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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454화 (454/510)
  • 00454 DANTALIAN  =========================================================================

    “소인이……이곳에서 뭐라고 대답해드릴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그대에게는 독단적으로 판단을 내릴 권한이 없겠지요. 숙소에서 편히 쉬다가 황제 폐하와 저녁 식사나 함께합시다.”

    내가 고개를 숙여서 책상에 올려져 있는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상당히 무례한 짓거리였지만 볼프람 하델베르크는 순순히 물러났다. 내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일까, 본래 자기 감정을 잘 갈무리하는 성격인 것일까. 아마도 양쪽 전부이겠지. 나는 말없이 볼프람 하델베르크를 내보낸 직후, 손잡이 종을 울렸다.

    “전하. 부르셨사옵니까.”

    문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들어왔다. 데이지가 사라진 이후로 내 시중은 이바르가 전담했다. 데이지에 비해 약간 어수룩한 면이 있었지만 업무에 지장이 가는 정도는 아니었다.

    “선제후 마왕들은 이미 접견실에 모여 있느냐?”

    “예. 반시진 전부터 모여 있다고 얘기를 들었나이다.”

    “이런, 본의 아니게 기다리게 만들었군.”

    내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의족이 달린 왼발에 지팡이까지 동원해서 어떻게든 균형을 맞추었다. 이바르가 다가와서 나를 부축해주려고 했는데, 고개를 흔들어서 거절했다.

    “아직 다른 사람한테 부축받으면서 살아가야 할 정도로 몰락하지 않았다.”

    이바르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전하…….”

    “되었다. 내가 괜찮다고 했으니 괜찮은 것 아니더냐.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소모하느니 군자금을 관리하는 데 주력하도록. 헬베티카 연방에는 연락을 넣었겠지?”

    “……예.”

    내가 조금 기우뚱거리면서 문을 향해 걸었다. 걸음걸이 모양새가 우스웠다.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오리처럼 뒤뚱거리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좋다. 만약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면 헬베티카 연방의 용병이 반드시 필요해진다. 이번에도 라우라가 지휘를 맡을 것이라고 슬쩍 정보를 건네라. 그럼 용병들도 쉬이 우리를 따르겠지.”

    “그, 하온데, 문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음?”

    이바르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떻게 운을 때야 할지 모르겠다는 안색이었다. 내가 눈짓으로 차분하게 재촉하자, 이바르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라줄리 국무상서가 지금 접견을 청하고 있나이다.”

    “…….”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여태까지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상념들이 순식간에 뒷전으로 밀려났다. 평원파 반란군에 대한 계략이며, 바르바토스를 외교적으로 활용하는 책략이며, 엘리자베트와 데이지에 대한 방책 등, 마치 알코올이 증발하듯이 싹 사라졌다.

    “지금? 여기에?”

    “공화국의 사신이 출입하자마자 거의 동시에 왔습니다. 전하께서 사신과 담화를 나누시는 동안, 국무상서가 문밖에서 전하를 쭉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이바르에게 눈을 부라렸다.

    “설마 내 왼발에 대해 라피스한테 말했느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마 다른 경로를 통해서 얘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 라줄리 국무상서는 전하께서 지난 국화전쟁 때 부재하시는 동안, 이곳 황궁의 관료들과 다방면에 걸쳐서 인맥을 쌓았습니다. 그쪽에서 정보가 샌 것이 아닐까 하옵니다.”

    이바르도 곤혹스러운 얼굴이었다.

    나는 내 왼발에 관하여 절대로 라피스나 라우라한테 알리지 말도록 철저히 입단속을 시켰다. 두 사람 모두 마왕성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쪽에서 정보를 퍼트리지 않는다면, 마왕성의 업무에만 집중하고 있는 두 사람이 진실을 알아차릴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했건만…….

    어쩔 수 없는가.

    이미 들켰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내가 뒤돌아서서 벽 쪽으로 다가갔다. 등 너머로 이바르가 말을 걸었다.

    “단탈리안 님?”

    “왜 부르는고.”

    “그게……지금 뭐하시는 것이옵니까?”

    “보면 모르겠느냐.”

    내가 창문틀에 오른발을 올렸다.

    “라피스가 들이닥치기 전에 얼른 탈출해야 되겠다.”

    그렇다.

