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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447화 (447/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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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나는, 아버님을 속이는 데 성공했다.

    그 증거가 사정없이 구겨진 아버님의 얼굴이었다. 이제 나는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붕괴시킨 주범. 아울러 마왕 파이몬을 죽이는 데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한 장본인이 되었다. 아버님에게 완벽한 환상을 심어주었다…….

    아버님이 분노에 차서 말했다.

    “무슨 짓을 할 속셈이냐.”

    “그걸 기대하면서 기다리시는 것 또한 아버님의 낭만적인 삶을 즐겁게 치장해줄 향신료가 아니련지요.”

    나는 치맛자락을 들어서 아버님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아버님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아버님을 보지 못하리라. 되도록 아버님의 모습을 뇌리에 뚜렷하게 새겨넣었다.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부디 안녕히 계시기를.

    나는 바르바토스를 인질로 잡아서 한 걸음 크게 도약했다.

    “오빠.”

    광장 한복판에 가뿐하게 착지하였다. 광장에서는 이미 루크가 한바탕 난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유혈극에 관중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일대 혼란을 연출했다. 내가 오빠한테 바르바토스를 던져주었다.

    “여기서 1분 안에 빠져나가야 돼.”

    “응. 알았어.”

    고통과 출혈로 인해 바르바토스는 기절해버린 상태.

    사지가 잘려나간 그녀를 오빠가 단단히 등에 매었다. 공주님을 약탈하는 방법치고는 적이 야만스러웠지만, 원래 납치란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잡아라! 저 반역자를 잡아라!”

    “한 놈도 살려보내지 마라!”

    사방에서 마족 병사들이 뛰어왔다.

    포위망은 완성된 지 오래였다. 다만 관중들이 도망치느라 병사들은 좀처럼 제대로 된 포진을 이루지 못했다. 바로 그곳에 허점이 있었다. 내가 노리는 바이기도 했다. 우리 남매는 각자가 양손검을 꺼내쥔 채, 고요하게 정면을 노려보았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머릿속에서 잡념이 사그라들었다. 관중들의 비명도, 저편에서 아버님이나 마르바스가 외치는 명령도, 병사들이 늑대 떼거리처럼 악을 쓰는 소리도, 모두 그림자처럼 허물어졌다. 이쪽에 적의를 품고 달려드는 칼날과 창날의 동선. 그것만이 내 눈에 느릿하게 비추었다.

    아군은 두 명.

    적군은 약 이천 명.

    전력비가 정확하게 1:1000.

    달리 이르기를――이쪽이 압도적으로 유리.

    내가 입을 열었다.

    “오른쪽과 위쪽은 내가 맡을게.”

    “아아. 왼쪽이랑 후방은 내가 처리하겠어.”

    우리 남매의 작전회의는 그걸로 종료되었다.

    우리는 따로 기합을 지를 필요도 없이, 조용히, 발자국을 내딛었다.

    한 줄기의 질풍이 광장에 치달았다.

    수십 미터 떨어져 있던 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코앞까지 다가오자, 오크 병사의 얼굴이 천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나는 상대방의 주름살이 접혀지는 것을 무심하게 바라보면서 가볍게 대검을 내리찍었다. 오크 병사는 표정이 구겨진 얼굴 그대로 절명했다.

    조금 더 빠르게.

    나는 반원을 그리며 대검을 넓게 휘둘렀다. 붉은 핏물이 공중에 낭자했다. 우리 남매는 따로 상의하지 않았지만 정확히 똑같은 동작으로 양편의 병사들을 도륙했다. 다음 순간, 열세 명의 병사가 가슴이 뭉텅 잘린 채 쓰러졌다.

    다시 발자국을 내딛었다.

    “이, 이쪽으로 온다!”

    “방진을 만들어서――.”

    우리 남매가 달려드는 것을 보고 병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엘프가 입을 크게 열어서 뭐라고 외치려고 했으나, 그 이상으로 명령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이미 우리 두 사람은 병사들을 덮쳤다. 열댓 명으로 이루어진 소대를 학살하는 데에는 고작 한 호흡밖에 소모되지 않았다.

    나는 오른편을, 오빠는 왼편을. 두 사람이 일격을 날리자, 방패든 창대는 무엇이 가로막든 상관없이 대검이 병사들의 몸뚱어리를 일도양단했다. 재차 핏물이 대량으로 튀어올랐다.

    엘프 지휘관이 자신의 배를 부여잡았다. 그는 불과 2초 만에 부대원이 전멸한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망연하게 쳐다보았다. 그가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괴물, 녀석…….”

