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40화 (44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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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이란 단어는.

    나에게 언제나 배고픔과 치욕이라는 감정을 안겨주었다.

    네 살 무렵, 나는 세상에서 제일 비천한 출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화전민은 어느 국가에도 도시에도 소속되지 못한 떠돌이였다. 숲을 바짝 태워가며 살아가야 하는 화전민의 삶에 어딘가에 정착하고 머무르는 일 따위는 없었다.

    세상의 낭떠러지.

    나는 내 마을을 마음속으로 그렇게 불렀다. 끝없이 광대하게 펼쳐진 숲을 보고 있노라면 싫더라도 그런 감상이 들었다. 특히 겨울이 오면, 사방에 눈이 차곡차곡 쌓이면 마을은 한없이 고요해져서 때때로 모든 인간이 죽어버린 것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겨울.

    화전민의 겨울.

    춥고 배고파서――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만 하는 계절.

    “아주 잠깐이면 된단다.”

    “그래, 데이지. 이건 아무 일도 아니니까.”

    마을의 어른들이 내게 기묘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지나치게 성숙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이상하게도 나는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서 앞서는 구석이 있었다. 여덟 살이라는 나이에 비해 벌써 눈동자에 우수가 잠겼다. 아마도 그것이 어른들의 음심을 자극했겠지.

    외부에서 격리된 마을.

    그런 곳에서 과하다 싶을 정도로 아름답게 태어난 소녀.

    그 결말이 어찌될지는, 어느 정도 이미 정해져 있었겠지.

    저항할 수는 있었다. 얼마든지.

    하지만 내가 한 끼를 대신하면 그만큼 부모님이나 루크에게 돌아갈 몫이 많아졌다. 그런 사실을 간단하게 외면하기에는 내 머리는 계산과 이익이 밝았다. 나는 어른들이 내 몸을 가지고 노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데이지는 정말로 예쁘구나.”

    “어쩌면 살결이 이리 하얗게 들었을까.”

    부모님이 밭일을 나가고 루크가 동네 애송이들과 놀러 나가는 시간대면, 어김없이 마을 구석에서, 혹은 어느 오두막집 구석에서 예의 장난이 이루어졌다. 나는 내 몸을 정신없이 더듬는 남자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

    자기 그림자를 파먹는 들개 같아, 하고 생각했다.

    특별히 나 자신이 불행하다고 여긴 적은 없었다. 단지 차가운 겨울바람이 오두막집 외벽을 두웅, 두웅, 하고 둔중하고 느릿하게 두들길 때마다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왜 사람들은 죽지 않고 차라리 살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의 혓바닥이 내 살갗을 더듬거렸다. 마치 그것이 제일 맛있는 과일이라는 것처럼. 마을어른들이 하는 얘기에 따르자면 내 몸에서는 복숭아 향기가 난다고 했다. 설마 우리처럼 가난한 천민들이 복숭아를 먹어보았을 리는 없으니,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해본 말이겠지. 전부 거짓말쟁이니까.

    예컨대, 어느 가족의 부인이 죽었다.

    낮에는 약초를 따러 다니는 여자였다. 실종된 지 사흘 만에 산속에서 발견되었다. 늑대한테 온몸이 갈가리 찢겨진 채로. 남편은 절망에 빠져서 울부짖었고, 마을사람들은 참 안 된 일이라며 그를 위로했지만.

    사실은 남자들에게 간살당한 것이었다.

    패거리들이 내 몸을 가지고 놀면서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혼자 산길을 헤매고 있는 여자를 덮쳐서 죽을 때까지 범했다고. 그들은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세상에 도덕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눈앞에 명백하게 놓여 있었다.

    “어이, 너.”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패거리 중 한 명이 다가왔다. 알베르. 이 마을에서 암덩어리를 형성하고 있는 비밀 패거리 중에서 가장 난폭한 남자였다. 남자는 내 뺨을 후려쳤다.

    “뭘 잘났다고 쳐다보는 거냐. 우리 덕분에 겨우 겨울을 나는 창녀 주제에, 어디서 은인들을 깔봐.”

    “…….”

    “기분 나쁜 년 같으니.”

