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56 DANTALIAN =========================================================================
나는 상태창을 유심하게 훑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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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부프에 라니에리카
종족: 흡혈귀(인형) 본체: 이바르 로드브로크
속성: 악(-20)
레벨: 34 명성: 4522
직업: 상인(A)
통솔: 30/30 무력: 42/42 지력: 71/71
정치: 59/59 매력: 76/76 기술: 10/10
호감도: 100
*칭호: 1. 쿤쿠스카의 간부후보
*능력: 거래A, 회계B, 산술B
*스킬: -
현재심리: ‘라피스 라줄리의 기분이 별로인 것처럼 보이는군. 저 녀석, 나한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해. 예전에 알몸을 본 것 때문에 지금까지 꽁해 있는 것이겠지. 으으, 속 좁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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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란에 틀림없이 부프에라고 적혀 있었다.
능력치 또한 이바르의 본체와 많이 달랐다. 다만 가장 중요한 부분――호감도만큼은 이바르와 마찬가지로 정확히 100이 표시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인형과 같은 술수를 동원해서 데이지가 나를 속이기란 불가능했다.
만약 라피스의 말마따마 데이지가 내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면 상태창에도 여과 없이 나타났겠지. 하지만 데이지는 언제나 호감도 0을 자랑했다. 라피스의 가설은 간단히 부정되었다.
“역시 그런가.”
“예?”
“아니다. 혼잣말이다. 수고했노라, 이바르.”
이바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애당초 '데이지 인형설'은 너무나도 허점이 많았다. 만약 데이지가 인형 내지는 그 비슷한 물건을 대역으로 세웠다고 해봐라. 어떻게 그런 짓이 가능했겠는가. 데이지는 인형술사가 아니었다.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운 가설이었다…….
다시 확신했다. 호감도 시스템은 철옹성. 온갖 기묘하고 약삭빠른 계략을 써도 함락시키지 못하는 요새와 같았다.
만에 하나라도 내가 잘못 판단했을 가능성은 없었다. 사실 데이지가 나를 좋아했고 지금껏 펼친 모든 것이 연기에 불과했다는 시나리오는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
하지만.
“…….”
시선을 돌려서 라피스를 훔쳐 보았다. 아까부터 라피스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포기하면 라피스는 분명히 더 이상 재고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미 그녀 기준에서는 너무도 많은 것을 내게 부탁해버렸다고 여기겠지.
다시 생각하자.
또 다시 가능성을 검토해본다.
데이지는 용사다. 달리 말해, 이 세계의 주인공으로 내정된 아이다. 오로지 데이지만이 호감도 시스템에서 예외로 취급될 가능성은? ……안 된다. 그러면 왜 루크는 호감도가 제대로 표시되는가. 데이지에게 이상이 있으면 루크한테도 있어야 한다.
떠올려라.
‘본인은 모든 마족의 주인, 서열 제72위의 마왕 안드로말리우스이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감히 그 관용에 기대어서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데이지와 관련된 기억을 모조리 처음부터 끝까지 되살핀다. 어느 한 군데라도 이상한 지점이 있었는지, 라피스의 가설을 입증할 만한 증거, 아니, 정황이라도 있었는지 알아낸다.
‘제 자신이 오라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쓰레기 새끼임을, 영원히 기억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만났을 때는 데이지 녀석도 활기에 차 있었지.
목소리가 당당했고 얼굴에도 자신감이 쉽게 드러났다. 그렇지만 수술. 심장에 노예각인을 새기는 수술을 기점으로 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더 무뚝뚝해지고 차갑게 가라앉았다.
만일 데이지가 내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면 수술 이전의 이야기였다. 그때는 녀석도 나를 눈에 띄게 증오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살이 찢어지고 심장이 파이는 고통, 자신을 영원히 노예로 속박시켜버린 악행에 분노했다…….
‘역시, 안 되는군요.’
그리고 암살 미수.
이쪽이 잠들어버린 틈을 타서 내 목에 단검을 꽂아넣으려고 한 사건.
‘네 년이 죽을려고 발악을 하는구나.’
‘아니요. 당신을 죽이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래서? 어디 나를 죽여볼 수 있더냐? 유감이로군.’
사실 그 사건에는 이상한 구석이 있긴 있었다. 데이지의 행동에 다소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딱 한 군데 있었다.
‘당장 불어라. 언제부터 정신을 차렸느냐?’
‘오늘 햇빛이 났을 때부터.’
바로 시간차였다.
