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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449화 (449/510)
  • 00449 DANTALIAN  =========================================================================

    “어찌되었든, 얘기는 일단락이 되었으니까. 어서 상처를 치료해야…….”

    시트리가 안절부절못하며 내게 다가왔다.

    시트리는 품안에서 유리병을 꺼내들었는데, 손가락을 심하게 더듬거린 탓에 그만 병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유리병이 바닥에 부닥치면서 와인색 액체가 엎질러졌다. 시트리가 어, 어, 하고 당황했다. 그녀는 다시 품속에서 포션병을 꺼냈지만 또 아래로 떨어졌다.

    “아. 어, 그러니까……그러니까…….”

    “옆으로 저리 비켜.”

    가미긴이 한숨을 쉬며 시트리와 나 사이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이래서 여차할 때 너 같은 아이는 도움이 안 되는 거야. 그런 심장으로 어떻게 병사들은 이끌었는지 모르겠네.”

    가미긴이 무릎을 꿇고 엎드린 다음, 자신의 드레스 치맛자락을 지이익 찢었다. 옷조각에 포션을 듬뿍 뿌리는 걸 보아하니 그걸 붕대로 삼으려는 것 같았다. 가미긴은 무심한 눈동자로 내 허벅지 절단면을 천조각으로 묶었다.

    “가만히 있어.”

    기껏 예쁘게 차려입고 온 고급 드레스가 핏물에 더러워졌다. 가미긴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단지 이런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한 지긋지긋함과 권태로움만이 눈가에 넘쳐났다.

    가미긴이 붕대를 꾸욱 단단하게 매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제나 싱글벙글 웃음기가 연하게 배어 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왜 내가 너보다 네 몸을 더 걱정해야 돼?”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가 네 몸을 걱정하지 않으면 누가 걱정하냐는 얘기야……아니, 됐어. 어차피 말해봐야 귓등으로 흘릴 게 뻔하지. 그래. 평생 외다리로 살아버려. 너한테는 그게 딱인걸.”

    가미긴이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피곤해졌어. 바르바토스 년이 얼마나 꼴사납게 죽을까 지켜보려고 왔는데 어디로 도망쳐버리지 않나, 열심히 변호해봤자 누구는 알아서 다리를 상납하지 않나. 인생 열심히 살아봤자 뭐하나 싶네. 잘들 알아서 해봐. 난 황궁에서 잠이나 잘 거니까.”

    가미긴이 연단에서 걸어나갔다. 찢어진 치마가 살랑거리면서 허벅지가 하얗게 드러났다. 가미긴을 따라다니는 두 명의 무소속 여마왕도 그녀를 뒤따랐다. 이대로 법정이 파장하는 분위기였다.

    “확실히 우리가 지금 논의할 수 있는 안건은 극히 적어 보이는군.”

    마르바스가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이만 해산할 것을 제안한다. 바르바토스에 대한 추격조는 이쪽에서 담당하겠다. 별다른 일이 생기면 곧바로 모여야 하니, 부디 그대들도 황궁에서 대기해주기를 부탁하네.”

    그리고 우리는 해산했다.

    나는 주변에 반마법이 풀리기를 기다렸다가, 시트리에게 부축을 받으면서 합스부르크 황궁으로 이동하였다. 재미난 점은 시트리나 나나 반신불수나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할 거야. 너희는 전부 물러나.”

    주변에서 시종들이 도와드리겠다며 달려들었으나 시트리가 한사코 자기가 부축할 거라고 고집을 부렸다.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겨우 며칠 전에 반죽음을 당한 부상자가 누구를 돕겠다는 것일까.

    사실 별로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시트리는 오른팔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고, 나는 왼발이 날아가버렸다. 시트리 입장에서는 나를 부축할래야 방향이 맞지 않아서 제대로 보조할 수가 없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무데서나 지팡이를 구해다주세요.”

    “하, 하지만…….”

    “보세요. 벌써 피도 멎었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내가 한참이나 다독거린 다음에야 시트리는 지팡이를 가져왔다. 목재에다 검은색으로 두껍게 옻칠한 지팡이였다. 아무리 봐도 대충 구해온 것치고는 고급스러운 물건이라서 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디서 이런 걸 가져왔습니까?”

    “마침 누가 이걸 짚고 다니길래 양해를 구하고 가져왔어. 헤헤.”

    “…….”