    퉤, 하고 남자가 내 가슴에 침을 뱉었다. 어차피 어른들의 침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기에 별로 효과는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나를 모욕했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했는지 도로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죄책감의 부재.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하는 솜씨.

    어떤 일이 벌어져도 남 탓으로 돌리고, 자기 책임으로 받아들이려는 자세는 실종된 인간들.

    나는 인간이란 본래 그런 것이라고 납득했다. 아마도 그들에게 뻔뻔한 처세술은 형편없이 짓눌린 인생을 살아가는 데 어느 정도 필수불가결한 도구이겠지. 침으로 얼룩진 내 허벅지에 다시 뜨겁게 달아오른 성기를 부비적거리는 남자들을 내려다보며, 나는 어떤 의미에서 안심했다.

    그리고.

    화전민촌이라는 이 기괴하게 비틀어진 세계는 가볍게 뭉개졌다.

    습격.

    학살.

    생전 처음 보는 골렘들이 마을을 포위한 가운데, 누군가가 조용히 걸어나왔다.

    “본인은 모든 마족의 주인. 서열 제72위의 마왕 안드로말리우스이다.”

    온몸이 새카만 남자였다.

    머리카락이 눈을 덮었고, 검은색 망토로 몸을 가렸다. 두 눈동자는 마치 우리를 시험한다는 느낌으로 천천히 주위를 흘겨보았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었지만, 이때 그는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있었다.

    “본인이 어째서 너희를 겁박하는가. 어째서 너희를 습격했는가. 그런 의문일랑 전부 내려놓아라. 지금부터 너희에게는 어떠한 질문도 허락되지 않으며, 오로지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야 한다.”

    갑작스럽게 침입을 받아 마을주민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남자가 여덟 명이나 죽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했다. 르네, 알베르, 쟝, 토비, 아벨, 브뤼노, 티보, 루씨앙…….

    당연히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전부 나를 장난감으로 삼던 남자들이었으니까.

    “위, 위대한 존재이시여.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촌장이 말했다.

    나는 속으로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방금 전에 검은색의 남자는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라' 하고 지시했다. 촌장은 지금 막 내려진 명령에 반항한 셈이었다.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의 부하가 단검을 던졌다. 촌장은 목 한가운데에 칼을 맞아 절명했다. 마을사람들은 비명을 질러댔지만 자업자득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마. 너희에게는 어떠한 질문도 허락되지 않는다. 오로지 본인이 질문하는 바에 대답할 의무만이 주어진다. 만일 본인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 경우 본보기로 한 사람씩 죽이겠다.”

    남자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제서야 남자의 진심을 이해했는지 모두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해력이 느린 인간들은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이중에 루크라는 소년이 있는가?”

    어째서인지 남자는 내 오빠를 찾고 있었다.

    마을주민들은 처음에는 저항했다. 모두가 침묵함으로써 위기를 넘기고자 했다. 그러나 남자는 그들보다 훨씬 더 교활했으며, 간단하게 마을주민들의 계책을 깨부수었다.

    “감히 본인의 명령을 귓가로 흘리다니 멋진 배짱이다.”

    남자가 가볍게 비웃음을 흘렸다.

    여기까지 나는 어느 정도 무심하게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남자가 왜 루크를 찾는지 모르겠어도 확실한 사실은 단 하나, 우리에게 반항할 힘이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를 이기지 못했다. 쓸데없이 저항하느니 이대로 가만히 있는 편이 이득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다음 순간에 나는 입을 벌렸다.

    “숲을 불태우며 살아가는 인간들이여. 그대들이 왜 죽어야만 하는지, 또한 루크라는 소년이 왜 죽어야만 하는지 알려주겠다.”

    남자는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주민들을 존중했다.

    그대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 내가 왜 그대들을 죽여야만 하는지, 또박또박, 천천히 말해주었다.

    “고로, 본인은 루크라는 소년을 죽이기 위해 이곳에 왕림했다. 그대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불행이리라. 본인도 군말을 더하지 않겠다. 본인과 여타 마왕들, 더 나아가 마족의 미래를 위해 그대들은 여기서 죽어주어야겠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우리들을 죽여버려도 상관없었을 텐데.

