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50화 (450/510)
  • 00450 DANTALI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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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륙력 1513년 4월 초순.

    나는 다리를 한쪽 잃어버리고 바로 다음날 선제후 마왕들을 불러모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이제부터 대대적으로 전면전이 시작할 가능성이 높았다.

    엘리자베트는 기회를 놓칠 위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황제가 꼭두각시 시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걸 이용해먹지 않을 리 없었다. 틀림없이 적당한 명분을 노려서 외교적인 공세를 퍼부을 거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단순해졌다. 한 발자국 앞서서 대응하면 그만이었다.

    나는 접견실에 가장 먼저 도착하여 마왕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양손으로 지팡이를 만지작거리면서. 이 접견실은 대전(大殿)보다 훨씬 더 작은 방으로, 지금처럼 소수의 고위 마왕들끼리 회의를 나누는 데 제격이었다.

    사실상 밀실회의나 마찬가지였다. 대전과 달리 의자도 열 개 정도밖에 놓이지 않았다. 한동안 기다리자, 가장 먼저 바싸고가 접견실에 들어왔다. 바싸고가 방안을 둘러보더니 눈썹을 찡그렸다.

    “경비병은 어디로 사라진 것이냐. 아무도 없지 않나.”

    “오늘 이 자리에 경비병은 필요없습니다. 절대로 정보가 새어나가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시종도 한 명 없는 것은 조금 과한 것 아닌가? 회의 도중에 갈증이 나면 목이라도 축여야 할 것 아니냐.”

    내가 탁자에 올려진 와인병을 가리켰다. 알아서 마시라는 얘기였다. 바싸고는 질렸다는 듯 혀를 차더니, 내가 앉은 자리에서 가장 정반대로 멀리 떨어진 의자에 가서 앉았다.

    밀실회의가 열리기로 한 시간이 되려면 아직 30분이나 남았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착 가라앉은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이런 경우가 하도 많기 때문이었다.

    의외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인상에 어울린다고 해야 할지, 바싸고는 시간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는 성격이었다. 무슨 회의가 열릴 때마다 정확히 30분 일찍 도착했다. 나와 더불어서 모든 마왕들 중에 가장 일찍 회의장소에 오는 사람이었다. 참고로 회의에 가장 늦게 지각하는 마왕은 바르바토스였다…….

    “어제 처형당한 평원파 마왕들의 군대가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꽤나 대처가 빠르군요.”

    내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벌써부터 반란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여파가 거세졌는가. 일전에 무소속 마왕들이 숙청되었을 때와는 반응이 사뭇 달랐다. 그때는 반란군들이 마왕성에 틀어박혀서 반쯤 자멸하다시피 붕괴했다.

    하지만 평원파의 군대는 처형식이 이루어지고 단 하루 만에 봉기했다. 거의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재빠른 반응이었다. 이전부터 준비했다고 봐야 옳겠지. 평원파 마왕들이 잡혀들어간 바로 그 시점부터, 반란군은 이미 모반을 각오하고 있었다…….

    과연 전쟁에 익숙한 정예군단이었다. 평화에 찌들어 살았던 무소속 마왕들의 군대와 격이 달랐다.

    “별로 놀란 눈치가 아니로군.”

    바싸고가 내 얼굴을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자그마치 이만 명의 반란군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조금쯤 놀라거나 조급해하는 표정을 지어보는 것이 어떠냐.”

    “이래 봬도 감탄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팡이를 의자 턱걸이에 비스듬하게 내려두고, 품속에서 담뱃대를 꺼내들었다. 나는 담뱃대에 불을 지피면서 말했다.

    “무소속 마왕들이 숙청되었을 때 그들의 군대는 본거지에 틀어박히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실상 집단자살이나 다름없었지요. 저들이 구태여 마왕성에 스스로 고립된 까닭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반란을 일으켜봤자 마왕의 지배력에 대항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반란군이 1만 대군, 2만 대군을 끌어모아서 진군한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들을 지휘해줄 마왕이 부재했다.

    반면에 반란군을 진압하는 이쪽에는 마왕들이 기라성처럼 늘어서 있었다. 예컨대 마르바스와 가미긴, 두 사람이 ‘당장 공격을 멈춰라’ 하고 명령하기만 해도 반란군의 전투력은 급격하게 떨어졌다. 도저히 싸움이 안 되겠지.