내가 데이지의 살기를 느끼고 깨어난 시각은 한밤. 반면에 데이지는 나보다 훨씬 더 일찍 일어났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기 이전까지, 데이지는 얼마든지 몰래 암살을 시도해본 다음에――모르는 척 관둘 수가 있었다.
구태여 이쪽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서, 자신이 암살을 시도해보았다는 사실을, 나한테 적나라하게 알려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데이지는 일부러 '역시 안 되는군요'라고 소리내어 말했다. 내가 잠에서 깨는 것을 유도했다. 흥분시키고 도발했다. 마치 자기가 이렇게 위험한 일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음을 광고하듯이.
‘잭은 누구입니까.’
그게 아니라면?
‘항상 악몽을 꾸십니까? 사람 이름을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계셨습니다. 반복되는 이름이 있더군요. 잭, 호크, 올란드, 리프…….’
혹시나 정반대라면?
‘그리고 어머니.’
내 암살을 시도해본 다음에 일어서려고 했지만, 모종의 이유 때문에 차마 일어서지 못한 것이라면.
‘당신 같은 존재에도 어머니가 있다니 놀랍습니다.’
데이지의 몸을 붙잡아서 그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충격적인 이유가 그때, 내가 아직 잠에 빠져들어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미처 자각하지 못한 바로 그 순간, 일어나고 있었다면.
그건.
그런 것이.
그런 게, 있을 리가.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
오른손이 작게 떨렸다.
말도 안 된다. 그런 일이 가능할 리 만무하다. 하지만,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 있다. 나는 그 가능성을 아직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검증이다. 철저하게 시험해보는 수밖에 없다.
내가 양손으로 강하게 손깍지를 끼었다. 손이 떨리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서였다.
“이바르. 한 가지만 더 부탁할 것이 있다. 괜찮겠느냐.”
“전하의 명령이라면 천 번이라도 만 번이라도 기쁘게 수행하겠습니다.”
“무소속 마왕들이 반역을 도모했을 때.”
마음이 동요할 때마다 항상 그러했듯이,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차갑고 음산했다. 내가 필사적으로 연기를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무뚝뚝함과 차가움은 나에게 있어 언제나 연기를 의미했다.
“그때 나와 똑같이 생긴 인형을 몇 체 만들지 않았더냐.”
“예. 무소속 마왕들을 속이기 위하여 전하와 닮은 인형을 모두 3체 제작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파괴되었으니 아직 두 개는 남았겠구나.”
이바르가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 암살을 대비하는 용도로 쓰임새가 있을까 하여 보관했습니다. 하나는 마왕성에 숨겨두었고, 다른 하나는 황궁에 숨겨두었나이다.”
“그걸 지금 가져올 수 있겠느냐.”
“물론이옵니다.”
“……부탁한다. 그리고 이바르, 그대도 본체로 갈아타서 오도록.”
이바르가 집무실에서 나갔다.
억겁과 같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방바닥을 내려다보며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하지 못했다, 라고 표현하는 쪽이 올바를지 모르겠다.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전하. 여기 대령했나이다.”
이바르가 뒤쪽에 인형을 대동하고 돌아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실제로는 오 분, 십 분 만에 다녀왔겠지. 하지만 나에게는 훨씬 더 길게 느껴졌다. 내가 입을 열었다.
“잠시 의식을 인형에게 옮기겠다. 도와주거라.”
“네, 전하. 잠시 무례를 저지르는 것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예전에도 이바르의 도움을 받아서 인형을 조종한 적이 잠깐 있었다. 발레포르를 비롯해서 무소속 마왕들이 거사를 일으켰을 때였다. 그때 나는 인형으로서 살해당하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유유자적하게 본체로 돌아왔다.
“조금 헛구역질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바르가 내 이마에 슬쩍 손바닥을 올렸다. 손바닥이 차가웠다. 나는 두 눈을 감았다.
잠시 뒤, 역겨운 욕지기가 일어났다. 마치 내 손발이 끝없이 짧아져서 죄다 두개골의 범위에 들어가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내 몸에서 손이 얼마나 길게 뻗어져 있는지 거리감 자체가 사라졌다.
“다 되었습니다. 전하.”
내가 천천히 눈을 떴다.
집무실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까 전과 달라진 건 없었다. 다만 왼발에 의족을 찬 내 본체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인형에 의식을 옮기는 건 이번으로 두 번째. 별로 유쾌한 체험은 아니었다.
“…….”
가슴이 불길하게 두근거렸다.
