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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451화 (451/510)

00451 DANTALIAN  =========================================================================

“…….”

마왕들이 입을 다물었다. 내 제안이 비상식적으로 들렸기 때문이겠지.

표정이 조금도 변하지 않는 마왕은 단 한 사람. 가미긴뿐이었다. 그녀만은 지그시 나를 바라보았다. 이중에서 실질적으로 나와 함께 '시나리오'를 짜본 사람은 가미긴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마르바스, 바싸고, 시트리. 세 사람은 나와 언제나 내 시나리오에서 조연을 맡아왔다. 단 한 번도 나와 머리를 함께 맞대고 극본을 써나간 적이 없었다. 그저 내가 미리 만들어둔 시나리오에 따라 참여했을 따름이었다…….

“단탈리안. 그게 무슨 소리인가. 공화국이 황제의 실상을 알아채도록 방관하자니?”

즉.

엄밀히 말해서 이번이 첫경험.

여태까지 바르바토스의 그늘에 반쯤 가려져서 은밀하게 행동했던 내가――마왕들에게 직접 나의 입으로, 나의 얼굴로, 나의 몸짓으로 온갖 음모와 계획을 설명하게 되었다.

“동지 여러분. 이제부터 제가 말씀드리는 계획을 단계별로 경청해주십시오.”

달리 말하자면, 지금껏 무대에서 열연을 펼쳐온 배우들은 처음으로 장막 뒤쪽에서 무슨 모의가 오갔는지 깨닫는다. 단지 완성된 극본을 받아보는 것이 아니라, 극본이 완성되어가는 과정 자체를 목격한다.

“우리는 공화국 통령의 입장에서 생각해봐야만 합니다.”

“통령의 입장에서?”

“예. 통령은 결코 쉽사리 제 딸아이를 신뢰할 수 없습니다. 제아무리 반역자라지만 마왕의 양녀입니다. 혹시 이중간첩은 아닌가. 거짓으로 배신해서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 아닌가. 통령은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엘리자베트는 나를 인세의 악마로 취급했다.

내 영지에 풀린 공화국 첩자만 스무 명이 넘었다. 이것도 신원이 파악된 첩자들에 한정되었다. 비밀리에 활동하는 요원까지 합치면 그보다 두 배는 많겠지. 고작 하나의 도시에다 간자를 수십 명이나 풀어놓은 것이었다.

엘리자베트는 언제나 이쪽을 경계하고 또 경계했다. 그런데 별안간 단탈리안의 양녀가 망명한다고?

의심하지 않을 리 없다. 아니, 단언해도 좋았다.

――엘리자베트는 절대로 데이지를 신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엘리자베트는 나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으므로.

설마 나 정도 되는 인간이 '양녀의 반란' 따위를 허용할 만큼 허술하리라고는,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믿지 않는다. 데이지가 믿음의 증거를 확실하게 보여주면 보여줄수록 도리어 엘리자베트는 의심하겠지.

이건 나도 똑같았다. 갑자기 엘리자베트의 충복이 배신해서 나한테 와본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배신자를 믿을 리가 없지 않은가. 엘리자베트와 같은 괴물이 측근의 이탈을 용납한다――이건 그냥 단순히 실현 불가능한 상상이었다.

어떤 의미로, 엘리자베트와 나는 누구보다 서로를 신뢰하고 있었다.

“제 양녀는 필사적으로 통령의 믿음을 쌓으려고 노력할 겁니다. 루돌프 황제가 꼭두각시 시체라는 정보는 지나치게 거대합니다. 처음에는 작은 정보들부터 차근차근 흘리면서 자신의 신뢰도를 높이려 들겠지요.”

바로 이 작은 정보가 내 마왕성의 비밀통로였다.

나는 찬찬히 선제후 마왕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

모두들 표정이 영 시원치 않았다. 당연했다. 지금 나는 마치 엘리자베트와 데이지에 대해 전부 파악했다는 것처럼, 두 사람의 성격과 미래를 모조리 알았다는 것처럼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리 자신할 수 있는가. 무슨 보장으로 당신이 말하는 대로 미래가 흘러가리라 확신하는가. 다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저마다 약간씩은 말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럴 수밖에 없었다.

벌써 십 년에 가깝도록 그 두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았으니까.