    그렇기에 무소속 마왕들의 반란군은 차라리 명예롭게 자결하는 길을 골랐다. 현명한 짓인지 어리석은 짓인지 도통 감이 안 왔지만. 그만큼 군주를 잃어버린 마족들에게 있어 반란이란 지극히 어려운 선택지였다.

    “그런데도 평원파의 군단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전면전을 벌일 수 없는데도 대규모 반란을 획책했다……즉, 전면전이 아니라 유격전을 노린다는 얘기입니다. 반란군은 제국의 사방에 소규모 분대를 보내서 오래동안 분탕을 칠 속셈이겠지요.”

    “…….”

    바싸고가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어이가 없는 것 같은 얼굴, 어쩐지 질려버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

    “네놈. 혹시 반란군이 봉기했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하였느냐?”

    “지금 처음 들었습니다.”

    “본인의 말을 듣자마자 그런 생각부터 떠올랐다고?”

    내가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향기로운 냄새가 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지금은 약하게 연초를 즐기고 싶었기에 깊이 들이마시지 않고 입안에서만 천천히 향내를 굴렸다. 이건 이거 나름대로 풍미가 있어서 좋았다.

    “예.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

    “그보다 무려 이만 대군으로 이루어진 유격대라니. 이건 제법 골치가 썩히겠군요. 제가 예상한 것보다 오늘 회의가 더 길어지겠습니다.”

    바싸고는 다시 한 번 혀를 차면서 중얼거렸다. 너무 목소리가 작아서 뭐라고 말하는 것인지 들리지 않았다. 다만 불평이 가득 넘치는 어조인 것만은 확실했다.

    회의 시간이 가까워지자 선제후 마왕들이 한두 명씩 도착했다. 차례대로 가미긴, 시트리, 마르바스가 접견실에 들어와서 각자 편할 대로 의자를 골라 앉았다. 시트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내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단탈리안. 조금 더 휴식을 취하지 않아도 괜찮겠는가?”

    마르바스가 손수 유리잔에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나는 그걸 공손하게 받아들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 일신의 불편함보다 제국이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빠르게 대처할수록 좋습니다.”

    “허나 바르바토스가 어디로 납치당했는지 아직 모르지 않는가. 행선지를 모르는 이상에야 논의할 수 있는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내가 두 손으로 마르바스의 유리잔에 와인을 따랐다. 마르바스가 흠, 하고 무표정하게 술을 받았다. 나까지 포함하여 총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우리 최고위 마왕들은 가볍게 목을 축였다.

    “이미 들었을지 모르겠으나 평원파의 잔당이 군사를 일으켰다. 주군들의 억울한 죽음에 복수하겠다며 명분을 내세웠더군. 일단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주력하면서 바르바토스의 행방을 점쳐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마르바스의 말에 다른 선제후 마왕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되었든 지금은 정보가 너무나 부족했다. 바르바토스를 구할 것인지 혹은 내버려둘 것인지, 일단 어디로 납치되었는가 알지 못하는 이상 결정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바스의 제안은 정석에 가까웠다. 언제나 견실한 전략과 전술을 선호하는 마르바스의 성향은 이런 곳에서도 어김없이 반영되었다.

    하지만 그래서야 반발자국 늦어버린다.

    당신들은 엘리자베트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 엘리자베트는 정석만으로 대처해서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을 뛰어넘는다. 다른 사람들보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앞서서 뛰어가야 간신히 엘리자베트를 추월할 수 있다.

    내가 입을 열었다.

    “바르바토스는 합스부르크 공화국에 있습니다.”

    좌중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부끄럽게도 제 양녀는 우리 제국의 정보를 상세하게 알고 있습니다. 어느 국가로 망명해야 제국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지 또한 파악하고 있습니다.”

    나는 평소보다 편한 분위기로 얘기를 이어나갔다. 여기 모인 다섯 명은 관계가 복잡하게 뒤얽힌 정치적 수장들이었으나, 바로 그렇기에 오히려 편해지는 구석도 있었다.

    생각해봐라. 불과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72명의 마왕이 16명으로 줄어들었다. 인구가 감소되는 속도에도 정도가 있었다.

