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48 DANTALIAN =========================================================================
광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두 명의 남매가 짓이기고 간 자국에 시민들과 병사들이 힘겹게 신음했다.
곳곳에 구덩이가 움푹 파였고, 대량의 핏물이 시체를 감싸돌면서 흘렀다. 불과 2분. 아니, 아마도 1분이 채 지나지 않았겠지. 그토록 짧은 시간에 사상자 수백 명이 발생했다…….
“…….”
나는 무심코 오른쪽 손등을 매만졌다.
아직도 데이지에게 걷어차인 부위가 욱씬거렸다. 그러나 더더욱 쓰라린 곳은 손등 따위가 아니었다. 마음이었다.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 생각했다. 데이지를 죽이지 않고 살려둔 그날부터, 어딘지 모르게 지금과 같은 광경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마왕으로 태어난 주제에 용사를 살해하지 않았다……즉, 나는 지금 순전히 인과응보를 받은 것에 불과했다.
데이지는 잘못한 것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라우라 역시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결국 모든 것은 나의 책임이었다. 내가 라우라를 거두었으며 데이지를 거두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데이지에 대한 분노로 머리가 뜨거웠지만, 나는 금세 침착함을 되찾았다. 저건 순전히 내 잘못이었다…….
“에에. 결국 도망쳤네~.”
가미긴이 뒤쪽에서 칭얼거렸다. 내가 등을 돌려서 가미긴을 쳐다보았다. 나뿐만이 아니라 마르바스를 비롯하여 주요 마왕들도 그녀에게 귀를 기울였다.
“도망치다니. 추격에서 탈출한 것인가?”
“응. 도시를 벗어나자마자 순간전이 마법을 써서 증발해버렸는걸. 와이번들이 덮치기 바로 직전에 도망쳤어.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나봐.”
바싸고가 혀를 찼다.
“쯧, 영악한 놈들이로군. 일단 마법사들을 위주로 추격대를 조직하지. 여차하면 뒤꽁무니를 쫓을 수 있을 게다.”
“글쎄에. 저 정도로 머리가 굴러가는 아이들이라면 전이도 여러 번 해서 흔적을 분산시킬 것 같은데. 개고생이 될 것 같으니까 개인적으로는 별로 추천하지 않아.”
“그렇다고 두 손 놓고 풀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바싸고가 끔찍하다는 듯 탄식했다.
“우리는 바르바토스를 빼앗겼다. 게다가 장소가 좋지 않아. 니블헤임의 한복판이다. 마족의 안마당에서 인간종 애송이들한테 코를 베였다. 이게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상상만 해도 아찔하군.”
“…….”
“단탈리안. 본인은 네놈을 질책하고 있다.”
바싸고가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마왕들의 이목이 내게 집중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혹은 이런 상황이기에 더더욱, 나는 바싸고의 행동을 냉철하게 평가하고 있었다. 바싸고는 지금 일부러 총대를 매었다.
현재 나를 대놓고 비난할 수 있는 마왕은 극소수. 마르바스, 시트리, 가미긴, 바싸고, 이렇게 네 명밖에 없었다. 가미긴과 시트리는 노골적으로 내 편을 들고 있으니 나를 꾸짖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입장상 마르바스와 바싸고만이 남았다.
만일 마르바스가 나를 질책하면 어떻게 될까. 곧바로 정치적인 견제가 되어버린다. 자칫 잘못하다 중립파가 대세를 쥐어잡고 주도하는, 그런 그림이 나와버릴 수 있다. 그렇기에 바싸고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중립파보다 한 발자국 앞서감으로써 나를 원호해주었다.
바싸고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반역도들은 네놈의 수양딸이고 수양아들. 자식의 잘못은 부모의 과오이다. 설마 책임에서 자유롭다고 변명할 속셈은 아니겠지. 어디 네놈의 혓바닥이 여전히 제 실력을 과시한다면 마음껏 항변해보거라.”
지금이 최고의 기회였다.
여기서 확실하게 사죄를 해둔다. 수양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송구하다고. 누군가가 나중에 다시금 이번 사건에 대해 추궁하지 못하도록 아예 단단하게 사과를 한다. 정치적인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호기였다.
고맙다, 바싸고.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다. 맹세한다. 앞으로 설령 당신이 나를 배신할지라도 단 한 번, 아무것도 묻지 않고 넘어가겠다.
