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52화 (452/510)
  • 00452 DANTALI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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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야만적으로 취조를 해대다니, 공화국 놈들……!”

    루크가 씩씩거리면서 복도를 걸어갔다. 지금 막, 루크와 나는 공화국 정보부에서 풀려난 참이었다. 루크는 정보부원들의 횡포에 상당히 마음이 상한 것 같았다. 내가 기복이 없는 목소리로 루크를 달랬다.

    “적어도 폭력은 쓰지 않았잖아. 그 나름대로 신사적인 대응이야.”

    “하지만 진실의 마법에다 약물까지 썼어! 이건 우리를 망명자로 대접하는 게 아니야. 대놓고 간첩으로 취급하는 거지!”

    루크가 주먹으로 벽을 쿵, 하고 쳤다. 튼튼하게 지어진 돌벽이 움푹 파이면서 돌가루를 떨어트렸다. 루크의 눈동자가 분노로 번들거렸다.

    “나는 그렇다 쳐도 데이지, 너는 커스토스 공작가의 유일무이한 공녀야. 단탈리안 대부께서 세바스토크라토르의 양자로 들어가시면 너는 제국 황위의 계승권자가 된다고! 정성스럽게 모시지는 못할망정 감히……!”

    “괜찮아.”

    루크의 심정은 이해가 되었다. 이번 취조에서 정보부원들은 나 한 명만을 집중적으로 심문했다. 나는 이곳에 와서 반쯤 의도적으로 루크를 마치 시종 다루듯이 대했는데, 이 때문에 정보부는 루크의 중요성을 나에 비해 한참 낮게 평가했다. 타당한 취급이라 봐도 좋았다.

    우리 남매는 공화국의 수도 무니헨에 도착하자마자 감금당했다. 밤새도록 취조가 이어진데다 거기에 더해서 한나절이나 독방에 투옥되었다.

    아마 한나절은 내 증언을 검토하는 데 걸린 시간이겠지. 우리가 풀려났다는 것은 달리 말해, 공화국에서 마왕성의 비밀통로를 직접 확인했다는 얘기이다. 과연 공화국이었다. 행동이 매우 빨랐다. 아니, 여기서는 통령이라는 여자를 높이 평가해야 할까…….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

    스스로 성씨를 버려서 단지 엘리자베트로 불리기를 원한다는 이 권력자는, 초면부터 내 눈에 거슬렸다. 우리가 경비대장을 붙잡아서 인질극을 벌이자 그녀는 잠옷 차림에 망토만 달랑 두른 채 걸어나왔다.

    보는 사람의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합스부르크 황실의 핏줄을 증명하는 은빛 머리카락. 올곧게 등을 펴고 턱을 들어올린 채, 엘리자베트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단탈리안의 시종이라 했는가.’

    한겨울이 연상되는 목소리였다. 차갑지만 매혹적이었다. 나는 원래 그녀를 만나면 저자세로 공손하게 나가려고 했다. 그렇지만 실물을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저 여자는 불경스럽게도 아버님을 '단탈리안'이라고 경칭을 생략한 채 불렀다.

    내 아버님이 당신의 친구라도 된다는 말인가. 조금 불쾌했다. 나는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고귀하신 커스토스 공작 전하의 딸, 데이지 폰 커스토스입니다.’

    ‘커스토스? 설마 단탈리안은 자신의 내궁에서 그리 불리더냐?’

    ‘통령께서 공작 전하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으신 줄 미처 몰랐습니다. 제가 통령께 들려드릴 얘기거리가 많은 것 같아서 기쁩니다.’

    엘리자베트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뭐, 상관없겠지. 그대가 불리기를 원하는 그대로 불러주겠다. 커스토스의 공녀여. 이 야심한 밤에 우리 공화국의 수도에 침입하여 행패를 부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조를 보건대 상대방도 첫눈에 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몇 번의 시선과 몇 개의 문장을 나누었을 뿐이지만 벌써부터 상대방이 얼마나 지독하게 집요한 성격인지 어느 정도 파악했다.

    먼저 저 여자는 죽어도 나를 '단탈리안의 딸'이라든지 '단탈리안의 여식'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미 정보부를 통해서 내가 데이지 폰 커스토스와 인상착의가 똑같음을 확인했을 텐데도.

    다시 말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저 여자는 내가 아버님과 매우 친밀한 사이임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망국의 황녀 주제도 모르고 아버님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버님은 필요 이상으로 눈앞의 여인에게 집착했다. 정반대로 통령이 아버님에게 집착한다고 해도 놀라울 것은 없었다. 문제는 눈높이의 차이였다. 아무래도 상대방은 아버님을 자신과 동격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조금 머리가 나쁘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조금 콧대를 눌러줄 필요가 있었다.