이제부터 나는 어떤 실험에 들어간다.
만약 라피스의 가설이 옳다면 이것이 최후의 가능성. 이걸 제외하고 데이지가 나를 속였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비록 내가 라피스의 기대를 배신하게 될지라도, 라피스에게 슬픔을 안겨주게 될지라도, 나는 냉정하게 그녀의 믿음을 부정할 것이었다.
나는 이바르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마음속으로 단 한 마디의 말을, 토해냈다.
‘상태창.’
……조용하기 그지없는 정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허공에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애써 침착하게 기다렸다.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상태창.’
그러나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똑같은 말을 속삭여도, 몇 번이고 끈질기게 반복해도, 허공에는 결코 어떠한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내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이바르가 부끄러운 듯 뺨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저기, 전하. 그리 빤히 바라보시면 소녀가 부끄럽습니다.”
“…….”
“전하?”
이제 나의 두 손은 통제를 벗어나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고개를 돌려서 이번에는 라피스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라피스를 향해서 내가 자그맣게 소리 내어 말했다.
“상태창.”
아무것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아.”
그것은 무척이나 작은 신음이었지만 동시에 나약한 비명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 불가능하다. 단편적이고 부정적인 상념이 머릿속을 새카맣게 메웠다.
인형으로는 상대방의 호감도를 알아볼 수 없었다.
상태창 자체가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말해, 호감도 시스템은 오로지 마왕인 '단탈리안'을 향해서만 작동했다. 내 의식이 인형으로 옮겨지면 마족의 감정을 읽을 수도 없을뿐더러 지배력을 행사할 수도 없었다. 당연했다. 감정을 읽는 것이나 지배력을 발휘하는 것이나 전부 마왕만의 특권이었으니까.
설령 이바르와 라피스가 아무리 나를 사랑할지라도.
단탈리안의 몸에서 인형의 몸으로 옮겨온 나에게는 그 호감의 수치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왕 단탈리안이므로.
―――그렇다면.
만약 누군가가.
‘데이지 양은 언제나 단탈리안 님께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특히 단탈리안 님께서 과거에 무엇을 하셨는지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자신과 만나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가. 어떤 시절을 보냈는가. 빠짐없이 알아내기 위해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하나의 진실을 알아차렸다면.
‘당신 같은 존재에도 어머니가 있다니 놀랍습니다.’
내가 사실은 단탈리안이 아니라.
어미도 아비도 없이 마력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태어난 마왕이 아니라, 한 명의 어머니를 가진, 원래는 마왕이 아닌 다른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무엇이 당신의 이름입니까? 처음 마을에서 뵈었을 때 당신께선 안드로말리우스라 자칭하셨습니다. 다음은 단탈리안. 그 다음은 쟝 볼레.’
그리하여 단탈리안의 몸은 인형에 불과하고.
단탈리안의 이름은 한낱 가명에 불과하며.
내가 이 세계에서 단지 배우로서 연기하고 있음을.
가면 너머로 한때 또 다른 내가 있었음을 알아차린다면.
그 누군가가 단탈리안이 아니라, 나에게, 호감을 품는다면―――.
‘저는 당신을 무엇이라 부르면 좋겠습니까?’
내 입에서 헛숨이 흘러나왔다.
이제야, 깨달았다.
데이지가 공개처형장에서 나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의 의미가 완전히 이해되었다.
‘아버님. 이 세상에 '나'라는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슬슬 인정하십시오.’
‘당신의 위악이 아슬아슬한 곡예라는 걸 자인하시지요. 물론, 아버님에게 이런 선택은 불가능하겠지요.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진즉에 도피했을 테니 말입니다.’
데이지는.
본래 용사가 되었을 소녀는.
나의 단 한 명뿐인 후계자이자 양녀는.
‘아버님께서 세상의 악마가 되겠다면, 저는 오직 아버님만의 악마입니다.’
―――내가 단탈리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의 과거를 집요하게 조사했다.
아마도 데이지는 얼마 가지 않아서 발견했을 것이다. 수 년 전, 대륙력 1505년, 특정한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서 갑작스레 마왕 단탈리안의 세력이 부상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어머니를 언급하는 나의 잠꼬대를 증거로 삼아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이 세계에서 오직 그녀만이 나를 알아보았다.
“아……아, 아…….”
데이지가 인형을 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로, 내가 단탈리안이라는 이름의 인형을 써서 살아왔기에.
마왕 단탈리안을 향한 호감이 아니라 올곧게 나를 향한 호감은, 보이지 않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