“저에게는 감히 변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내가 차분하게 입술을 열었다.
“바르바토스의 처형을 담당한 사람은 저입니다. 이 자리에서 수양딸에게 배신당해서 꼴불견을 연출한 사람도 저입니다. 모든 것이 저의 부덕입니다. 여기에 이견의 여지는 없습니다.”
“호오. 네놈치고는 꽤나 순순하게 잘못을 인정했군.”
바싸고가 이죽거렸다. 그가 강하게 나와주는 덕택에 다른 마왕들은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허면 이제 책임을 질 차례이다. 이 사단을 어떻게 책임질 생각인가.”
“저에게 도끼를 하나 건네주십시오.”
“흐음.”
바싸고가 눈썹을 찡그리고 주변을 스윽 둘러보았다. 호위병 한 명이 시선에 응답하여 앞으로 걸어나왔다. 병사는 날이 시퍼렇게 선 손도끼를 공손하게 바쳤다. 바싸고가 도끼를 건네받아서 나에게 넘겨주었다.
“…….”
나는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광장 저 멀리에서 소란스러운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시민들은 이미 거의 모두 떠나갔다. 부상자와 부상자를 돕는 이들만이 남아서 소동의 잔해를 치우고 있었다. 데이지에게 기습을 당한 중립파 마왕 네 명도 그럭저럭 회복되어서, 부하들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손도끼를 치켜들어――단숨에 왼쪽 허벅지를 향해 내리찍었다.
“아?”
누군가가 헛숨을 토했다. 아마도 가미긴과 시트리겠지. 나는 무덤덤하게 도끼를 치켜들어서 다시 한 번 허벅지를 도려냈다. 시뻘건 핏물이 도끼날에 묻으면서 바닥에 흩뿌려졌다. 허벅지를 자르기란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기계적으로 열한 번을 내리찍은 다음에야 마침내 절단했다.
나는 그동안 한 번도 얼굴색이 바뀌지 않았다.
제법 고통스러웠지만 그뿐이었다. 국화전쟁에서 왼쪽 허벅지에 화살이 맞은 이후, 나는 그 부근으로 통각이 지극히 옅어졌다. 등살과 마찬가지로 감각이 둔해진 부위 중 하나였다. 뭉텅한 무언가가 잘려나갔다, 기껏해야 그 정도 느낌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왕들 입장에서는 달리 보이겠지.
“…….”
내가 고개를 들어서 마왕들을 쳐다보자, 그곳에는 꽤나 생경한 시선들이 있었다. 마왕들은 하나같이 경악스러운 눈초리로, 마치 끔찍한 괴물을 목격한 듯한 눈동자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하기사 누군가가 무표정하게 자신의 허벅지를 내리찍는 모습은 기괴스러운 구석이 있으리라. 조금 더 아픈 척을 했을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좌중의 분위기를 압도하는 것이 중요했다. 아마 내 판단이 옳았을 것이다.
“소인 단탈리안. 모든 여신들 앞에서 맹세하나니, 이제부터 영원토록 한쪽 다리가 없는 절름발이로서 살아갈 것을 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내가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이마를 숙였다.
“재생력을 이용해서 다리를 되찾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본디 죄의 무게를 생각하자면 다리 한쪽은커녕 목숨을 바쳐도 크게 모자람이 있습니다만, 나머지 죄과는 저의 실태를 무마하는 것에서 찾고자 합니다. 부디 소인에게 관용을.”
정적이 찾아들었다.
나는 계속해서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렸으므로 마왕들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가 보지 못했다. 다만 잠시 뒤, 충격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시트리가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야.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그 인간년이 전부 잘못한 거잖아! 왜 단탈리안이 책임을 져야 하는 건데!”
“반역자의 후견인은 단탈리안이었다.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한다.”
바싸고가 어쩐지 힘이 빠진 어조로 말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기색이었다.
“단탈리안의 사죄는 지극히 올바르다. 본인은 이 정도로 용서하지. 다만, 단탈리안 본인이 말했듯이 이번 사태를 전적으로 책임져서 해결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헤에. 듣자하니 아주 네 멋대로 이야기를 진행하잖아.”
가미긴이 끼어들었다. 가미긴은 약간 열이 받은 느낌이 그대로 목소리에 실려 있었다.
