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55화 (455/510)
  • 00455 DANTALIAN  =========================================================================

    “중요한 오해라니. 내가 데이지에 관해서 모르는 것은 거의 없을 텐데.”

    “……데이지 양은 단탈리안 님의 영원한 증인.”

    라피스가 말했다.

    “그것이 단탈리안 님께서 그리신 구상이겠지요. 데이지 양은 그 구상에 어울리고자 최대한 힘껏 노력했습니다. 온갖 언어를 익힌 것도, 학문과 무예에 힘쓴 것도, 어떻게 해서든 단탈리안 님과 대등한 입장이 되기 위해 분투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뭐. 기특하기는 기특한 일이지. 나도 녀석을 인정하고 있어.”

    “하지만 데이지 양이 자력으로 단탈리안 님의 의중을 파악한 것은 아닙니다.”

    “어?”

    라피스가 입을 다물었다.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본래 데이지 양은 어찌하여 자신이 앙녀가 되었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단탈리안 님을 적대한다든지, 그런 생각은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지요. 아마도 데이지 양은 단탈리안 님의 충실한 동반자가 되어 함께 걸어가기를 원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일전에 데이지 양이 저한테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왜 단탈리안 님께서 자신의 몸을 취하지 않는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다시 침묵.

    드물게도 내 머리가 대화의 맥락을 쫓아가지 못했다. 라피스가 무슨 말을 했는지 해석하기 위하여 두뇌의 모든 부분이 최대출력으로 엔진을 돌렸지만, 모터가 쓸데없이 허공에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한참이 지나서 내가 한 마디 내뱉었다.

    “그건 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데이지 양은 아직 단탈리안 님의 의중을 정확히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조언했습니다. 단탈리안 님께 필요한 것은 연인이 아니라 이해자라고.”

    “…….”

    “데이지 양에게는 그것이 기점이 되었겠지요.”

    여전히 무슨 얘기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다만 라피스가 필요 이상으로 심각해 보인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데이지가 자신의 역할을 자각하는 데 있어 라피스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한들 뭐 어디 달라지는 것이라도 있겠는가.

    데이지가 생각보다 조금 더 멍청했다. 그런 얘기밖에 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라피스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진 그늘이 조금 더 짙어졌다. 나는 마음이 점점 더 답답해졌다. 라피스의 안색이 바뀔 때마다 나는 심장이 조여지는 감각에 사로잡혔다.

    “단탈리안 님. 그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그 부분이 아닙니다. 데이지 양이 단탈리안 님께 호감 내지는 연정을 품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연정?”

    “예. 데이지 양을 이끄는 원동력은 단탈리안 님에 대한 증오심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내가 오른손을 절레절레 흔들면서 작게 웃었다. 라피스가 하는 말을 도중에 끊어서 미안했지만 이건 그냥 듣고 넘어갈 수 없었다. 확실하게 짚어두어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그건 절대로 아니야. 나한테 호감을 품어? 데이지가? 차라리 바싸고가 나를 사랑한다는 게 더 그럴듯하지.”

    “…….”

    “왜 이리 표정이 진지하다 싶었더니 어마어마한 착각을 하고 있었구나. 라피스. 내가 이유는 말해줄 수 없어도 데이지는 내게 호감이 눈꼽만치도 없어.”

    그렇다. 호감도 시스템은 절대적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호감도를 확인하는 데 약간 주저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건 이 세계가 현실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인해 만들어진 모조정원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었다.

    이 세계가 모조정원이라도 상관없었다. 나에게는 이게 현실이었다. 현실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사람들이 숨을 쉰다. 생각을 한다. 움직인다. 괴로워하며 고뇌하고, 슬픔을 참으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천박함과 고귀함 사이에서 끝없이 오간다.――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현실인가?

    그렇기에 나는 일찍이 교통사고를 당해 죽기 이전의 내가 아니라 단탈리안이 되기로 결정했다. 이 세계를 받아들였다. 단탈리안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나는 살인자이며 학살자이다. 여기에 변명의 여지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감도 시스템은 철벽.

    예전에는 축복이라 여겼지만 지금은 저주에 불과한 속박이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걸 인과응보라고 생각했다. 여태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잘도 가지고 놀았으니 이제 한 발자국 뒤늦게 대가를 지불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단탈리안 님. 데이지 양이 어떻게 명령을 거스를 수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라피스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반박했다.

