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45화 (445/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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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내가 이빨을 꾹 물었다. 아마도 지금 내 얼굴은 험악하게 비틀렸겠지.

    나는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목을 오른손으로 졸랐다. 군무상서가 괴로운 듯이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아직이었다. 아직 한참 부족했다. 아버님이 겪은 고통에 비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당장이라도 부러트리고 싶었다.

    “당신이, 아버님을…….”

    그 순간이었다.

    심장에 격통이 엄습했다. 눈앞이 핑 돌았다. 갑작스러운 고통으로 인해 손아귀에서 힘이 저절로 빠져나갔다. 숨이 트인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커억, 컥, 거리면서 급하게 호흡을 내쉬었다.

    내가 왼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하아, 으읏…….”

    여전히 심장이 고통의 여진에 떨었다. 나는 오른쪽 손바닥을 망연자실하게 내려다보았다. 아버님의 노예각인이 내 행동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이 여자를 죽일 수 없는 것일까.

    아니, 이유는 알고 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죽어버리면 아버님은 반드시 절망한다. 세상을 저주해버리게 된다. 그런 사실을 내가 지나치게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미래가 아버님께 해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여자를 살해할 수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또한, 아버님께 절대로 말씀드릴 수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자기 자신을 저주할 테니까. 군무상서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것은 자신의 잘못이라며 온전히 책임을 뒤집어 쓸 테니까.

    아.

    아아, 아.

    “…….”

    내가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이제 그녀는 아무래도 좋아졌다.

    나는 생기를 잃어버린 시체처럼 군무상서의 침실에서 빠져나갔다. 등 뒤에서 군무상서가 뭐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뭐라고 외쳤는지 내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가만히 내 방구석에 틀어박혔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아버님은 바르바토스나 파이몬, 둘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그게 아니었다. 아버님이 누구를 선택하든 상관없이 마왕군의 세력 균형은 무너져버린다.

    평원파-중립파-산악파. 이렇게 세 파벌로 이루어진 신생 마왕군 체제가 곧장 붕괴한다. 아버님의 권력은 바로 저 균형에서 비롯하고 있다. 아버님은 바르바토스를 죽이든 파이몬을 죽이든, 어찌되었든 간에 권력을 잃고 만다!

    진퇴양난.

    “…….”

    혀 끝에서 혈향이 느껴졌다. 거울을 바라보니 어느새 내 입가에서 핏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빨로 입술을 강하게 깨물고 있었다. 한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십중팔구, 아버님은 바르바토스와 파이몬을 둘 다 처리하겠지.

    그게 유일한 해답이다. 한 사람만 죽으면 마왕군의 권력을 산악파나 평원파가 독점하게 된다. 아무도 죽이지 않든가, 전부 죽이든가.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 바르바토스가 파이몬을 맹렬하게 적대하기 시작한 이상,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사라졌다.

    전부 죽는다.

    아버님이 사랑하는 연인 두 사람이 모두 죽어버린다.

    “그건 안 돼.”

    무심코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아버님을 잘 안다. 만일 아버님이 두 연인을 살해해야만 한다면, 아버님은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직접' 그녀들을 죽일 게 분명했다. 당연했다. 아버님은 자신이 얼마나 거대한 악행을 저질렀는지 그 영혼에 새겨넣기 위해 일부러 살인을 감행할 것이다.

    견딜 수 있을까?

    아무리 아버님이라고 해도――그만한 죄책감을 짊어지는 것이 가능할까?

    안 된다. 아버님은 견디지 못하고 파멸할 것이다. 자기랑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간들을 학살했다는 이유만으로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이다. 그런 자가 연인들의 죽음까지 감당할 리 만무하다.

    설령, 어찌저찌 견디는 데 성공한다 할지라도, 더 이상 아버님에게는 인간성 따위가 남지 않으리라.

    사실 여태까지 아버님이 망가지지 않은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깝다. 연인들을 살해한다면, 그곳에 남는 것은 단지 아버님의 살가죽을 뒤집어쓴 인형……단지 윤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에 따라 움직일 뿐인 기계에 불과하다…….

    그런 결말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아버님이. 누구보다 고결한 아버님이 결국에는 스스로의 무게에 짓눌려서 무너진다고? 그것이 아버님이 추구해온 길의 종막이며――필연이라고? 결국에는 그런 결말밖에 남아 있지 않는다고?

    웃기지 마라.

    나는 아버님이 승리하기를 바란다. 이 세계 전체와 아버님. 둘 중에 승리해야 마땅한 쪽은 단연 아버님이다. 도대체 세계가 무엇을 해주었는가? 도대체 세계 따위가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아버님에게 고통을 던져준 것으로도 모잘라서 이제는 패배까지 선물할 속셈인가.

    그딴 결말, 내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어떻게 해야 아버님의 권좌를 지키는 동시에 아버님의 영혼까지 지킬 수 있을까.

    고민해라, 데이지.