“오늘 경비를 맡은 사람이 단탈리안이었어? 내 기억으로는 아닌데. 수양딸인지 뭔지 하는 잡년이 배신한 거야 단탈리안의 책임이 맞다 쳐도, 그 잡년을 겨울철 숭어마냥 허무하게 놓쳐버린 사람은 어느집 양반들이야? 마르바스. 당신이 오늘 경비를 총괄하지 않았던가?”
가미긴이 비웃음을 흘렸다.
“마왕이 네 명이나 달라붙어 포위했으면서 인간종 꼬맹이 하나 제압하지 못하고, 겨우 일격에 나가 떨어지다니. 얼마나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줬는가 조금은 반성해주었으면 하는걸.”
――훌륭했다.
방금 가미긴은 바싸고를 매도하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중립파에 책임 소재를 추궁했다. 바싸고의 의중을 깨닫고 거기에 몰래 장단을 맞춰준 것이었다.
바싸고나 가미긴이나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시늉했으나 실상 차례차례 중립파의 주도권을 약탈하고 공격했다. 두 사람의 중간에 시트리가 끼어든 것도 적절했다. 시트리는 정치적인 눈치 싸움을 알아채지 못하고 순전히 분노했을 뿐이겠지만, 덕분에 바싸고와 가미긴의 연계가 눈에 두드러지지 않았다.
이것이 내가 새로이 구상한 마왕군의 균형.
한쪽에는 중립파가. 다른 한쪽에는 산악파 및 무소속 마왕들이.
그 중간에서,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내가 균형을 조절한다. 이전에 중립파가 해온 역할은 바싸고가 대신한다.
아직 불안정하지만 과거 평원파와 산악파처럼 극심하게 대립하는 관계가 사라졌다는 점에서, 어쩌면 더 안정적인 균형이기도 했다. 이념들이 배제되고 순전히 정치성만이 남은 구도이니까.
마르바스에게도, 바싸고에게도, 시트리에게도, 가미긴에게도. 어느 누구한테도 일찍이 바르바토스나 파이몬이 정열적으로 몰두한 이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곳에 남은 것은 개인적인 인간관계와 정치적인 계산뿐.
결국 이것이 나의 종착역이었다.
“……본인의 잘못을 인정한다. 단탈리안의 사죄는 충분하고도 넘친다.”
마르바스가 입을 열었다.
“사태의 책임을 묻는 것만큼이나 사태를 해결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여기에 단탈리안만한 적임자는 없음이라. 단탈리안. 고개를 들게. 우리는 그대의 사죄를 받아들인다네.”
“동지 여러분들의 너그러운 선처.”
내가 천천히 상체를 들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대는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아가겠노라 맹세했다만, 시트리가 지적한 대로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그대는 한 명의 마왕이기 전에 제국의 얼굴이다. 어찌 불구로서 지내고자 하는가.”
“재차 너그러운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내가 마르바스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이미 저는 여신들께 맹세했습니다. 신상필벌은 지엄한지라 감히 제 책임을 이대로 흘려보낼 수는 없습니다. 부디 제 사죄를 받아주십시오.”
이건 바싸고를 위한 연극이었다.
나에게 사죄를 요구한 것도 바싸고였으며, 사죄를 받아주겠다고 처음으로 인정한 사람도 바싸고였다. 여기서 냉큼 마르바스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바싸고의 체면이 깎였다.
앞으로 신생 마왕군에서는 바싸고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중립파나 무소속에 개의치 않고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만한 사람은 바싸고 이외에 없었다. 그런 만큼 가능한 한 바싸고에게 발언력을 실어주어야만 했다.
바싸고에게는 단탈리안을 처벌할 권위가 있다. 그와 같은 외양이 중요한 것이었다.
“말도 안 돼. 단탈리안, 그건……!”
시트리가 뭐라고 소리치려고 했다. 그보다 앞서, 마르바스가 한숨을 쉬듯이 말했다.
“자네가 그쪽이 편하다면 본인은 반대할 권리가 없네. 하지만 생각이 바뀌더라도 우리는 결코 자네를 책망하지 않을 것일세. 그것만은 알아주게나.”
“예.”
내가 다시금 바닥에 엎드려서 예를 표했다.
“이 불충. 반드시 갚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