뭐, 엘리자베트가 얼마나 위험한지 설명해본들 아무도 수긍해주지 않을 거다. 마왕들 입장에서 엘리자베트는 그저 망국의 마지막 후계자. 경계할 필요는 있을지언정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딱 그 정도 인물에 불과했다.

엘리자베트가 사실상 마왕군 전체에 맞서서 지금까지 공화국을 유지시킨 것만 해도 얼마나 대단한 과업인지, 마왕들은 인지하지 못했다.

하긴 내 잘못도 컸다. 엘리자베트가 마왕군에 조금이라도 수작을 걸려고 하면 내가 그걸 막았으니 말이다…….

솔직히 조금 억울하군. 왜 나 혼자만 엘리자베트를 신경 써야 하는가. 언제나 고생하는 역할은 내가 떠맡았다. 게다가 알아주는 사람도 적었다. 이래저래 손해보는 점밖에 없었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이 '체스판'에 엘리자베트와 나만이 참여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너무 우울해할 필요는 없으리라.

“앞으로 이틀. 아무리 길어도 이틀 안에 공화국 첩자들이 제 마왕성의 비밀통로에 난입할 것입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우리는 바르바토스가 어디로 납치되었는지, 통령의 행보가 어떻게 될지, 한꺼번에 유추할 수 있게 됩니다.”

*  *  *

침입조가 단탈리안의 마왕성에 돌입한 지 오 분이 흘렀다. 엘리자베트 통령은 수정구를 통해서 침입조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 이 통로, 만들어진 지 적어도 오 년이 지났습니다.

─ 급하게 지어진 통로는 아니로군. 이런 곳이 숨겨져 있었나……그야말로 등잔 밑이 어두웠어.

침입대원들이 두런두런 대화하는 목소리가 전달되었다. 비밀통로는 무척 어두워서, 수정구에서 투영하는 영상도 어두컴컴하기 그지없었다. 엘리자베트는 그걸 무표정하게 쳐다보았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옆자리에서 말했다.

“소녀가 말한 대로 확실히 비밀통로는 있었군요.”

“흐음.”

엘리자베트가 뿔잔에 담긴 포도주를 마셨다. 거의 식초에 가까운 저질 포도주였다. 본래 엘리자베트는 어린 시절부터 미주(美酒)를 사랑했지만, 통령이 된 이후 개인적으로 마시는 술은 모조리 하등품, 가난한 농민들이나 즐길 법한 물건으로 바꾸었다.

“문제는 단탈리안이 어디까지 상황을 통제하고 있느냐이다. 우리가 비밀통로로 침입해 들어갈 것이라는 사실쯤은 이미 단탈리안도 예상하고 있겠지.”

“예?”

쿠르츠가 입에서 유리잔을 때고 의아해했다. 자신의 군주이자 일국의 지도자인 엘리자베트가 저질 포도주를 마시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쿠르츠는 아무렇지도 않게 최고급 술을 만끽하고 있었다.

“어제 진실의 마법을 동원해서 녀석을 검문해보지 않았습니까. 자기가 배신한 건 절대로 단탈리안의 의도가 아니라고 증언하는 데서 진실 판정이 나왔습니다만……. 어떻게 단탈리안이 우리의 행동을 예측하겠습니까?”

“본인은 진실의 마법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엘리자베트가 차갑게 일축했다.

“어차피 심장의 박동과 관상학에 의거해서 작동하는 마법. 신뢰성은 잘해봐야 오 할에 불과하다. 본인은 데이지라는 아이가 심장이 뛰는 속도를 정교하게 조종할 수 있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게야.”

“통령님. 어제 밤새도록 추궁해낸 질문만 칠백여든 개입니다?”

쿠르츠가 작게 웃었다.

“그야 한두 번의 질문을 속이는 거야 훈련받은 첩보원에겐 식은 죽 먹기입죠. 하지만 쉰 개의 질문, 백 개의 질문, 오백 개의 질문을 모조리 회피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지난 밤, 공화국의 정보국은 그야말로 성대하게 '손님'을 대접했다.

첩보에 몸을 담은 지 수십 년이 넘어가는 베테랑들이 총동원되어서 열여섯 살짜리 소녀. 데이지 폰 커스토스를 집단적으로 추궁했다. 주먹이 오가지는 않았지만, 열몇 시간 내내 쉴 새 없이 이어진 추궁은 이미 신체적인 폭력을 아득하게 뛰어넘은 폭거였다.

