야, 허겁지겁 들어오고. 설마 지금 회의하러 온 건 아니겠지? 네가 지각해서 이미 한참 전에 저녁 때 다시 열기로 했는걸. 네가 시간약속을 어긴 건 이번이 처음 아니야~?”

    “…….”

    “그래도 마침 잘 됐어. 너 요즘 나한테 소홀해도 너무 소홀하잖아. 파이몬이 죽은 게 아무리 충격적이었다 해도 그렇지, 남자가 그런 거 오래 질질 끄는 것도 보기 흉하거든. 자, 이 누나가 다 들어줄 테니까 술이나 같이 마시자.”

    가미긴이 배시시 웃으면서 자기 소파 옆자리를 두들겼다. 이리 와서 함께 즐기자는 표시였다. 나는 가미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상태창.’

    역시나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등을 돌려서 접견실을 나갔다. 등 너머로 가미긴이 소리쳤다.

    “단탈리안? 야, 단탈리안. 단탈리안! 뭐야, 너 진짜 나한테 이러기야!? 내가 확 돌아버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면서도 이렇게 막 대해!? 당장 와서 사과하지 않으면 파이몬 안치소에다 확 불내버릴 거야! 단탈리안!”

    쨍그랑, 하고 소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홧김에 유리잔이라도 던진 것이겠지. 나는 그러나 무시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이번에 내가 찾은 곳은 시트리의 개인 집무실이었다. 시트리는 두 명의 산악파 마왕과 함께 무언가를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별안간 들이닥치자 다소 놀랐다. 시트리도 마찬가지였다.

    “어라, 단탈리안…….”

    시트리가 슬쩍 내 하반신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왼발이 멀쩡한 것을 보고 의아해하는 것이었다. 시트리는 다시 나의 눈동자를 유심히 노려보았는데, 이윽고 세기의 난제를 마주한 수학자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맞는데.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시트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말했다.

    ‘상태창.’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시트리가 갑자기 깜짝 놀란 듯 눈을 치켜들었다. 그녀는 허둥지둥 걸어와서 나의 손을 잡았다.

    “뭐, 뭐야? 응? 진짜 무슨 일이야? 어디 말 좀 해봐.”

    나는 천천히 시트리의 손을 내 손에서 밀어냈다. 계속해서 손이 떨리는 바람에 천천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시트리가 다시 나의 팔을 붙잡으려고 했으나, 그 전에 나는 뒤돌아서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단탈리안……?”

    한없이 나약한 목소리를 뒤에 남겨두고, 나는 정신없이 걸었다.

    이제 목적지 따위는 없었다. 머릿속에 무수히 떠오르는 상념들에 이끌려서 발걸음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그중에서 유독 두개골을 크고 깊이 울리는 하나의 메아리가 있었다. 몸 전체가 마치 그 메아리가 울리는 데 사용되는 동굴인 것마냥, 한 문장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들켜버렸다.

    데이지에게 들켜버렸다.

    내 배역의 의미를, 내 무대의 의미를 데이지에게 간파당하고 말았다. 완벽하게 시작하여 완벽하게 끝날 예정이었던 연극이 망가졌다.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몰락하는 시나리오가 부숴졌다.

    ‘아버님께서 세상을 전부 책임지겠다면, 좋습니다.’

    ‘하지만 정작 아버님은 누가 책임지는 것이지요?’

    데이지가 나에게 결코 해본 적이 없는 말이었지만.

    내 머리에서는 데이지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무뚝뚝하고 냉정한 목소리로. 어딘지 모르게 약간의 조소가 담긴 어조로.

    ‘아무도 아버님을 책임지지 않는다면.’

    ‘제가 아버님을 위하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어디까지나 단탈리안으로 남아야 할 터. 데이지에게 정체를 들켜버린 지금,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데이지는 나한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탈리안은 모든 것을 잘못했다.

    …….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황궁 뒤뜰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언제나 바르바토스와 나란히 앉아서 술을 마시던 곳이었다. 내가 온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연못에서 사는 몬스터가 물의 표면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뱀장어 같은 대가리가 이쪽을 향해서 입을 뻐끔거렸다. 바르바토스가 이따금 녀석한테 과자를 던져준 탓이겠지. 내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무심하게 있자, 물고기는 이상하다는 듯이 눈알을 굴렸다.

    ‘저거 봐. 나 생전 저렇게 못 생겨먹은 물고기는 처음 봤다니까. 단탈리안, 너 혹시 저게 환생한 거 아니냐? 외모 수준이 그럭저럭 삐까치는데.’

    ‘놀고 있네. 내가 얼굴 하나로 여기까지 올라온 남자거든?’

    ‘좋아. 지금 정했어. 이제부터 쟤 이름은 단탈리안이다.’

    물고기는 허공에 몇 번이나 헛입을 달싹거리고 이내 물밑으로 쑥 들어갔다.

    연못의 표면에 벚나무가 떨어트린 꽃잎만이 흐드러지게 떠다녔다.

    ‘야, 단탈리안. 옛다, 여기 네놈 먹으라고 꽁쳐온 과자다. 감사히 잡수라고.’

    만발한 벚나무 아래로 이 세상 것이 아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두근, 하고,

    심장이 조여왔다.

    나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은 채, 고개를 안으로 숙였다. 내 몸뚱어리가 세상에서 차지하는 면적이 가장 작아졌다. 그리고 소리 없이 무언가를 토해냈다.

    “…….”

    조금씩.

    “……, …….”

    조금씩.

    어느새 내 등을 누군가가 부드럽게 껴안고 있었다. 그 누군가도 몸이 떨렸다. 사실 내가 떨고 있는 것인지 그녀가 떨고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도저히 분간하기 어려웠다. 다만 그녀가 나를 대신하여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단탈리안 님.”

    “…….”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단탈리안 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라피스가 끝없이 죄송하다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

    나는 입을 열어서 그녀한테 뭐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너는 잘못한 게 없다면서, 나한테 사실을 알려준 것은 올바른 행동이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라피스의 두 팔을 내 두 팔로 꾸욱 붙잡아주었다. 라피스의 떨림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아마 라피스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연극은 끝나지 못했다.

    연극은 단지 실패했다.

    팔 년 전부터 우리 둘이 계획하고 연출해온 하나의 거대한 연극은, 틀림없이 지금 이 순간 무너지고 말았다. 라피스와 나는 서로의 패배를 말없이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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