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53화 (453/510)

00453 DANTALI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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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람 하델베르크라고 합니다. 미흡하게나마 공화국을 대표하여 공작 전하를 뵙게 되었습니다. 향후, 모쪼록 귀국과의 영구한 평화를 위해 진력하겠습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4월 중순. 합스부르크 공화국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예측이 맞아 떨어졌다고 자축해야 할까.

일단 저쪽에선 교역이다 관세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고 찾아왔지만, 전부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진짜 목적은 어떻게든 황제를 만나서 진위를 확인해보는 것이겠지. 그 전에 법무상인 나를 먼저 감당해야겠지만.

내가 만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면서 상대방을 집무실에서 맞이했다.

“하델베르크 상서로군요.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대륙의 언어는 물론이고 마족의 언어까지 통달하셨다고.”

“공작 전하께서 소인을 알아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남자가 환히 웃었다. 이제 삼십 대 후반쯤 되었을까.

미청년에서 미중년으로 넘어가는 시기, 체력을 살짝 잘못 관리했는지 얼굴에 볼살이 붙었지만 덕분에 후덕한 인상이 풍겨서 오히려 좋았다.

볼프람 하델베르크. 일찍이 제국의 전통적인 명문가에서 두각을 드러낸 천재였다. 이십 대 무렵, 엘리자베트가 이끌던 황녀파에 투신하여 공화국 건립에 일조하고, 지금까지 외교부의 수장으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요컨대 이미 청년 시절에 한 나라의 개국공신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볼프람 하델베르크뿐만이 아니라 공화국의 실세는 죄다 젊었다. 하긴 엘리자베트 통령부터가 아직 이십 대에 불과했다. 젊고 유능한 정부. 그것이 현 공화국이었다.

하지만 유능함이 곧 국력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게 난세의 비극이다.

볼프람 하델베르크, 당신이 제일 절절하게 통감하고 있겠지. 본래 공화국에는 든든한 우방들이 기라성처럼 늘어서 있었다. 브르타뉴 왕국, 폴리투니아 왕국, 사르데냐 왕국, 아나톨리아 제국…….

이제 공화국을 편들어주는 나라는 없다. 아나톨리아 제국 하나뿐이다. 바로 내가 공화국의 팔다리를 교묘하게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볼프람 하델베르크 외무상서에게 있어 나는 불구대천의 원수나 다름없으리라.

……나란 인간은 명문가 태생에 20대 개국공신인 수재를 좌절시킨 것인가.

“공작 전하?”

볼프람 하델베르크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 잠깐 상념에 잠기고 말았다. 요새 눈앞에 상대를 두고도 종종 다른 생각에 빠지는 경우가 생겼다.

“미안합니다. 천재로 유명한 하델베르크 상서에게 칭찬을 받으니 조금 어색해서 말입니다.”

내가 쑥스럽다는 듯 미소를 그렸다.

“저는 개인적으로 저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수재는커녕 둔재로 자평하고 있지요.”

“공작 전하께서 둔재인 것입니까…….”

볼프람 하델베르크가 뭐라 표현하기 힘든 표정을 지었다. 이해했다. 자신보다 우월한 사람이 겸손한 태도를 보여주면 인간은 당혹스럽고 화나기 마련이었다. 왜냐하면 상대방에게 되받아쳐줄 방법이 없으므로.

내가 조곤조곤 타이르듯이 말했다.

“저의 처지를 이해해주십시오, 상서. 귀국에는 천재가 지나치게 많지 않습니까. 통령 각하는 물론이고 비텐마이어 막료총감, 슐라이어마허 정보부장, 거기에다 경까지. 방심은 절대로 금물이지요. 여러분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저를 의식적으로 과소평가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

볼프람 하델베르크가 잠깐이지만 숨을 멈추었다.

방금 나는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를 정보부장으로 칭했다. 이건 외부인이 결코 알아서는 안 될 극비사항이었다. 슐라이어마허의 공식 직함은 근위대 사령관이지 정보부장이 아니었다.

상대방 입장에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겠지. 얼굴 표정이 변하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했다.

“저희를 상대하다니 과한 말씀입니다. 어찌 소국에 불과한 저희 공화국이 존귀하신 공작 전하를, 더 나아가 이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제국을 감히 상대할 수나 있겠습니까?”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좋습니다.”

내가 홍차를 홀짝거렸다. 진정제가 들어간 홍차였다. 지금은 의족으로 대체된 왼쪽 다리가 이따금씩 미친 듯이 가려웠는데, 그걸 가라앉히려고 제레미한테 진정제를 처방받았다. 향이 꽤 좋아서 개인적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저는 온 세상을 통틀어서 오직 귀국만이 우리 제국의 앞날을 가로막을 자격이 있다고, 마음 속 깊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부디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전하.”