    마치 우리처럼 비천한 인생에게도 '죽을 이유'가 정당하게 필요하다는 것처럼, 남자는 정직하게 고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화전민촌에서 살아가는 거렁뱅이조차 어린 여자애한테 폭력을 휘드르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축으로 취급하는 것조차 간단했다. 저 앞에 서 있는 남자 정도라면 간단하게 주민들을 학살할 수 있을 텐데, 쓰레기로 여길 수 있을 텐데――남자는 도리어 우리를 인간으로 대했다.

    그 사실을 이곳에서 오직 나만이 알아차렸다.

    마을주민들은 여전히 공포에 덜덜 떨었다. 남자의 말이 귀에 들어가지 않는 모양새였다. 나는 놀라웠다. 어느 국가도 도시도 당신들을 사람이라 인정해주지 않았건만, 그것 때문에 당신들은 삶을 저주했건만, 정작 지금 눈앞에서 그 인정이 이루어지자 아무도 알지 못했다.

    “…….”

    나는 일어섰다.

    혹시 당신은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일까.

    자신이 저지른 악행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그것도 영원히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일까.

    자기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인가.

    “위대한 존재이시여.”

    내가 소리에 힘을 주어서 말했다. 남자의 검은색 눈동자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어린아이가 말을 걸었는데도 나를 깔보거나 오시하는 분위기가 전혀 없었다. 남자는 정면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는 무언가를 직감했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막연하게나마 확신이 섰다. 그가 나를 거부할 수 없고, 내가 그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 단 한번의 마주침으로 인해 명백해졌다.

    “감히 그 관용에 기대어서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말을 꼬지 않게 주의하면서 얘기해나갔다. 장담하건대 그때만큼 내 혓바닥과 입술에 신경을 집중한 적이 없었다. 나는 남자의 분위기를 세심하게 관찰하였다. 상대방 역시 나를 무서우리 만치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목소리로 남자를 두들겼고.

    남자가 목소리로 답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확신은 굳어졌다.

    “저는 왕의 관용에 기대어 아룁니다. 예언에서 얘기하는 소년이 루크 한 사람이라면 저희를 모두 죽이시지 않아도 됩니다. 부디 루크 한 사람만을 참하소서.”

    만일 당신이 내가 상상하던 대로.

    내가 간절히 만나기를 바라던 대로의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이 말에 반응한다.

    “단, 루크는 제 손으로 죽이는 것을 부디 허락해주시길 간청합니다.”

    잠시간 침묵이 가라앉았다.

    남자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한 가지 질문하겠다.”

    “무엇이든지, 위대한 존재이시여.”

    “친족을 죽이는 것은 가장 크나큰 죄악이다. 어째서 죄악을 자처하는가.”

    어째서 죄악을 자처하는가.

    그 질문이 핵심이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왜냐하면 그 질문은 동시에 시험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남자가 마을주민들을 개돼지로 취급했다면, 남자는 훨씬 더 손쉽게 우리를 학살할 수 있었다. 개돼지를 도축하는 데 무슨 대단한 이유가 필요할까.

    그러나 남자는 구태여 우리를 인간으로 취급했다. 개돼지를 도축하는 작업을 스스로 인간을 학살하는 악행으로 끌어올렸다. 둘 사이에는 아득한 간극이 놓여 있었다. 어째서 하필이면 죄악을 자처하는가. 그것은 내가 남자에게 질문하는 내용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위대한 존재이시여.”

    정답은 하나뿐이었다.

    “제 자신이 오라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쓰레기 새끼임을, 영원히 기억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어른들은 나를 창녀로 대했다. 어린아이나 다름없는 열 살의 여자애를 범했다. 그들은 '은혜를 베풀어주었다'라느니 '우리 덕분에 네가 살았다'라느니 변명해댔지만, 진실이란 그들이 소녀를 무자비하게 폭행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당신은 자기 스스로에게 변명할 수 없는 인간이리라.

    모든 것에 대해서 변명하고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과는 일선을 긋는 자이리라.

    “……고개를.”

    남자가 말했다.

    “고개를 들어보라.”

    그리고 우리는 두 번째로 눈을 마주쳤다.

    마치 세상에 우리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듯한 착각이 엄습했다.

    어느 겨울날, 나는 한 명의 마왕을 만났고――.

    잿빛으로 얼룩진 삶에서 처음으로 나의 동족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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