칠백여든 개의 질문은 단순히 줄줄이 나열된 질문의 집합이 아니었다. 질문 하나하나가 마치 그물처럼 정교하고 촘촘하게 엮여 있었다.

비록 엘리자베트 통령 말마따마 진실의 마법이 만능은 아닐지라도, 물경 칠백여든 개의 질문. 이 정도라면 마법의 약점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장난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설마 이제 열여섯밖에 안 된 꼬맹이가 칠백 개의 질문을 전부 속였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통령 각하. 하하.”

“…….”

엘리자베트가 침묵했다.

상대방이 갑자기 입을 다물어버리자 졸지에 쿠르츠는 머쓱해졌다. 어떻게 다시 말을 붙여볼까 하던 차,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고블린이다! 스무 마리는 되는걸!

─ 모두 침착하게 대응하도록. 진형을 무너트리지 않으면 고블린쯤이야 간단하다.

쿠르츠의 눈매가 다소 가늘어졌다. 다행히도 화제거리를 찾느라 머리를 굴릴 필요는 사라졌다.

“역시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네요. 뭐, 비밀통로라고 해도 최소한의 방비는 해두는 게 상식이죠. 하지만 고블린이라니. 조금 어설프지 않을까 합니다.”

“끝났군.”

“네?”

엘리자베트가 여전히 무심한 눈길로 말했다.

“단탈리안이 비밀통로에 고블린 따위를 배치했을 리 없다. 저곳이 뚫리면 단번에 마왕성의 9층이 함락되는 것이다. 만약 경비병을 세워둔다면 당연히 강대한 마족을 배치하겠지. 저건 속임수다.”

엘리자베트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그 순간이었다. 수정구에서 다급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 크하아아악!

─ 무슨 일이야!?

─ 지옥거미다! 제기랄, 천장에 지옥거미들이 매복해 있었어! 전원, 전투대형을 방진으로 바꿔서 방어한다!

대원들이 어떻게든 침착하게 대응하려고 했으나, 비명은 끊이지 않고 점차 거세졌다. 대형 거미뿐만이 아니라 바위로 위장하고 있던 골렘들까지 나타나서 그들을 덮쳤다. 수정구에 비춘 비밀통로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엘리자베트가 높낮이 없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고블린을 보여준 다음 복병들로 기습한다. 효과적인 전술이지만, 적군이 다가온다고 미리 예상하지 않았다면 실현시킬 수 없는 전술이기도 하다.”

“우리가 첩보부대를 보내리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음.”

수정구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열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부대원은 어느덧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수십 개체의 마물이 마지막 생존자를 둘러쌌다. 남자는 동굴바닥에 도끼를 떨어트렸다.

─ 사,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제발 살려…….

푸욱, 하고 육신이 난도질당하는 소리가 생생하게 울렸다.

이후로는 마물이 시체를 물어뜯는 잡음만이 이어졌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바스라지는 소리가 끔찍하게 통령집무실에 흘렀다. 엘리자베트는 감흥이 없는 얼굴로 수정구의 영상을 꺼트렸다.

“대단하지 않은가.”

“무슨 말씀인지, 소인은 잘…….”

“단탈리안 말이다. 알아차리지 못했는가? 방금 단탈리안은 침입자들을 전부 죽여버렸다.”

엘리자베트가 쿠르츠를 슬쩍 쳐다보았다.

“포로를 잡을 필요조차 없다는 얘기다. 어느 누가 비밀통로를 알아내서 침입자들을 파견했는지 심문해야 마땅할 텐데, 그 과정을 당연하다는 듯 생략해버렸다. 이미 우리 공화국이 배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뜻이야.”

“…….”

엘리자베트는 손가락으로 옆머리를 천천히 꼬았다.

“본인은 이번에 전투력이 낮은 부대를 파견했다. 포로로 잡히기 쉽게 말이다. 하지만, 그런가. 역시나 벌써 알고 있었는가……일부러 사르데냐어를 쓸 줄 아는 대원들을 추려서 보냈건만 아무런 쓸모도 없었군. 뭐, 소득은 있었다. 단탈리안이 제대로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본전을 뽑았다.”

엘리자베트가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춤을 신청하는 것치고는 꽤나 과격하지 않은가. 이래서야 거절하고 싶어도 오기가 들어버리기 마련이지. 쿠르츠, 사절단을 준비해라. 두 번째 무도회를 개막할 시간이다.”

“예, 통령 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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