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46화 (446/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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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단계.

이대로 가다가는 아버님이 반드시 파멸하리라는 확신을 얻어야 했다.

“진작에 알아차렸어야 했는데……내가 왜 그것도……너는 상대방을 바라보는 게 아니었어. 시선을 둘 곳이 상대방의 얼굴 정도밖에 없었던 걸, 그걸…….”

“정신이 나간 사람은 아무리 봐도 내가 아니라 너인 것 같군.”

“대체 몇 명이야! 몇 명이나 있는 거야!?”

나는 본래 주관적으로 충분히 아버님의 파멸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다 강력한 증거가 필요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 내가 사태를 가만히 내버려두면 아버님이 파멸을 피할 수 없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예컨대 아버님은 파이몬을 살해한 이후 단 한번도 애인들과 동침하지 않았다. 이러한 증상은 파멸의 전주곡과 같았다. 그렇기에 ‘아버님은 파이몬을 사랑하지 않았다’라는 도발을 써가면서 증거를 얻으려 했지만, 약간 부족한 감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왕 바르바토스는 아주 잘해주었다.

“바보 단탈리안……그쪽 구석에는 고문도구들이 놓여 있어……. 도대체 뭐가 네 시선을 가로막고 있는 거야……?”

아버님은 환영에 시달리고 있었다.

매우 놀라웠다. 거의 하루 종일 아버님을 호위하는 나조차도 깨닫지 못했다. 아버님은 그토록 냉철하게 자신의 비밀을 감춘 것이었다. 나는 아버님의 난공불락과 같은 정신력에 반해 무심코 그 자리에서 황홀해질 뻔했다.

천만다행으로 아직 일과 시간이었다. 내 연기는 아직 유효했다. 바르바토스와 대담을 끝마치고 나오는 아버님을 향해서, 내가 마지막으로 여쭈었다.

“한 가지만 알려주세요, 아버님. 제 마을에 살던 사람들도. 아버님께서 살해하신, 제 마을의 사람들도……비추는 건가요?”

“오냐. 아주 잘 비친다. 눈알이 파먹히고 입구멍이 창칼로 꿰뚫린 채 나를 저주하고 있구나. 어떠하냐. 이제 만족했느냐?”

훌륭했다.

제왕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낱 쓰레기에 불과한 것이 화전민. 그런 인간들마저 아버님은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마왕 바르바토스의 말이 옳았다. 그녀를 죽이고서 아버님이 멀쩡히 제정신을 유지할 리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제5단계.

――행동 개시.

*  *  *

공개처형이 이루어지는 당일이었다.

나는 우선 평원파 마왕들이 모두 처형될 때까지 기다렸다. 이건 어쩔 수가 없었다.

평원파 마왕들은 자기네를 숙청해버린 아버님을 결코 용서하지 않겠지. 산악파가 괴멸해버린 이상, 평원파는 더 이상 남아봐야 쓸모는커녕 해악밖에 없었다. 모두 얌전히 죽어주는 편이 좋았다.

평원파 마왕들의 목이 날아가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잘 되었다. 아버님의 권좌는 다시금 단단해졌다…….

이제 마지막으로 바르바토스만이 남았다.

나는 아버님과 바르바토스가 울음기 섞인 대화를 주고받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발자국을 내딛기 전, 잠시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아름다운 하늘.

바람이 내 뺨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이따금씩, 아버님은 아주 이따금씩 나를 상냥하게 대해주었다. 그때마다 나는 연기가 깨질까봐 두려웠다. 인간을 부식시키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부드러운 편안함이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후자를 경계했다.

우리의 무대는 두 사람이 철저하게 배역을 지켜야만 성립했다. 아버님은 자신을 증오하도록 만든다. 나는 아버님을 증오한다. 사람은 세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꼭 그처럼, 아버님과 나는 무대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종자였다.

연기하기 위해서 숨을 쉬는 것이 아니고, 숨을 쉬기 위해서 연기한다.

무언가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

대지를 무대로 삼고. 하늘을 장막으로 삼아서.

이 세계를 우리의 연기로 홀려버린다.

거기에 필요한 것은 강철의 의지.

다만, 지금까지 연극은 아버님이 관객들을 속이는 게 전부였다. 제1막은 끝났다. 하늘의 구름은 걷혀지고 제2막이 오른다. 이곳에서는 주연인 아버님마저 무언가에 속는다. 비극의 외양에 다시금 또 다른 비극이 덧씌워진다.