    그야 눈이 벌겋게 뒤집힌 마왕 시트리가 지팡이 좀 내놔, 라고 부탁하면 제아무리 담력이 강한 마족이라도 냉큼 상납할 수밖에 없겠지. 졸지에 소중한 사치품을 빼앗기게 된 익명의 마인한테 유감을 표한다.

    지팡이 덕분에 나는 그럭저럭 걸어갈 수 있었다. 몸의 균형이 상당히 낯설어서 살짝 심하게 절뚝거리긴 했다. 그때마다 시트리가 호들갑을 떨면서 내 몸을 받쳐주었는데, 얼굴 표정이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처럼 심각했다.

    “하아……후우, 하아…….”

    나는 도중에 한 번 숨이 차서 멈추었다. 다리 때문이라기보다 몸속에서 피가 한꺼번에 많이 빠져나가서 지친 것이었다. 두개골이 꽉 조여오는 것이 두통 기운마저 있었다. 한 걸음 내딛으면 복도 자체가 울렁거릴 것 같아서 도저히 더 걸어가기가 힘들었다.

    “잠시만……아주 조금만, 쉬어도 괜찮을까요.”

    “응, 단탈리안. 쉬자. 얼른 쉬자.”

    시트리가 허겁지겁 대답했다.

    나는 복도벽에 등을 기대고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시트리가 팔뚝을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단번에 엉덩이가 떨어졌으리라.

    “후욱, 하아……후으…….”

    호흡이 가빴다. 마치 가슴 부근만 내 몸이 아니게 된 것마냥 제멋대로 날뛰었다. 목구멍도 아프기는 매한가지였다. 어째서인지 식도 자체가 헐어버린 느낌이었다. 가래를 뱉고 싶었지만 침이 없어서 기분 나쁘게 매마른 재채기만 나왔다.

    눈앞이 약간 새하얬다. 꼭 전등이 깜빡깜빡 점멸하는 것 같았다.

    “다, 단탈리안. 괜찮아? 정말로 괜찮은 거야?”

    “아주 조금……머리가 어지럽군요. 괜찮습니다. 가벼운 현기증입니다.”

    내가 가슴 주머니를 더듬어서 포션병을 꺼내들었다. 로즈마리 향기가 연하게 풍겼다. 허브 향기와 벌꿀이 들어간 최고급 포션으로 내 입안을 적셨다. 이 물건에는 알코올도 섞여 있었다.

    조금씩 포션을 맛보았다. 혀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로 감미했다.

    입안이 싱그러운 액체로 가득 차자, 그제야 두개골까지 깨끗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포션을 꿀꺽 삼켰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어지럼증도 가라앉았다.

    “…….”

    깨닫고 나니, 어느새 시트리가 나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울고 있었다.

    “흐윽……으읏, 흐아아…….”

    시트리의 어깨가 떨었다. 그녀가 흐느끼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흘러내렸다. 나는 아직 머릿속에 멍한 기운이 남아 있어서 한동안 시트리를 쳐다보았다. 천천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나는 오른손을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시트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습니다. 시트리. 저는 어디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단탈리안까지 없어지면……읏, 단탈리안까지 없어져버리면, 나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전부 괜찮아질 거에요.”

    시트리는 제대로 된 문장을 지어내지 못하고 다만 울었다. 나는 시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얼굴을 내 가슴에 꾹 눌렀다. 그래서 내 옷자락도 그녀의 눈물로 젖어들었다.

    어떻게 시트리한테 밝힐 수 있겠는가.

    내가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파이몬을 살해했으며――지금 이 순간에도 파이몬이 환영으로서 내 몸 한편에 환영으로 들러붙어, 시트리와 똑같이 손톱으로 옷자락을 잡아끌고 있다는 것을.

    괜찮다는 말 이외에 시트리한테 해줄 말이 나에게는 없었다.

    아마도 나는 시트리에게 영원히 진실을 말하지 못하리라.

    …….

    잠깐.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만약 데이지가 아까 전 처형식에서 파이몬 암살의 진실을 폭로했다면, 나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을 것이었다. 시트리와 산악파 마왕들이 착란에 빠져서 혼란이 더더욱 커졌겠지. 그런데 왜 데이지는 나를 암살범으로 지목하지 않았는가.

    …….

    데이지가 단순히 내 파멸을 목표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만일 내가 암살범이라는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진다고 해보자. 나는 처형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그건 내가 바라는 방식의 죽음이기도 하다.