    나는 말없이 경비대장을 풀어주었다. 내 칼날이 경비대장의 목에서 떨어지자, 경비대장은 허겁지겁 저쪽을 향해서 도망쳤다. 그 모습을 보고 엘리자베트 통령이 눈썹을 까딱거렸다.

    ‘호오. 자발적으로 인질을 풀어주어도 괜찮겠느냐.’

    ‘어차피 통령 각하를 뵙기 위해서 잡은 인질입니다. 저의 일차적인 목적은 이미 달성되었습니다. 오래 붙잡고 있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

    엘리자베트 통령이 팔짱을 끼었다.

    ‘커스토스의 공녀여. 지금 일곱 명의 검주(劍主)가 그대를 몰래 포위하고 있다. 인질이 풀려난 이상 우리가 공격을 자제할 이유 또한 사라졌노라. 지나치게 오만한 것 아닌가?’

    ‘일곱 명이 아니라 아홉 명이겠지요.’

    ‘…….’

    주위의 공기가 갑자기 흉흉해졌다.

    통령을 빈틈없이 호위하고 있는 무사들이 이쪽을 향해 반발자국 내딛었다.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일곱 명의 검주 이외에 철저하게 은신하고 있는 나머지 두 명까지 간파당한 것이었다. 내가 아무리 못해도 검주 이상의 실력자라는 사실을 저쪽도 알아차렸다.

    분위기가 달라지는 지금이 기회였다.

    나는 대검을 칼집에 집어넣은 다음에 고했다.

    ‘저는 공작가의 후계자로서 모든 마왕을 통틀어서 가장 강대한 마왕 바알을 참하였고, 마왕 아가레스를 포로로 사로잡았으며, 프랑크 제국의 대리장군인 가스파르 드 타바느 원수에게 명예로운 결투로 죽음을 내렸습니다. 이제 저는 귀국에 망명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제대로 정치적 망명자로 대접하라는 얘기였다.

    병사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읊은 전공이 워낙에 압도적인 탓이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 생각하건대, 아버님이 내게 마왕들을 참하도록 명령한 것은 먼 훗날을 위해 안배해둔 것이기도 했다. 아버님은 경우에 따라 나를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제로 내세울 계획이었다.

    마왕의 양녀인 내가 황제로 등극하면 주변국은 물론이고 인민들이 거세게 항의하겠지. 아무리 인간이라 해도 어떻게 마왕의 여식을 황제로 떠받드느냐,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 하고.

    그때 내 전공이 빛을 발한다. 서열 제1위의 마왕과 서열 제2위의 마왕을 잡은 인간. 이걸 대대적으로 과시하면 반발이 크게 적어진다. 오히려 마족과 인간, 양쪽에 공평한 황제라는 인상을 심어줄지도 모른다…….

    아버님은 때때로 자기 자신을 거미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정말 정확한 비유였다.

    사방에 거미줄을 뿌려놓음으로써 만전을 기한다. 미래가 어떤 방식으로 흘러갈지라도 대응할 수 있도록, 모든 가능성을 준비해둔다……아버님 이외의 모든 인물은 단지 거미줄에 사로잡혀 무기력하게 아사해가는 사냥감에 불과하다.

    당신도 예외가 아니다,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 아버님에게 경의를 표해라. 나는 통령의 눈을 올곧게 쳐다보았다.

    잠시 뒤, 통령이 입술을 열었다.

    ‘공화국은 출신을 묻지 않고 인민을 받아들인다. 진정으로 망명을 바란다면 아국은 기꺼이 그대를 환영한다. 허나 모종의 절차가 필요함은 그대 또한 알고 있을 터.’

    ‘물론입니다.’

    ‘제군. 모처럼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성심성의껏 대접하도록.’

    엘리자베트 통령이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이 한도 끝도 없는 취조였다.

    정보부 요원들이 둘러싸서 수백 가지의 질문을 퍼부었다. 전원이 극도로 숙련된 전문가였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이 대륙에서 제일가는 정보망을 보유하고 있다는 소문은 헛소리가 아니었다. 하긴, 독재가 철저히 이루어질수록 정보부 같은 곳이 융성하기 마련이었다.

    질문을 폭포처럼 쏟아부어서 내 정신을 흐트러트릴 의도였을까. 미안하지만, 내게는 통하지 않았다. 언젠가 아버님은 훈련을 빙자하여 내게 보름 내내 쉴 새 없이 고문을 가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나는 정신을 유지했다.