연극의 제목은――단 한 사람만을 위한 교향곡.

아버님이 절대적으로 파멸하리라는 확신이 이곳에 있었다.

그리고 아버님을 구원할 사람이 오로지 나 하나뿐이라는 확신도, 이곳에 있었다.

두 개의 믿음이 마치 아치 기둥처럼 나를 떠받들었다. 그리함으로써 나는 노예각인에 새겨진 명령, 나를 짓누르는 중력의 악령에서 해방되어 공중에 떠올랐다. 이제 아버님은 어떠한 명령으로도 나를 막을 수 없었다.

자아.

가자.

한 걸음도 생략할 수 없는 걸음으로.

아버님의 칼날이 아래로 내리찍혔다. 묵직한 대검이 바르바토스의 목을 절단하려는 찰나, 내 발끝은 정확한 각도와 정확한 강도로 아버님의 손등을 후려쳤다. 대검이 튕겨서 멀어졌다.

아버님은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표정의 변화가 이상하게도 느리게 느껴졌다. 아마도 지금 나는 최대한의 집중력으로 아버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문이겠지. 나는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감히……네 년, 감히 무슨 짓거리를……!”

“수없이 고민했습니다.”

아버님은 처절한 배신감을 맛보고 있었다. 당연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아버님이 제일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런 식으로 배신하지는 않으리라고, 아버님께서는 믿고 있었겠지.

그렇기에 나는 최고의 순간을 거머쥐었다.

“수많은 밤을. 차마 헤아리지 못할 시간 동안 고민했습니다.”

과연 아버님을 이렇게 막아서도 되는 것일까.

설령 아버님이 죄책감이 찌부러져서 자멸할지라도 그것 역시 정당한 결말이지 않을까. 아버님이 스스로 선택해서 스스로 맞이하는 최후가 아닐까. 그걸 내가 제멋대로 왜곡하고 비틀어도, 정말로 괜찮은 것일까.

하지만.

“이제 확실해졌습니다.”

나는 납득하지 못한다.

무엇을 숨기겠는가. 나 또한 아버님과 마찬가지로 지독한 이기주의자다. 아버님이 자신의 업을 짊어지고 몰락하는 것을 이기적으로 추구하듯이, 나는 내가 아버님을 짊어지고 몰락하는 것을 이기적으로 갈망한다.

고로.

“저는 당신을 막습니다.”

내가 대검을 손아귀로 소환했다. 일찍이 마왕 바알이 지녔던 검은 온전히 내 의지에 순응하였다. 어째서인지 이 물건은 나를 주인으로 인정한 모양이었다. 하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 이름은 데이지 폰 커스토스.”

왜냐하면 나는 아버님의 유일무이한 후계자.

“저의 모든 생명을 다하여, 마왕 단탈리안. 지금부터 당신을 가로막겠습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난 인간이기 때문이다.

무대가 조용해졌다.

새로운 주연 배우의 등장에 관객들은 압도당했다.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으며, 사람들은 침묵이라는 몸짓으로 불길하게 이쪽을 바라보았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일인가. 지금부터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인가…….

아버님이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아버님은 우선 선제후 마왕들에게 몇 마디 양해를 구한 뒤, 거리낌 없이 나와 마주보았다. 우물의 땅밑처럼 어두운 눈동자가 나를 적나라하게 비추었다.

“네 년. 이런 곳에서 죽고 싶은 것이냐.”

“저는 자살을 희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중요했다.

나는 아버님한테 착각을 심어주어야 한다. 아버님의 마음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일으켜서 판단의 착오를 유발한다. 그걸 위해서 나는 일부러 비웃음을 흘렸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님이 노여움을 담아서 소리쳤다.

“새로이 명령한다! 앞으로 모든 지시에서 바르바토스만은 예외로써 제외시킨다! 명령에 있어서 바르바토스를 나의 연인으로 취급하지 마라! 그러니 즉시 대검을 내놓아라, 천치 녀석!”

심장이 고통으로 조여왔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고통은 아니었다.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내가 미리 준비해놓은 확신들이 아버님의 명령을 이겨낸 것이었다. '지금 내가 대검을 내려놓고 계획을 포기하면, 아버님의 파멸을 막을 수 없다'라는 판단이 고통을 무마시켰다.

좋다.

나는 할 수 있다.

내가 눈매에 조소를 담아서 아버님을 희롱했다.