    엘프 지휘관은 배가 터지면서 내장을 와락 쏟아냈다.

    거리가 가까웠던 탓인지 피 서너 방울이 내 옷에 묻었다. 아버님이 선물해준 시녀복이 더러워지고 말았다. 이건 아버님이 손수 도안을 짜서 장인에게 제작하도록 시킨 옷이었다. 아마도 객관적으로 가치를 매기자면 한 나라의 국보 정도가 되겠지. 그런 보물이 더럽혀져서 조금 기분이 나빴다.

    “…….”

    내가 슬쩍 전방을 쳐다보았다.

    멀리서 나와 시선이 마주친 마족 병사들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기세는 이미 명백하게 우리한테 넘어왔다. 제대로 진영을 짜서 맞붙는 것이라면 또 몰라도, 수많은 시민들이 어지러이 뛰어다니는 통에 광장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부대 단위의 병사들이 움직이기에는 별로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당연했다. 그들은 바깥에서 내부로 침입하는 경우는 대비해두었겠으나, 설마 안쪽에서 외부로 탈출하는 시나리오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남매는 그들에게 여유를 주지 않고 쉴 새 없이 돌파해나갔다.

    광장을 벗어나는 데에는 미리 예고한 대로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니블헤임의 골목을 교묘하게 내달려서 마침내 도시 바깥까지 도망쳤다.

    ─ 끼하아아악!

    도시의 미로를 벗어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상공에서 와이번들이 강하했다. 마왕 가미긴이 수족으로 부리는 정예 와이번 부대이겠지. 지붕으로 뒤덮인 도시 안쪽에서는 활약하지 못하다가 이제야 공격에 나선 것이었다.

    하지만 늦었다.

    나는 품속에서 순간이동 마법서를 꺼내들었다.

    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지면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우리 남매는 순식간에 빛무리에 감싸였다. 수십 마리의 와이번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덮쳐오기 직전, 우리는 니블헤임에서 탈출했다.

    풍경이 한 순간에 바뀌었다.

    칙칙하고 메마른 마계의 대지에서 푸른 수풀이 끝없이 이어진 인간계의 땅으로. 조금 전까지 긴박하게 추격전이 이루어졌던 게 거짓말처럼, 눈앞의 풍경은 한가롭기 그지없었다. 단지 조금 때가 안 좋았을까.

    “어, 어어……어어어.”

    농부 한 명이 우리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마침 밭일에 쓸 목재라도 구하러 이곳에 온 것일까. 일부러 인적이 드문 숲 근처를 순간이동 목적지로 삼았건만, 운 나쁘게도 목격자가 발생해버렸다.

    농부는 무척이나 놀란 것이 분명했는데, 오른손에 들고 있던 손도끼를 저도 모르게 땅바닥에 떨어트렸다. 틀림없이 순간이동 마법 따위는 평생 처음 목격했으리라. 얼굴에서 순박하게 살아온 세월이 생생하게 묻어나왔다.

    내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말씀을 여쭙겠습니다. 성함이 어찌 되는지요?”

    “저, 저 말입니까요?”

    “예. 여기에 다른 분은 없으니까요.”

    농부가 말을 더듬거렸다. 그는 합스부르크어를 썼는데 서부 사투리 억양이 진했다. 반면에 나는 아버님으로부터 직접 황실 억양의 합스부르크어를 배웠다. 농부의 귀에 내 합스부르크어는 반쯤 외국어로 들릴지 모르겠다.

    “소인의 이름은 프로슈라고 합니다요, 마님.”

    “프로슈. 부인과 자식을 갖고 있습니까?”

    “예, 예이. 모자라지만 아들을 세 명 두고 있습죠.”

    농부가 잔뜩 움츠러들어서 허리를 숙였다. 나를 귀족으로 알아본 것이었다. 실상 나는 아버님이 튜튼 왕국의 공작인데다 그 하나뿐인 후계자였으니 꽤나 귀한 공녀이긴 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프로슈. 당신을 죽이겠습니다.”

    “……예?”

    “저희는 누군가에게 급히 쫓기고 있습니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목격자를 살려둘 수는 없습니다. 제가 당신을 죽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프로슈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때, 나의 대검은 이미 프로슈의 가슴팍을 양단하고 있었다. 이 순박한 농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몸뚱어리가 두 쪽으로 갈라져 힘없이 허물어졌다. 초록색 풀밭에 피가 흘러내렸다.