    이제는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전하, 여기는 3층이옵니다!?”

    공손한 말투를 유지하고 있던 이바르가 경악했다.

    “떨어지면 옥체가 손상되어버립니다!”

    “괜찮아. 아무런 문제도 없다. 기껏해야 다리 한쪽이 부러지고 말겠지. 나는 이미 왼발이 부러졌으니 땅바닥에 착지할 때 왼발을 사용하면 된다. 즉……나는 완전히 안전하다.”

    “완전히 논리가 글러먹었습니다! 진지한 얼굴로 무슨 헛소리를 남발하시는 겁니까!”

    이바르가 달려와서 나의 허리를 붙잡았다.

    “놓아라! 당장 놓지 못하겠는가! 이바르는 아직 라피스가 얼마나 무서운 여자인지 몰라서 이러는 것이야! 녀석한테 걸리면 잔소리가 다섯 시간을 기본으로 깔고 들어간다! 당장 선제후 마왕들이 접견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감당하라는 말이냐!”

    내가 바둥거렸다. 이바르는 팔뚝이 여리고 가느다란 주제에 쓸데없이 악력이 강해서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아니되는 겁니다! 다리도 성하지 않은 분께서 3층 높이를 뛰어내리시려 하다니, 무모한 짓에도 정도가 있사옵니다! 게다가 국무상서가 무서운 여자라는 건 소녀도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이바르의 얼굴을 다급하게 쳐다보았다.

    “이바르. 네가 나를 안고 뛰어내리는 것이다. 우리 둘이서 함께 도망치자꾸나. 그럼 위험할 일도 없거니와 만사가 태평해지니 실로 완벽한 해결책이다.”

    “송구하오나 아니되옵니다.”

    이바르의 보랏빛 눈동자에서 결사적인 각오가 빛났다.

    “그러면 제가 나중에 국무상서한테 혼나버리지 않습니까!”

    “이바르, 너마저!?”

    이제 보니 내가 위험하다는 것 때문에 말린 게 아니라 이대로 나를 도망치게 내버려두면 자기가 혼날까봐 말린 것이었다. 이럴수가. 나는 충격에 사로잡혀 소리 질렀다.

    “주군의 안전보다 네 일신의 보위가 중요하다는 것이냐!?”

    “애시당초 전하께서는 혼쭐이 나실 필요가 있습니다. 국무상서와 군무상서한테 사실을 숨기라고 명령하시다니, 차라리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시옵소서!”

    이바르가 겁나게 억센 손아귀로 나를 창문틀에서 끌어내렸다. 덕분에 뒤로 자빠질 뻔했다. 정말로 이게 호감도와 충성도가 극한까지 찍힌 연인이요 충신이 저지르는 행태란 말인가.

    “군무상서야 세상사에 귀가 어두우니 어찌저찌 속인다 치더라도 상식적으로 국무상서를 기만하는 것이 가능할 리 없잖습니까! 국무상서가 가지고 있는 인맥만 헤아려도 능히 대륙의 절반을 뒤덮습니다!”

    “어, 언제부터 라피스가 그리 된 것이냐?”

    “그야 전하를 모시고 난 이후부터지요!”

    이바르가 이빨을 으득 갈았다.

    “전하에게 어떻게 조금 비벼보려고 하는 인사들은 죄다 국무상서의 마음부터 얻으려고 온갖 뇌물을 싸들고 찾았으니, 마계의 대공에서부터 각종 상단의 주인, 심지어 선제후 마왕들까지 국무상서의 손아귀에 있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말이 안 되기는요.”

    이바르의 눈이 불타올랐다.

    “전하께서 외정만 돌보시고 내정은 모조리 국무상서한테 맡겼으니 일이 이렇게 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있겠나이까! 전부 전하께서 자초하셨습니다. 얌전히 국무상서에게 잡혀주십시오.”

    이바르의 목소리에 왠지 모르게 원한이 서려 있었다.

    단순히 국무상서한테 혼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담긴 것 같지가 않았다. 그것보다 훨씬 더 오래된 원한이, 묵히고 묵혀서 이내 썩어버린 무언가가 이바르의 가슴을 경유하여 입에서 흘러나왔다. 오죽하면 내가 어깨를 찔끔거릴 정도였다.

    “이바르……혹시 너, 라피스한테 당하고 살았느냐?”