    파이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시트리의 분노를 받아, 누가 봐도 악인의 화신인 채로 사형당한다. 나는 이런 죽음에는 불만이 없다. 폭로자가 데이지라면 더할 나위가 없다. 십중팔구, 데이지도 나의 속내를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데이지는 단순한 파멸이 아니라 철두철미한 패배를 나에게 안겨주려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바라는 대로 살 수도 없고 당신이 바라는 대로 죽을 수조차 없다. 당신의 패배다.' 이것이야말로 데이지가 선언하려는 바이리라.

    “…….”

    그렇군.

    데이지가 어디로 도망쳤을지 알겠다.

    아마도 틀림없이 데이지는 엘리자베트 통령한테 망명했을 것이다. 나는 엘리자베트 통령에게 나를 살해할 자격과 능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내게 걸맞는 죽음을 선물하기에 상당히 괜찮은 후보로 여기고 있다.

    데이지는 엘리자베트의 부하로 들어가는 척하면서 그녀를 암살할 거다. 왜냐하면 그래야 '아버님이 원하는 방식대로 죽음을 맞이할 가능성'이 하나 없어지기 때문이다.

    일찍이 데이지는 이렇게 말했다.

    ─ 베르시 백작, 엘리자베트 통령, 루크. 설마 이들이 아버님을 죽여도 된다고 판단하셨는지요?

    ─ 그들이 아버님의 무엇을 안다는 말입니까. 애시당초 그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아버님을 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까?

    ─ 한참 엇나간 착각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즉, 데이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 후보들을 말살할 계획이었다.

    내 입가가 기묘하게 비틀렸다.

    좋다. 대충 밑그림이 그려졌다.

    녀석이 왜 바르바토스를 납치했는지도 이해되었다. 엘리자베트 통령에 대한 일종의 뇌물이겠지. 현재 합스부르크의 황제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는 기실 바르바토스가 흑마법으로 소생시킨 시체라는 정보까지 떠넘기면 금상첨화였다.

    데이지는 단번에 엘리자베트의 신임을 얻게 된다. 그렇게 엘리자베트가 방심한 순간을 노려서, 단칼에 그녀를 죽인다. 이것이 데이지의 극본이지 않을까.

    어수룩한 꼬맹이 주제에 꽤나 웅대한 계획을 품고 있었다. 제법이었다. 하지만 과연 어디까지 네 마음대로 세상만사가 흘러갈까…….

    “단탈리안. 정말로 계속 이렇게 살아가진 않을 거지? 평생 절름발이로 지내겠다는 말, 그냥 상황이 심각한 걸 풀려고 했던 거지?”

    문득, 시트리가 울먹거리는 소리가 내 의식을 깨웠다. 나도 모르게 생각에 잠겨버린 모양이었다. 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건 조금 나중에 얘기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당장 눈앞에 닥친 일부터 처리해야 하니까요. 이대로 바르바토스를 놓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요?”

    “응……그건 그렇지만.”

    “부탁이 있습니다.”

    내가 시트리의 말을 끊었다. 이미 내 머리에서는 데이지가 엘리자베트에게 망명했을 경우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찬찬히 시나리오를 예상해보고 있었다.

    “제 침실에서 지금 이바르가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이바르?”

    “시녀입니다. 자그마한 체격에 금발을 한 시녀요. 그녀를 여기로 불러주실 수 있겠습니까?”

    엘리자베트는 쉽게 타인을 신뢰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바르바토스를 헌상하는 것만으로 신뢰를 얻기란 어려웠다. 데이지는 자기가 '충실한 배신자'임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고래로부터 배신자가 새로운 주군에게 신용을 얻는 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정해져 있었다. 바로 이쪽의 군사 정보를 폭로하는 것이었다.

    데이지는 내 마왕성의 비밀통로를 알고 있었다. 그걸 엘리자베트한테 말해주겠지. 엘리자베트는 데이지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판가름하기 위해, 비밀통로로 암살단을 파견해볼 것이다…….

    엘리자베트와 데이지. 본래 역사대로라면 여황제와 용사로서 엮일 두 사람인가.

    시간이 별로 없다. 마왕성에 방비를 해두어야 한다.

    하지만, 미리 예상한 티를 너무 내는 것도 품격이 떨어지는 짓이다. 어디 한번 적당히 장난을 쳐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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