    ‘정말로 단탈리안을 배신했습니까?’

    ‘이때 단탈리안은 서열 제71위인 마왕을 가리킵니다. 그를 배신한 것이 사실입니까?’

    정보부 요원들이 저들 나름대로 논리를 만들어서 추궁해왔다. 아버님의 무시무시한 '수업'에 비교하자면 이런 건 어린애 장난에 불과했다.

    조금 심심해서 오히려 이쪽에서 질문들을 역으로 이용해주었다. 그 결과, 바르바토스는 정보부에서 감시하는 대신 어디까지나 내 관할 아래 놓였다. 지금쯤 통령의 개들은 자기네가 '최선의 결과'를 도출했노라고 자화자찬하고 있겠지.

    엘리자베트는 실로 나를 성심성의껏 대접해주었다. 그래서 나도 정성껏 그녀의 부하들을 요리해주었다. 나로서는 잘못한 게 하나 없었다.

    아마도 엘리자베트 통령은 나를 끝까지 의심할 테지만, 일단 정보부의 시험을 통과했다는 것만으로도 내 목적은 일차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루크와 다르게 정작 내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이래 놓고 어디 허름한 방구석에 감금해봐. 내가 난리를 칠 거니까.”

    루크가 씩씩거리면서 복도 끝자락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정보부 건물의 지하에 마련된 곳이었다. 우리는 이제부터 허락 없이 여기서 빠져나가면 안 되었다.

    방은 꽤 넓었다. 정중앙에는 바르바토스가 반(反)마법 사슬에 온몸이 묶인 채로 매달려 있었는데, 매우 강력한 마취제가 투입된 탓인지 기절해 있었다. 그것만 제외하면 왕실처럼 호화스러운 방이었다.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네.”

    루크가 얼굴을 찡그렸다. 마지못해서 봐준다는 느낌이었다.

    아버님을 배신하고 타국의 정보부에 감금당하다시피 생활하게 되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루크는 태평했다. 대담한 것일까 아니면 생각이 없는 것일까. 여동생인 내가 아무리 우호적으로 생각해봐도 루크는 후자에 가까웠다.

    나는 침대를 향해서 걸어갔다. 등 뒤로 루크가 말했다.

    “어? 바로 잘려고?”

    “아마 몇 시간 안에 통령이 다시 호출할 거야. 그때까지 눈을 붙여두게.”

    나는 침대에 누워서 고슴도치처럼 안으로 파고들었다. 정보부에서 보낸 이틀이 알게 모르게 내 신체에 피로를 강요했을 터. 이렇게 기회가 생길 때마다 열심히 몸의 피로를 풀어주어야 했다.

    천천히 잠이 몰려왔다. 나는 언제 어디서도 잠이 들 수 있었다. 이것 역시 아버님의 수업 때문이었다. 아버님은 심심찮게 '보름 동안 자지 말고 버텨라'라든지, '10분 쪽잠 이외에 허락하지 않겠다'라든지, 극한의 고통을 버텨내야 하는 과제를 내렸다.

    그 훈련들이 쌓여서 지금의 내가 이곳에 있었다.

    당장 아버님이 곁에 없을지라도, 아버님은 내 몸안에 확실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내 머릿속에 어떤 광경이 떠올랐다. 아버님이 내게 입술을 맞춘 그날의 광경이었다. 아버님의 눈썹 숫자, 입술의 부드러움과 온도, 모든 것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나는 내 입술을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

    조금 곤란했다.

    아버님의 입맞춤을 상상하니까 몸이 아주 약간 뜨거워졌다.

    하지만 인내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엔 루크가 있을뿐더러 사방에 메모리아 아티팩트가 깔려 있었다. 여기서 손장난을 쳐버리면 곧장 엘리자베트 통령에게도 보고가 들어갈 것이었다.

    ……참자.

    나는 의식적으로 아버님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잠이 들 때마다 아버님을 생각하면서 위로하던 것이 이미 오랜 버릇이 되어버린 터라, 나는 나 자신의 습관에 대항하여 처절하게 맞서 싸워야만 했다.

    결국 내가 잠이 든 것은 세 시간 뒤. 그동안 루크는 반대편 침대에서 벌써 잠이 들어버리고 신나게 코를 골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음 취조에서는 엘리자베트 통령에게 1인실을 요구해야겠다. 꼭 메모리아 아티팩트가 깔리지 않은 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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