    틀림없이 방법이 있을 거다.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 만일 불가능한 일이 있다고 한다면, 서열 제72위의 마왕이 서열 제1위의 마왕을 물리치는 것 정도겠지. 아버님은 이런 짓을 실제로 해내었다. 지금 내가 찾고자 하는 탈출구는 그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다.

    고민해라.

    스물일곱 개의 계책을 구상했지만 모두 실패작으로 판명되었다.

    고민해라.

    아홉 가지의 방책을 떠올렸지만 모조리 역부족으로 판단되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어느 틈엔가 벌써, 하룻밤이 지나버렸다.

    그렇지만 나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꼬박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내 눈동자는 깜빡거리는 것마저 잊어버린 듯 허공을 노려보았다. 내가 슬쩍 고개를 돌려서 거울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새카만 눈동자를 가진 여자아이가 있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내가 희생하면 된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실수를 이대로 덮어둔다. 그 대신, 내가 군무상서를 몰래 추동한 것처럼 위장한다.

    이로써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면책을 받는다. 아버님께서 죄책감에 시달릴 이유도 사라진다. 설령 앞으로 아버님이 바르바토스나 파이몬을 죽이더라도, 그 모든 원흉은 나. 아버님의 책임이 아니라 온전히 나의 사악한 악행으로 고정된다.

    아버님은 나를 뼈저리게 저주하겠지.

    감히 자신의 연인을 망가트렸다면서, 심지어 죽게 만들었다면서 나를 원망할 것이다. 그리하여 아버님 마음속에서 나는 절대 용서하지 못할 인간으로 기억되리라. 그리고 나, 데이지라는 이름은 아버님에게 영원토록 악마의 대명사로 남으리라.

    하지만 상관없다.

    아버님을 구할 수만 있다면.

    파멸적인 종막에서 아버님을 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나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나는 일찍이 아버님을 세계로부터 구하기로 결심했다.

    이미 예전부터 알았다. 아버님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할 대상이 아니라 마음껏 증오를 쏘아댈 대상이었다. 이번에는 그 증오가 조금 더 거대해질 뿐이었다. '나의 역할'은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나는 의자에 않은 채 찬찬히 계획을 자아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내 사고는 투명했으며 또한 뚜렷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계획의 헛점을 보완해야 하는지. 마치 웅장한 건축물이 지어지듯 모든 방침이 빈틈없이 수립되었다.

    나는 포도주를 한 병 쥐어들고 마왕성을 빠져나왔다. 밤이 끝나고 새벽의 유리색 어스름이 대지를 뒤덮고 있었다. 나는 세찬 새벽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아마도 이때, 내 심장마저 차가운 유리빛으로 물든 것이 분명하겠지.

    좋다.

    이제부터 나는 역사를 속인다.

    평범한 사람은, 설령 계획을 짜더라도 완벽하게 실행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천 가지 의도와 만 가지 목적을 어깨에 짊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거운 몸으로는 결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반면에 나는 다르다. 내 목적은 오로지 아버님을 위해서. 단 한 사람을 위해서 세계와 역사를 속인다…….

    나는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시리도록 쓰린 향기가 입안을 가득 메웠다. 그것으로 밤새도록 입에 고인 피를 씻어냈다. 그리고 나는 땅바닥에 유리병을 던졌다. 유리가 찬란하게 깨졌다.

    오직 단탈리안을 위해서.

    아니, 나의 아버님을 위하여.

    나는 모든 생명과 영혼을 바친다.

    *  *  *

    먼저 제1단계에 착수했다.

    나는 아버님께서 파이몬을 죽이시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어차피 산악파와 평원파는 모두 몰락할 필요가 있었다. 두 파벌을 모두 구하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파이몬이 장차 어떤 방식으로든 아버님께 위협이 되리라는 사실은 나에게도 명백했다. 언제까지나 평원파-중립파-산악파의 균형이 이어지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런 의미에서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억측이 마냥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군무상서는 멍청하기 그지없는 금발녀였지만.

    아니나 다를까. 아버님은 파이몬을 죽이려는 순간 나한테 '나가라' 하고 눈짓했다. 하지만 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저는 아버님의 호위입니다. 이바르 양이 사라진 이상, 저까지 자리를 비울 수는 없습니다.”

    “정 그렇다면 연회장 입구에 가서 망을 보아라.”

    “의외입니다. 제가 있어야 할 장소는 언제나 항상 아버님의 바로 옆자리 아니었나요?”

    아버님이 입을 다물었다. 암묵적으로 내가 머무는 것을 허락한 것이었다.

    아버님은 파이몬을 순수하게 혼자서 죽이고 싶겠지. 파이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아버님 홀로 오롯하게 짊어지려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버님이 저지르는 악행을 지켜볼 의무가 있다. 아버님은 그걸 인정해주었다…….

    파이몬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말했다.

    “과연 대공들이 바르바토스가 아니라 단탈리안을 선택해줄지, 소녀로서는 약간 자신이 없어요……아. 물론 단탈리안을 믿지 않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전부 알아서 잘 하겠지요, 후후.”

    “걱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파이몬. 전부 진실이니까요.”