    “노예각인에 속박된 사람은 결코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데이지 양은 보란 듯이 대놓고 단탈리안 님의 지시에 거역했습니다. 원래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명령들 사이의 모순을 사용했겠지.”

    내가 즉답했다.

    그건 나도 고민하고 또 고민한 사안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 이바르한테 명령해서 노예를 한 명 구해오라고 명령했다. 나는 서로 모순되는 명령을 노예한테 지시해보았다. 그러자 노예는 어쩌지도 못하고 당황했다.

    “노예각인은 순전히 주관적으로 명령을 받아들여. 자기가 생각하기에 서로 모순된다고 생각하면, 바로 그때 노예는 어느 정도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어. 데이지 녀석도 그 틈을 노린 거지.”

    “옳습니다.”

    라피스의 푸른색 눈동자가 똑바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안 그렇습니까, 단탈리안 님.”

    “…….”

    “노예는 어디까지나 주인에게 이로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명령이 모순된 상황에서조차 노예가 주인에게 해악이 되는 행동을 취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

    예컨대 노예각인에 두 가지 명령이 내려졌다고 해보자.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인을 지켜라’라는 명령이 있고, 또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마라’라는 명령이 있다. 이런 명령들이 입력된 상황에서 만약 주인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면 어쩌겠는가. 그리고 주인을 구하는 대신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한다면?

    주인을 죽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자기 목숨을 버려서도 안 된다. 진퇴양난이다. 명령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한다…….

    이럴 때 노예는 주인에게 이로운 방향을 선택하게 된다. 아마도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 노예는 자기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주인을 구출하겠지. 라피스는 지금 그걸 지적하고 있었다.

    “데이지 양은 처형식을 제지하는 것이 단탈리안 님을 위한 선택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기에 행동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다시 말해, 증오로는 그런 선택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단탈리안 님. 오로지 정반대의 감정만이 데이지 양을 이끌 수 있습니다.”

    “무언가 다른 술책을 부렸을 거야.”

    내가 고개를 저었다.

    “어떤 술책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건 나도 몰라. 우리가 미처 파악하지 못했을 정도로 교묘하고 복잡한 수단을 동원했겠지. 하지만 데이지가 내게 호감을 품었다는 것만큼은 아니야.”

    그렇다.

    매우 단순한 선택의 문제였다.

    첫 번째, 라피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이 경우에 나는 호감도 시스템이 잘못되었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두 번째, 내 추측을 받아들인다. 이 경우에는 데이지가 나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정교한 계책을 부렸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어느 쪽이 더 그럴듯할까. 당연히 두 번째였다. 호감도 시스템이 무너졌음을 믿느니 데이지의 계략을 믿는 것이 훨씬 더 합당했다. 단지 라피스는 호감도 따위를 알지 못하므로 첫 번째 가능성을 진지하게 믿는 것이었다.

    요컨대 정보의 차이 때문에 빚어진 오해였다.

    “라피스. 이번에 데이지가 저지른 일은 너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

    내가 라피스의 오른손을 꾸욱 잡았다. 서늘하게 기분이 좋은 감촉. 나는 손이 뜨거운 편이라서 라피스를 만지는 것이 항상 즐거웠다.

    “네가 뭔가를 조언했다고 해서, 데이지의 증오심은 어디까지나 데이지 본인이 만들어낸 감정이야. 만약 거기에서 책임을 따진다면, 온전히 나의 책임이지 결코 네 책임이 아니야.”

    내가 부드러운 눈길로 라피스를 바라보았다.

    “라피스가 책임감을 느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정말이야.”

    아마도 라피스는 지금 상황을 모조리 자기 책임으로 느끼고 있겠지. 데이지가 저런 사단을 벌인 것도, 그것 때문에 내가 왼발을 절단해버린 것도, 결과적으로 자신의 섣부른 조언 때문이었다고 자책했을 것이다.

    라피스는 자기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니까. 아무리 괴로워도 내색하지 않는다. 오직 나만 라피스의 무표정한 얼굴을 진정한 의미에서 이해하고 있다…….

    나는 라피스를 껴안으려고 슬그머니 양팔을 벌렸다. 그런데 라피스가 내 손목을 잡았다. 라피스는 아까보다 더욱 굳센 의지를 시선에 담아서 나를 직시했다.