    내 옆에서 루크가 중얼거렸다.

    “……꼭 죽일 필요까지 있었을까.”

    “우리는 이제부터 아버님을 상대해야 돼. 일말의 위험이라도 남겨두면 아버님은 반드시 냄새를 맡고 우리를 추격할 거야.”

    내가 물끄러미 루크를 바라보았다. 루크는 낯빛이 우울했다.

    “오빠. 우리가 방심하더라도 아버님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아버님의 실력이 형편없다고 생각해?”

    “……아니. 절대로 아니지.”

    “아버님은 방심하지 않고 우리를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 거야. 그렇다면 우리 역시 절대로 마음을 놓을 수 없어. 오빠의 죄책감도, 망설임도, 전부 가슴의 밑바닥에 묻어버려. 우리에게 그런 감정은 사치품에 불과하니까.”

    그렇다. 우리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아버님을 적으로 돌렸다.

    여태까지 아버님을 적수로 돌린 자는 수두룩하게 많았다. 그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졌다. 전원이 아버님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다가 목이 날아갔다. 나는 그런 선례를 반복할 생각이 눈꼽만치도 없었다.

    루크가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납득했다는 분위기가 전해졌다. 그거면 되었다.

    우리는 순간이동 마법서를 수십 장 써가면서 이리저리 이동해나갔다. 혹시라도 마법사 부대가 추격해올 경우에 우리의 경로를 착각시키기 위해서였다. 합스부르크, 프랑크, 사르데냐, 헬베티카 등, 사방으로 돌아다녔다. 짧은 시간에 마력이 지나치게 많이 빠져나가서 속이 울렁거렸지만 이 정도는 너끈히 버텼다.

    이제 되었다, 싶었을 때 우리는 최종 목적지에서 멈추었다.

    “…….”

    시각은 이미 어두컴컴한 밤.

    창백한 달빛 아래, 그럭저럭 거대한 성벽이 비추었다. 성벽 위에서 때때로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순찰병들이 쥔 횃불이 타오르는 것이었다.

    우리 남매는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고 그곳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  *  *

    “각하. 야밤에 송구합니다.”

    통령 집무실에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찾아왔다. 사람들이 모두 자고 있을 시간대였지만, 잠이 적은 엘리자베트 통령은 이때까지 업무를 돌보고 있었다. 엘리자베트 통령이 외알 안경을 벗으면서――그녀는 최근 들어 시력이 약간 나빠졌다――쿠르츠를 쳐다보았다.

    “이런 시간에 여자의 방에 들어오는 것은 별로 현명한 작태가 아니로군. 슐라이어마허 장군.”

    “저도 웬만하면 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이쿠. 그건 본인에 대한 모욕으로 취급해도 괜찮을까?”

    엘리자베트 통령이 미소를 지었다. 통령은 하늘거리는 잠옷을 입고 있었다. 이렇게 업무를 보다가 잠기운이 들이닥치면 그대로 책상에 엎어져서 잠들기 위해서였다. 심지어 통령은 무릎에 푹신푹신한 베개까지 준비해두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쓴웃음을 지었다. 위엄이 넘치는 통령이 밤마다 베개를 끌어안고 책상에 엎어진다는 사실을 공화국 시민들이 알면 어떻게 반응할련지……아니, 어쩌면 오히려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소관이야 언제든지 질책을 받아도 좋습니다. 지금 경비대에 다소 문제가 생겼습니다. 외곽 성문에 잘 차려입은 시종 두 명이 찾아왔는데, 순식간에 경비대장을 인질로 삼아서 통령 각하를 뵙게 해달라고 협박하는군요.”

    “경비대장을 갈아치울 때가 되었는가?”

    “내일 새로운 후보자 명단을 제출하겠습니다.”

    엘리자베트 통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다시 서류를 내려다보면서 깃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비대장이 인질로 잡혀서야 말이 안 된다. 무시하고 화살을 쏘게. 그런 작자는 대지에 비료가 되어주는 편이 그나마 공화국의 인민을 위한 길이겠지.”

    “소관도 그렇게 하려고 했습니다만.”

    쿠르츠가 다음에 내뱉은 말에 엘리자베트 통령의 깃펜이 뚝, 하고 멈추었다.

    “그 시종들. 마왕 단탈리안을 모시던 자들이라고 스스로 주장하더군요. 인상 착의도 저희 정보부에서 가지고 있던 자료와 일치합니다. 제 생각에는 각하께서 직접 만나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 작품 후기 ============================

    - 챕터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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