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44 DAISY =========================================================================
그날부터 고문이 이어졌다.
완전히 초보자라서 그런 것일까.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의 고문은 다른 의미에서 견디기 어려웠다.
“실토해라! 네놈이 주군께 위해를 가하고자 함을 내 눈치 채지 못할 줄 알았더냐!”
때리고, 내려치고, 후려갈기고. 도대체가 강약을 조절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채찍질이 내 살갗을 찢어발길 때마다 입에서는 비명이 터졌지만, 사실은 마음껏 비웃어주고 싶었다.
게다가 고문의 기본은 상대방을 죽지 않을 정도로 살려두는 것이었는데, 군무상서는 아예 음식과 물조차 주지 않았다. 중간중간에 고블린 집사가 몰래 약간의 스프와 식수를 전달해주는 게 전부였다. 아마도 라피스 라줄리 국무상서가 지령을 내린 것일까.
이해했다.
라피스 라줄리 국무상서는 이번 기회에 궁내부(宮內府)의 기강을 바로 잡으려는 속셈이었다. 언젠가 아버님이 정신을 차리면 군무상서의 만행을 알게 된다. 그때까지 여왕처럼 방만하게 굴었던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틀림없이 철퇴를 내려맞겠지.
그렇다면, 지금 이 고문을 담담하게 견디는 것 또한 아버님을 위한 일.
내가 아주 잠시만 희생하면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권위가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내궁의 권력은 라피스 라줄리 국무상서에게 집중된다. 국무상서라면 믿음직스럽다. 그녀는 유일무이하게 나만큼이나, 혹은 나보다 아주 약간 덜하지만 아무튼 충분히 아버님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흐.”
무심코 실소가 흘러나왔다. 군무상서는 정말로 멍청한 여자다.
내가 그녀를 비웃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는지 군무상서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아아, 당신에게는 딱 그 정도 표정이 어울렸다. 앞으로도 쭉 흉악한 악귀마냥 주름살을 구기고 다녀주기를 바랐다.
“하. 네놈, 지금 본녀를 비웃은 것이냐?”
“생각해보니……군무상서도 꽤 늙었군요…….”
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군무상서를 쳐다보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온몸에 기력이 떨어졌다. 하지만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구겨지는 군무상서의 얼굴 표정을 보자니, 애써 턱을 들어올린 보람이 있었다.
“스물셋……아니, 벌써 스물네 살이 되었나요? 이제 몇 년만 더 있으면 여자로서의 인생도 막바지에 접어들겠군요. 그때 가서는 아버님께서도 당신을 찾지 않으시겠지요. 외로이 독수공방하며 밤마다 자기 손으로 헐렁한 성기를 위로하실 군무상서를 떠올리니, 저도 모르게 그만 동정심이…….”
채찍이 내 가슴을 후려쳤다. 이래서 늙은 아줌마는 곤란했다. 농담을 몰랐다. 아마도 농담이 진담처럼 들리기 때문이겠지. 이해한다.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군무상서의 고문은 끊기지 않았다. 그러나 내 솔직한 심정을 밝히자면, 군무상서가 지하감옥에 들어오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매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냐하면 만일 아버님에게 변고가 생겼다면 군무상서가 이곳에 오지 못할 테니까.
군무상서가 한가하게 감옥에나 들락거린다는 얘기는, 달리 말해, 아버님이 무사하시다는 것을 뜻했다.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군무상서가 감옥의 철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나는 마음 속 깊이 안도하여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비웃음으로 착각하고 군무상서는 더욱 가열차게 매질을 가했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약속된 결말이 찾아왔다.
“감히, 감히 군부의 수장이 내궁부의 일원을 사적으로 처벌하다니!”
넝마짝이 되어버린 내 몸을 보고, 아버님은 일찍이 그랬던 적이 없을 정도로 강하게 진노했다.
“당장 가신단을 여기로 불러모아!”
나는 도중에 기절해서 직접 목격하지 못했지만, 아버님은 군무상서에게 손수 채찍질을 휘둘렀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국무상서까지 처벌했다. 즉――아버님에게는 역시나 내가 제일 소중하다는 것이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아니다.
라피스 라줄리도 아니다.
내가, 아버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
……설마 아버님 스스로 형벌을 짊어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아버님은 본래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행동에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을 졌다.