    이들은 치열하기 그지없는 살육의 경쟁에서 생존한 마왕들. 그중에서도 끝끝내 정점을 유지한 세력가들이었다. 겉으로야 어떻든 속으로는 서로가 서로의 역량을 인정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신경전으로 심력을 소모할 필요가 없었다.

    “음. 그런데 왜 하필 합스부르크 공화국인가?”

    “루돌프 황제 때문입니다. 바르바토스가 죽으면 주인을 잃은 루돌프 황제의 시체는 자연스럽게 괴사해버립니다. 그리고 황제가 죽을 경우에 제일 큰 이득을 볼 국가는 합스부르크 공화국입니다.”

    마르바스가 미간을 좁히고 신음했다.

    “과연……. 그러고보니 공화국의 군주는 확실히 루돌프 황제의 여동생인가. 루돌프 다음으로 유일하게 제위를 계승할 자격을 갖추고 있군.”

    역시 말귀가 빨라서 편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공화국의 통령은 상당히 유리한 패를 손에 넣는 것입니다. 바르바토스를 죽이기만 해도 황제가 사라지게 되니 이득을 보고, 운이 좋으면 우리 마왕군이 황제를 조종했다는 증거를 잡아내서 세상에 폭로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제국은 순식간에 공공연한 적이 되어버립니다.”

    바싸고가 코웃음을 쳤다. 나를 한껏 비아냥거리는 느낌이었다.

    “아주 대단한 인간종을 양녀로 두고 있었군, 단탈리안. 사자의 심장에 벌레란 이럴 때 써먹으라고 있는 말 아니더냐. 매사에 철두철미한 네놈이 그깟 인간종의 여아에게 빈틈을 보이다니.”

    “……감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내가 순순하게 머리를 숙였다.

    이것도 바싸고의 좋은 술책이었다. 나를 질책함으로써 바싸고는 자연스럽게 지금 여기에 모인 마왕들 중에서 가장 높은 권위를 얻었다. 마르바스가 회의를 주도하고 있는데도 분위기가 마르바스에게 집중되지 못하도록 말이다.

    “어라. 반역자에 대한 책임은 이만 묻어두기로 어제 얘기 전부 끝난 것 아니었어~?”

    그리고 약속한 것처럼 가미긴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제부터 어떻게 대응할지를 결정하는 자리로 알고 있었는데, 나는. 괜히 회의를 번거롭게 질질 끄는 건 딱 질색이니까 빨리 진행해주면 좋겠어.”

    “예. 이야기를 되돌리겠습니다.”

    내가 와인으로 혓바닥을 적셨다.

    “만일 제 추측이 올바르다면, 합스부르크 공화국에서는 조만간 사절단을 보내올 것입니다. 명분은 아무렇게나 만들어내겠지요. 교역을 늘리고 싶다느니, 친분을 강화하고 싶다느니, 되는 대로 떠들 겁니다.”

    사절단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을 터.

    “그리고 사절단은 루돌프 황제를 직접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할 게 분명합니다. 상대방이 정말로 살아 있는 인간인지, 아니면 소생술로 되살아난 시체인지 확인해보겠지요. 비밀리에 그런 검증이 가능한 아티팩트를 가져올 것입니다.”

    “음.”

    마르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컨대 공화국에서 사절단을 보내온다면 자네의 추측이 맞다는 걸 입증하는 셈이 되겠군.”

    “예, 확실합니다. 우리는 우선 황제의 대역을 준비해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흐응. 그럼 인형을 쓰면 되겠네.”

    가미긴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원래 인형으로 황제를 대신할 계획이었잖아. 그걸로 사절단을 속이면 되는 거 아니야?”

    “예. 인형을 대체해두면 사절단의 눈을 속일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본래 우리는 바르바토스를 사형한 이후, 이바르의 인형으로 황제를 대신할 예정이었다. 이바르가 심혈을 기울여서 제작한 꼭두각시 인형은 실제 인간과 구별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 패를 곧바로 꺼내들기에는 아까운 구석이 있었다.

    나는 허리를 낮게 숙여서 속삭였다.

    “사절단에게 황제의 시체를 마음껏 검증하도록 일단 내버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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