볼프람 하델베르크가 벌떡 일어서더니 방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안쓰러울 정도로 처량한 얼굴로 고했다.

“저희는 절대로 제국을 거스를 뜻이 없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소인의 알량한 말을 믿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소국이 강국을 상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것도 국경이 접한 상태에서 적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믿어주십시오.”

“국익을 위해서라면 자존심 따위는 단숨에 버리는군요. 그대와 같은 사람이 통령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는 이상, 공화국은 계속해서 성세를 누리겠지요.”

“…….”

볼프람 하델베르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일국의 외무상서가 갑작스레 무릎을 꿇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태연했다. 무슨 말을 들어도 공화국을 경계하겠다는 내 태도는 바윗돌처럼 확고부동했다.

“어째서 저희를 그리 경계하시는 것입니까? 저희는 삼면이 제국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헬베티카 연방까지 고려하자면 사실상 사면이 포위된 셈입니다. 제국의 온정에 기대지 아니하면 생존할 수조차 없는 소국, 그것이 저희 공화국입니다.”

“그렇지만 남쪽으로 사르데냐 왕국과 혈맹을 맺고 있었지요. 사르데냐가 흔들리자 곧바로 다음 동맹국으로 아나톨리아 제국을 끌어들였습니다. 가히 절묘한 외교력입니다.”

“약소국이 생존하기 위해 처절히 발버둥치는 것에 불과합니다!”

볼프람 하델베르크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신기한 광경이 집무실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공화국의 외무상서는 필사적으로 자국을 깎아내리는 반면, 적대국의 법무상인 내가 공화국을 추켜세웠다.

“그 증거로 지난 국화전쟁에서, 저희 통령은 결코 제국군과 맞서 싸우지 않았습니다. 만일 저희가 제국에 역심을 품고 있었다면 어찌 그러했겠습니까?”

“어차피 사르데냐는 전 국토가 유린된 상황이었지요. 썩은 동앗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르데냐를 버리는 대신, 새로이 아나톨리아 제국을 선택한다……전략적으로 냉철하고 정확한 판단이지 않습니까.”

내가 미소를 지었다.

“통령은 그때 군단을 이끄느라 바빴지요. 하델베르크 상서. 경이 통령을 대신하여 아나톨리아 제국과 교섭했겠지요. 훌륭합니다. 결과적으로 공화국은 과거의 동맹국보다 훨씬 더 강대한 국가를 우방으로 만들었습니다. 잃어버린 것 하나 없이.”

정말로 훌륭했다. 공화국이 아나톨리아에게 건네준 것은 베네치아였다. 이 풍요로운 도시는 그러나 공화국의 영토가 아니라 사르데냐의 영토였다. 즉, 공화국은 자기네 땅도 아니고 다른 나라의 땅을 가지고 외교적인 거래를 이루어냈다.

감탄스러울 정도로 뻔뻔하고 솜씨가 좋았다. 엘리자베트의 실력에는 언제나 놀랄 따름이었다. 꼭 본받고 싶었다.

“저, 전하. 어찌해야 저희의 진심을 알아주실 것입니까?”

“진심이라니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귀국의 진심을 저만큼 잘 알아주는 사람이 대륙에 달리 없다고 자부합니다만.”

그렇군요, 하고 내가 턱을 쓰다듬었다.

“국경지대에 빼곡하게 건설해둔 요새들을 모조리 철거하십시오. 베네치아에 주둔하고 있는 아나톨리아의 용병 군단을 해체하십시오. 그리고 공화국의 정규군을 항상 5천 이하로 유지하십시오. 이 정도면 귀국을 조금은 믿을 수 있겠군요.”

“그건……현실성이 없는 조건입니다! 부디 관용을 베풀어주십시오!”

볼프람 하델베르크가 머리를 바닥에 세게 찍었다. 소리가 제법 크게 울릴 정도였다. 카펫이 깔려 있으니까 통증이야 없겠으나 머리를 조아리는 광경 자체가 처절했다.

내가 물끄러미 하델베르크를 내려다보았다.

“귀국은 크게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전하……?”

“귀국에 망명을 신청한 제 양녀. 제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녀를 다름 아니라 저의 후계자로 선택했다고 생각합니까.”