“처음에는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였습니다.”

“……무슨 헛소리냐.”

“라우라 데 파르네세. 아버님께서 아끼시는 규중 아가씨 말입니다. 그새 잊어버리셨습니까?”

원래 있었던 일을 완전히 다른 시나리오로 바꾸어버린다.

그러나, 아무도 내가 하는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다.

증거가 없다. 증인이 없다. 거짓말을 폭로해버릴 무언가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일어났던 진실, 지금 내가 자아내는 거짓, 두 개 모두 완벽하게 상반되는 방식으로 성립한다.

완벽한 극본.

이제 아버님이 내 말을 믿기만 하면, 내 거짓말은 이윽고 진실을 덮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해버린다.

그러니까 아버님을 속인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시지 않았습니까? 군무상서는 본디 저를 마음에 들어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저를 경계하고, 꺼리며, 틈만 나면 트집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혹시 군무상서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버님의 양녀인 저를 괴롭히리라고 생각하셨는지요.”

속인다.

“이렇게 단순한 사실을 잠깐 잊어버렸다는 것이 도리어 부끄러울 정도였습니다. 제 눈앞에서 울부짖는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는, 마왕 바르바토스의 연인이지 않습니까.”

속인다.

“바르바토스는 누군가에게 다급한 경고를 들었습니다. 마왕 파이몬을 조심하라고, 이대로 가다가는 십중팔구 파이몬이 아버님을 살해하고 말 것이라고. 바르바토스는 이 경고를 들었기 때문에 파이몬을 배제하고자 움직였습니다.”

속인다.

“그렇습니다. 군무상서는 바르바토스에게 경고한 것입니다. 파이몬이 아버님을 죽이려고 시도한 것 같으니 부디 주의해달라고.”

아버님을.

내가 가장 경애하는 당신을 속인다.

나는 대검을 똑바로 치켜들고, 세계를 향해 포효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선언합니다. 당신은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망가트리지 않았습니다. 그건 당신의 착각. 그 붕괴에 원인이 있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바로 저 데이지 폰 커스토스이며, 고로 당신은 그에 대해서 책임을 질 자격도 권리도 없습니다!”

부디, 제 말을 믿어주십시오.

더 이상 자책하지 말고, 아버님의 분노를, 원망을, 저주를, 모두 저에게 쏟아주세요.

아버님께서 세상의 악마가 되겠다면.

저는 오직 아버님만의 악마로 남겠습니다.

“…….”

그리고 나는 아버님의 눈동자에서 거대한 악의가 솟아난 것을 목격했다. 지금 이 순간, 틀림없이 아버님은 나를 어느 누구보다 증오하고 있었다.

――가슴이 옥죄였다.

노예각인 때문이 아니었다. 다른 무언가가 내 가슴을 가볍게 쥐었다. 그러나 고통 따위는 무시하고 나는 철두철미하게 무표정과 조소를 연기했다.

“아직 마지막 선택이 남아 있다. 네 년을 죽인다.”

“…….”

“그리 되면 나는 다시금 내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게 된다.”

다시 한 번, 가슴이 가쁘게 뛰었다.

당장이라도 내 얼굴 표정이 일그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면 안 되었다.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나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서 입가를 비틀었다. 하지만 차마 마음을 전부 억누를 수가 없어, 입술이 자그맣게 떨렸다.

“아버님이라면, 틀림없이 그리 말씀하시리라 믿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제가 바라던 바입니다. 드디어 저는 여기까지 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제 치욕과 고통은 모두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있었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예정한 대로, 루크가 광장에서 소란을 일으켰다.

중립파 마왕들이 한 순간이나마 시선을 광장에 빼앗겼다. 나는 그 틈을 노려서 중립파 마왕들을 일격에 무력화시켰다. 미리 예측한 혼란을 이용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아버님이 악을 쓰면서 소리쳤다.

“나의 명령이다! 자결해라, 데이지!”

심장이 격통으로 울부짖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견뎌냈다. 무릎이 꺾일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참았다.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지만 억눌렀다. 당장이라도 아버님께 진실을 고하면서 나를 용서해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냉정하게 마음의 군살을 잘랐다.

절대로.

나는 여기서 결코 굴복할 수 없었다.

나의 죽음을, 아버님의 파멸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필사적으로 미소를 연기하며 아버님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그 명령에는 복종할 수 없습니다. 아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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