나는 한동안 아버님의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는데, 자칫하다 내 연기가 깨질까봐 두렵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설픈 탓이 아니리라. 아버님이 너무 고귀한 것이 문제였다. 그런 모습을 봐버리면 가슴을 진정시키는 것이 도리어 어렵지 않은가. 그래. 무심결에 일곱 번은…….
상스럽게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일까.
어찌되었든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의 권위는 대추락.
아버님께서 군무상서보다 나를 더 소중히 여기신다는 게 명백해졌으므로, 우리 두 사람의 형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군무상서는 예전과 달리 마왕성 복도에서 나를 마주쳐도 아무런 말을 건네지 못했다. 꼭 나를 보지 못한 것처럼 가던 길을 지나치려고 했다.
그녀가 사라지기 전에 내가 툭, 하고 말했다.
“주름살이 하나 늘어나셨군요, 군무상서.”
“…….”
“아니. 백의종군을 하시는 도중이니 군무상서는 아닌지요. 라우라 데 파르네세 양.”
군무상서가 고개를 돌려서 날 쳐다보았다. 무시무시한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제까짓 것이 노려보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일까. 나는 평소처럼 무뚝뚝하게 시선을 마주해주었다.
“슬슬 본격적으로 피부 관리를 받으셔야 하지 않을지요. 제가 솜씨 좋은 안마사를 소개시켜드리겠습니다.”
“……쓸데없는, 배려입니다, 시녀장 님.”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말을 뚝뚝 끊어서 대답한 다음 복도 저편으로 걸어갔다. 그래도 백의종군하는 자기 신세를 알았는지 나한테 존댓말을 썼다. 훌륭했다. 앞으로도 복도에서 마주치면 반드시 대화를 걸어줘야겠다.
내궁부의 신경전에서 이쪽이 완전무결하게 승리했다.
1승 0패.
나는 단순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반년이 흘렀다.
* * *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아버님이 제출한 안건이 부결되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7표에서 자그마치 4표가 노예제 해방안을 거부함으로써, 아버님이 야심차게 준비한 극본은 엉뚱하게 좌초하고 말았다.
게다가 안건에 반대한 마왕들에는 바르바토스가 끼어 있었다. 영문을 모르겠다. 설마 마왕 바르바토스는 아버님과 대립한 속셈일까? 건방지게도. 분수를 모르는 짓거리를 저질러주었다.
“…….”
나는 차분하게 아버님의 침실에서 대기했다. 아마도 아버님은 바르바토스와 독대를 나누는 중이겠지. 괜찮았다. 바르바토스가 무슨 변덕을 부렸는지 모르겠어도 아버님께서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실 리 만무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님은 한 시간 만에 침실로 돌아왔다.
복도가 어두워서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발걸음 소리가 아버지의 것이었다. 아버님은 왼발을 약간 저는 습관이 있어서 발걸음의 박자가 특이했다. 곧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기계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아버님. 어서……?”
돌아오세요, 하고 말하려다가 내 말문이 막혔다. 나는 허리를 들어올리면서 아버님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충격에 온몸이 굳어버렸다.
아버님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나는 이때 처음으로 아버님이 엉망진창으로 울부짖는 광경을 접했다. 아버님은 나를 지나쳐서 순식간에 침실로 들어가더니, 손에 잡히는 대로 모든 물건을 깨부수었다. 나는 머리가 멍해져서 다만 아버님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다른 사람 앞에서 약한 얼굴을 내비추지 않는 분이.
사방에 눈물을 흩뿌리면서 괴롭다는 듯이 절규하고 있었다.
어떤, 찢어죽여도 마땅찮을 년이.
감히, 나의 아버님한테 상처를.
머릿속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나는 분노가 극에 달하면 도리어 냉정해지는 버릇이 있었다. 정황상 바르바토스가 아버님의 요구를 거부한 것이 분명했다. 단지 거부했을 뿐만이 아니라, 아버님의 소중한 무언가를 망가트린 게 틀림없었다.
일단 아버님을 진정시켰다. 아버님이 울부짖는 소리 따위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차근차근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파악했다. 역시나 바르바토스가 아버님을 배신했다. 자신을 선택할 것인지 파이몬을 선택할 것인지, 양자택일하라며 아버님을 몰아세운 것이었다.
쯧.