볼프람 하델베르크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무슨 소리인지 당최 모르겠다는 분위기였다. 역시 눈앞의 남자도 연기에 도가 튼 인물이었다. 내 마음속의 경계심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무슨 말씀인지 소인은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그저 제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이라고 여기십시오. 제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 하는 인간이 바로 귀국의 통령과 제 양녀입니다. 만약 귀국에서 진정으로 우리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면, 제 양녀가 망명을 신청한 즉시 제국으로 되돌려 보냈어야 합니다.”

“전하. 소인은 정말로…….”

내가 찻잔을 거꾸로 집어들었다.

붉은 홍찻물이 바닥에 주르륵 떨어졌다. 내 무례한 짓거리에 볼프람 하델베르크가 할 말을 잃었다.

“그대는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델베르크 상서. 그대는 우리 제국에 방문한 것 자체로 이미 모든 임무를 끝마쳤습니다.”

처음으로 볼프람 하델베르크의 얼굴에 진심으로 당혹스러워 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예?”

“제가 양녀의 행방을 파악했다는 사실을, 귀국의 통령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습니다.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가 시체 인형이라는 것도 이미 옛날부터 직감하고 있었을 겁니다. 통령에게는 새삼스러운 정보도 아니었겠지요.”

상대방의 눈이 흔들렸다. 이쪽에서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그런데도 구태여 통령은 그대를 사신으로 보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

“통령은 저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을 벌일 것인지 말 것인지.”

내가 한층 미소를 짙게 머금었다.

가령, 하델베르크가 황제를 접견하도록 내버려둔다. 이때 이바르의 인형을 써서 상대방을 속인다. 공화국은 아무런 트집도 잡지 못하고 무력하게 물러난다. 평화로운 해결책이다.

단, 이 경우에 엘리자베트는 틀림없이 바르바토스와 데이지를 죽여버린다. 당연하다. 이쪽의 트집을 잡는 데 써먹을 수 없는 이상, 바르바토스와 데이지는 쓸데없이 위험한 폭탄물에 불과하다.

나에게는 엘리자베트의 목소리가 마치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 단탈리안이여. 그대도 알다시피, 본인에게는 바르바토스와 그대의 양녀가 있다. 황제가 시체 인형이라는 사실을 공표하겠는가? 공표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그 경우에 두 사람은 죽는다.

요컨대 협박.

볼프람 하델베르크 자체가, 통령과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언어로 쓰인 협박편지였다.

물론 하델베르크 본인은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알려주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통령과 나의 꼭두각시로 이용되어서야 마냥 불쌍하지 않은가.

“당신은 오늘 저녁에 황제 폐하를 접견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티팩트든 뭐든 마음껏 사용하세요. 그리고 황제가 시체 인형이라는 사실을 통령에게 전하십시오.”

“…….”

전쟁을 벌여볼 테면 벌여봐라. 그런 답신이었다.

선제후 마왕들은 이미 내가 설득해두었다. 벌써 며칠 전부터 용병들을 소집하기 시작했다. 이참에 다시 한번 전쟁에 돌입해도 상관없었다. 명분도 충분했다. 제국에서 일어난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서 용병을 모집한다고 둘러대면 주변국에서 의심할 일도 사라졌다.

엘리자베트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이대로 바르바토스와 데이지를 얌전히 우리한테 돌려주든가.

아니면 황제가 시체 인형임을 대대적으로 폭로하면서 전쟁에 돌입하든가.

후자의 경우, 우리쪽에서는 공화국의 주장을 전적으로 부정한다. 오히려 공화국이 바르바토스를 납치했음을 폭로함으로써 맞싸움에 들어간다. 서로가 서로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진흙탕 싸움에 뛰어드는 것이다.

완전한 복종이냐. 혹은 완전한 대결이냐.

나는 어느 쪽이라도 환영했다. 엘리자베트가 바라는 대로 대응해주면 그만이었다. 바르바토스와 데이지가 반송되면? 공개처형식을 한번 더 열어재낀다. 별로 수고로운 일도 아니다.

폭로전 양상, 맞불 싸움이 되어버린다면――압도적인 전력으로 밀어버린다.

헬베티카 용병은 물론이고 온 대륙에서 병사들을 사들인다. 아나톨리아 제국이든 뭐든 마음대로 공화국을 후원해라. 합스부르크 제국도, 프랑크 제국도 나의 앞길을 막지 못했다. 아나톨리아라고 다를 바가 있겠는가.

“혹시나 몰라서 말씀드리자면 그쪽에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제국은 귀국과 전면전에 돌입할 것입니다. 단순한 양자택일이지요.”

“…….”

“모쪼록 통령과 깊이 상의하고 답신을 보내주십시오.”

볼프람 하델베르크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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