    당황스러웠다. 이토록 감정을 강렬하게 표현하는 일은 라피스에게 무척이나 드물었다.

    “라피스……?”

    “저를 믿어주세요.”

    내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단탈리안 님……이번만큼은……저를 믿어주세요.”

    라피스가 괴로운 듯이 말을 조금씩 토해냈다. 아니, 그녀는 정말로 괴로워 하고 있었다. 비록 다른 사람에 비해서는 한없이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라피스는 지금 틀림없이 고통을 표현하고 있었다.

    “…….”

    나는 곧바로 생각을 바꾸었다.

    ――추측을 수정한다.

    라피스가 자신을 믿어달라고 부탁했다. 단 한 번도 나에게 그런 식으로 부탁한 적이 없는 라피스가 고통에 둘러싸인 얼굴로, 제발 신뢰해달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내 생각 따위는 얼마든지 뒤집어야 마땅했다. 제아무리 합당한 판단일지라도 라피스가 진심으로 재고를 부탁하면, 당연히 심각하게 의심해야만 했다. 라피스의 부탁에는 그만한 무게와 가치가 있었다.

    내가 의자에 걸어가서 앉았다. 라피스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하기 그지없는 집무실에서 나는 사고의 바다에 잠겼다.

    “…….”

    어떻게?

    라피스의 말대로 데이지가 내게 호감을 품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나 이는 상태창에 드러나는 호감도 표시를 정면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무엇을 어찌해야 호감도가 잘못 표시될 수 있는가.

    그런 것이 정말로 가능할까? 만에 하나라도, 천만분의 일이라도 가능한 방법이 있다면, 도대체 무엇인가.

    “라피스. 하나만 확인할게. 데이지가 나에게 품은 감정은 정말로 우정이나 연모와 같이 일종의 긍정적인 감정이야?”

    “예, 단탈리안 님.”

    “……안 되겠군. 정보가 부족해.”

    내가 지팡이로 방바닥을 가볍게 툭툭 찍었다. 나는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허공을 비스듬하게 쳐다보았다.

    “데이지 양은 언제나 단탈리안 님께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무언가 상당히 특이하다거나 이상한 지점은 없었어?”

    “도움이 되는 정보일지 모르겠습니다만, 특히 단탈리안 님께서 과거에 무엇을 하셨는지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자신과 만나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가. 어떤 시절을 보냈는가. 빠짐없이 알아내기 위해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그것도 딱히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에 스쳤다.

    만약 데이지가 이바르처럼 인형을 사용했다면 어떨까?

    데이지는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 자신과 쏙 닮은 인형을 제작했다. 데이지 본인은 나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지만, 인형은 본체와 다르게 호감을 품지 않았다……그런 시나리오가 가능하지 않을까?

    “음.”

    상당히 빈틈이 많은 시나리오였지만 아예 검증할 가치가 없진 않으리라.

    내가 손잡이 종을 집어들어서 흔들었다. 경쾌한 금속음이 울리고 잠시 뒤, 이바르가 집무실에 들어왔다. 이바르는 아직도 긴장한 기색이었다.

    “부르셨나이까, 전하.”

    “이바르. 급한 명령이다. 그대가 보유한 인형들 중에 아무거나 지금 즉시 가져올 수 있겠는가?”

    이바르가 눈을 깜빡거렸다.

    “네, 물론입니다. 여기 황궁에 숨겨둔 인형도 열두 체나 있으니까요.”

    “의식을 인형으로 옮긴 다음 여기에 와주어도 괜찮겠는고? 잠깐 시급하게 검증해볼 일이 있다.”

    “이를 말씀이옵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시길.”

    이바르가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집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살았다, 라는 감정이 전해졌다. 아마 라피스가 자기를 질책할 줄 알고 잔뜩 겁먹은 모양이었다.

    삼 분 정도 흘렀을까. 집무실로 낯익은 얼굴의 청년이 들어왔다. 부프에. 내가 처음으로 이바르를 만났을 때 그녀가 사용하고 있던 인형이었다. 내가 쓰게 웃었다.

    “그 모습은 무척 오랜만이군.”

    “전하께 약간의 여흥이 될까 싶어서 이 몸을 골랐습니다.”

    청년이 빙그레 웃으면서 허리를 숙였다.

    ‘상태창.’

    하고 내가 마음속으로 말했다.

    눈앞에 푸른 빛깔의 상태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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