    “무슨 소리인지요. 전혀 아니옵니다.”

    이바르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설마 과거의 부하한테 시달리게 되었다는 이유로 마음이 상할 만큼 제가 속이 좁은 성격이겠습니까. 예에. 그럴 리가 없지요. 소녀를 일개 시종으로 전락시켜버린 단탈리안 전하께 유감을 품는다던가, 그럴 일은 일절 없나이다.”

    “완전히 마음이 꽁해 있거늘 뭐 아닌 척을 하는고!”

    충격적이었다. 아무래도 이바르는 라피스에게 쌓인 것이 많은 듯했다. 심지어 라피스한테 당한 수모를 당사자가 아니라 나에게 풀려 하고 있었다. 이처럼 억울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자아, 전하! 정의의 심판을 받으십시오!”

    “이제는 아예 내숭을 떠는 수고조차 기울이지 않는구만!”

    “소녀한테 가식을 떨지 말라고 충고해준 게 어디 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어린애처럼 유치하게, 그러나 어린애와 같은 진지함으로 필사적으로 툭탁거렸다. 농담이 아니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가 이 일전에 달려 있었다.

    그때였다.

    “집무실이 무척이나 소란스럽군요.”

    뚝, 하고.

    서로의 옷가지를 쥐어뜯으며 난동을 부리던 우리 두 사람의 몸동작이 마치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멈추었다. 이바르와 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단정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라피스가.

    여느 때처럼 무표정한 눈길로 우리를 쳐다보는 라피스가 있었다.

    “개인의 집무실이란 언제나 그 주인의 품격을 상징합니다. 언제나 차분해야 하고, 흔들림이 없으며, 무겁지 않되 엄숙한 중도를 지켜야 하지요. 이바르 양.”

    “예, 국무상서.”

    이바르가 언제 나와 드잡이질을 했냐는 듯이 곧바로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태세를 전환하는 속도가 가히 고블린의 번식속도를 방불케 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내숭을 떨어본들 물이 엎어진 지 오래라. 라피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이바르를 좌절시켰다.

    “오늘밤 업무가 끝나고 제게 찾아오시길. 이바르 양의 업무 태도에 관련해서 주의를 드릴 부분이 있습니다.”

    “구, 국무상서. 소인은 어디까지나 전하께서 다치실까 저어되어……!”

    “이의는 그때 듣도록 하겠습니다.”

    라피스가 무심하게 시선을 돌려서 나를 바라보았다.

    라피스는 조용히 내 왼발을 먼저 살펴보았다. 문득, 라피스가 멈칫했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나의 왼발을 주욱 내려다보았다.

    “…….”

    “…….”

    견디기 힘들 정도로 괴로운 침묵이 집무실에 내려앉았다. 그 사이에 이바르는 눈치 빠르게도 혼자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녀석을 불러잡고 싶었지만, 라피스의 시선이 내게 고정되어버린 이상 말문을 열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났다.

    “단탈리안 님.”

    “……응.”

    그리고 또 다시 침묵.

    라피스는 입술을 자그맣게 벌렸다. 하지만 목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한동안 입술을 열었다가 다시 천천히 닫았다. 나에게는 어떠한 질책보다도, 잠시 열렸다가 도로 닫힌 라피스의 입술이 훨씬 더 뼈아프게 가슴을 후려팠다.

    나는 차마 잘못하다고 사과할 수조차 없었다.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 절실하게 느껴졌다. 나는 라피스 앞에서 완전히 무장해체되어, 꼭 철없는 어린애마냥 내팽개쳐진 기분이 들었다. 라피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데이지 양에 대해서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그, 그래.”

    “본래 단탈리안 님께 말씀드리지 않겠다고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버린 이상 제가 입을 다물 수는 없습니다.”

    무슨 얘기일까.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 라피스가 데이지를 언급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에, 나는 다소 얼이 빠진 표정으로 얘기를 들었다. 일종의 항복이었다. 라피스가 무엇을 어떻게 말해도 순순히 경청하겠다는 뜻으로.

    “대체로 니블헤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는 알았습니다. 하지만, 단탈리안 님. 단탈리안 님께서는 데이지 양에 대해 한 가지 오해하고 계시는 지점이 있습니다.”

    “오해……?”

    “예.”

    라피스가 어쩐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무척 중요한 오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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