    “예?”

    핏물이 공중에 튀었다.

    아버님은 파이몬을 살해한 다음, 그녀에게 길게 입술을 맞추었다. 그리고 파이몬의 옷자락을 조금 찢었다. 아버님은 옷자락을 피에 붉게 적셔서 마치 손수건을 보관하듯이 품안에 집어넣었다.

    그녀의 죽음을 영원히 가슴에 지고 살겠다는 뜻이었다.

    “…….”

    확인했다.

    이 순간, 나는 아버님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님이 내게 각인시킨 명령은 모두 여섯 가지.

    나에게 해를 입히지 마라.

    내가 친애하는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지 마라.

    나와 그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결코 외면하지 마라.

    내 명령에 복종하라.

    너 자신의 삶보다 나의 삶을 우선하라.

    상기의 명령들을 언제나 절대적으로 준수하라.'

    방금, 아버님은 파이몬을 죽였다. '내가 친애하는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 때 결코 외면하지 말 것'이라는 명령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가 내 눈앞에서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노예각인은 반응하지 않았다.

    이건 깊은 의미를 가졌다.

    아버님이 자발적으로 원해서 '친애하는 사람'을 죽일 경우에 내 노예각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달리 말해, 노예각인은 '아버님이 친애하는 사람'보다 '아버님'을 훨씬 더 중요하게 인지했다.

    이것이 내가 제1단계에서 파악하고자 했던 바.

    첫 번째 고비는 다행히도 매우 순조롭게 넘어갔다. 아버님은 지금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저 방관자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라고 여기겠지. 시작이 좋았다.

    다음, 제2단계.

    나는 루크를 희생양으로 삼아서 실험에 착수했다.

    일부러 아버님을 내 침대 밑에 숨겼다. 그리고 루크를 불러들였다.

    아버님이 보기에는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짓거리로 보였으리라. 실상은 철저하게 계획된 범행이었다. 나는 오빠의 정신을 뿌리부터 파괴할 정도로 잔혹한 언행을 쏟아부었다.

    “그래서 오늘 진실을 말해주기로 결심한 거야. 루크. 내 오빠.”

    “아, 아아……아아아…….”

    “오빠는 친동생을 오 년 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수없이 강간한 개자식이야.”

    마음이 여린 오빠는 버티지 못하고 파괴되었다.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와중에도 내 노예각인은 반응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두 가지 결론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첫 번째. 루크는 '아버님이 친애하는 사람'였다. 나는 명령에 정면으로 대항해서 루크를 상처입혔다. 그런데도 노예각인이 반응하지 않았다. 즉, 우선순위가 아버님이기만 하다면, 나는 얼마든지 아버님의 친지를 상처입히는 것이 가능했다.

    두 번째. 내가 이런 일을 벌이는 광경을 아버님이 바로 코앞에서 지켜보더라도, 역시 노예각인은 반응하지 않는다.

    심지어 루크가 진실을 알고 타락하게 되는 것은 아버님의 계획, 루크를 장차 용사로 키운다는 계획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버님의 의사를 거슬러서 오빠를 망가트렸다.

    설령 아버님이 싫어하더라도, 설령 아버님의 계획에 반대되더라도, 내가 일단 아버님에게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하면……나는 노예각인을 뛰어넘어서 행동할 수 있었다.

    요컨대, 노예각인은 아버님의 판단이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나의 판단에 의해서 작동한다.

    성공.

    제1단계에 이어서 제2단계도 성공했다.

    오빠에게는 미안하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저질렀는지 깨닫는 것은 중요했다. 오빠는 본인이 자각했든 자각하지 못했든 나를 간접적으로 범해왔다. 지금부터 그 책임을 짊어질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제3단계.

    “미안해, 오빠.”

    나는 얼마 뒤에 루크한테 진실을 털어놓았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실수에 대해서. 파이몬에 대해서. 그리고 이대로 가다가는 아버님이 파멸하고 말 것이라는 진실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루크는 내 이야기를 시종일관 차분하게 들었다.

    내가 루크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부탁했다.

    “아버님을 위해서, 나와 함께 지옥으로 떨어져줘.”

    “……그러면.”

    루크가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그렇게만 하면, 데이지. 나를 용서해줄 거야?”

    “나는 처음부터 오빠를 원망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용서할 것도 없어.”

    “…….”

    루크가 두 눈을 감았다. 침묵이 한참이나 내려앉았다.

    루크는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오빠의 턱이 자그맣게 움직였다.

    “나는 아버님과 너한테 삶을 허락받았어. 그렇다면, 내 검도 아버님과 너를 위하여 움직이는 것이 당연해. 데이지. 나는 너의 명령을 따를게.”

    제3단계 역시, 성공했다.

    우리 남매는 서로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내가 루크의 등을 쓰다듬었고, 루크는 내게 안겨서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거기에는 죄악이 있었다. 용서가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을 위한, 강철과 같은 의지가 서려 있었다.

    이로써 계획의 절반을 달성시켰다.

    나의 극본은 나머지 절반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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