내가 작게 혀를 찼다.
몸집이 작은 만큼 두뇌도 자그마한 그 꼬맹이가 언젠가 일을 저지를 줄 알았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궁내에서 여왕처럼 행세하는 여자라면, 바르바토스는 궁 밖에서 아버님의 부인인 마냥 주제도 모르고 콧대를 세우는 여자였다. 더 가관스러운 것은 두 사람이 애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이었다.
아마도 재수 없는 여자끼리는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마력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두 사람이 사이 좋게 아버님을 괴롭히고 있었다. 부디 죽을 때도 동반자살을 해주었으면 한다.
……아니, 잠깐만.
바르바토스는 왜 이 시점에서 아버님을 배신했을까?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왜 파이몬과 자신 둘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하라고 강요했을까.
바르바토스는 시건방진 애송이였지만 그래도 자기 자신보다 아버님을 중요하게 다루는 측면이 있었다. 단순히 아버님을 독점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난장판을 벌였을 가능성은 적었다.
이대로 파이몬과 밀월관계를 이어나가면 아버님이 위험해진다……그렇게 판단했기에 억지를 부렸을 거다. 다시 말해, 최근 들어서 파이몬이 아버님을 위협할 만한 행동을 보여주었다는 얘기다…….
“최근…….”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가장 최근에 파이몬이 아버님을 위협한 것이 무엇이지?
잘 모르겠다. 기껏해야 반 년도 더 전에 공화주의 대표회의에서 아버님을 거스르려고 했던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바르바토스는 그때 파이몬이 암약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파이몬에 대한 정보를 바르바토스한테 넘겨주었다면…….
“……!”
그때 내 머리에 한 명의 이름이 스쳤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 상당히 높았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파이몬이 독살 사건――사실은 그런 사건이 존재하지도 않았건만――에 관여했다고 믿었다. 아버님이 비록 내 손을 들어줌으로써 사건이 마무리되었지만,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진심으로 승복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즉,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파이몬이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애인인 바르바토스한테 '파이몬을 조심하라' 하고 경고했을 수 있다!
이야기가 성립한다. 이러면 말이 된다. 바르바토스가 필요 이상으로 파이몬을 경계하고, 이번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아버님을 배신하면서까지 반대표를 던진 이유. 전부 설명된다.
또, 쓸데없는 짓을……!
나는 곧바로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마왕성으로 향했다. 합스부르크 황궁에서는 순간이동이 불가능하므로 궁성 바깥까지 달려가야만 했다. 나는 신분표를 제시한 다음, 순간이동소에서 즉시 마왕성으로 이동했다.
목표는 마왕성 지하 10층.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침실.
나는 문손잡이를 비틀어서 문짝째로 날려버렸다. 쿵, 하고 소리가 울렸다. 마침 침대에 누워 있던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갑작스럽게 들린 소음에 일어났다. 나는 단숨에 도약해서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옷가슴을 쥐어잡았다.
“군무상서. 지금부터 제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십시오.”
“하.”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이런 상황에서도 코웃음을 쳤다. 담력 하나만큼은 대단한 여자였다. 하지만 내 손에 심장이 뚫려도 여전히 담력이 있을지 궁금했다.
나는 그녀의 몸을 잡아서 방바닥에 내팽개쳤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신음했다. 본래 아버님의 애인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이건 경우가 달랐다. 설령 애인일지라도 아버님께 위해를 가한다고 판단되면, 나는 언제든지 명령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상대를 배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명백하게 아버님께 위해를 끼칠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탄 다음,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목을 약하게 졸랐다. 우리 둘은 서로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드디어, 네 녀석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마왕 바르바토스에게 무슨 말을 건넨 것입니까. 마왕 파이몬에 관련해서 당신이 무언가를 경고했을 터입니다. 지금 당장, 저에게 솔직하게 고백하십시오.”
내가 싸늘하게 질문했다.
“당신이 파이몬에 대해서 바르바토스한테 경고한 바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이제 와서 안달복달하는 걸 보아하니 과연 찔리기는 찔리는 모양이구나. 천박한 배신자여.”
퉤, 하고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내 얼굴이 침을 뱉었다. 침이 내 눈밑에 적중해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그녀의 대답에서 확신을 얻었다.
――이 여자다.
이 여자가 모든 것을 어지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