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39화 (439/510)
  • 00439 DAISY  =========================================================================

    나는 목소리를 집어 삼켰다.

    재차 입을 열어서 뻐끔거렸지만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어쩌면 십수 번을 그렇게 헛구역질과 같은 숨을 토해낸 다음에야 나는 간신히 하나의 문장을 주조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러나 말이라기보다 감정의 분출에 가까웠다.

    “그런 방식으로……나를 파멸시키려고 한 게냐…….”

    “당신은 인과(因果)의 괴물입니다, 아버님.”

    내가 실제로는 아무것도 질문하지 않았음을 알았을까. 데이지는 대답하는 대신에 자신의 얘기를 이어나갔다.

    “당신은 근본적인 착각에, 하나의 거대한 윤리적인 착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만약 이런 표현을 더 선호하신다면, 당신께서는 그야말로 착각의 육화(肉化)이십니다. 당신이 태어났을 때 온 세상의 악마들은 찬송가를 불러대며 축제를 벌였겠지요.”

    데이지가 입가를 뒤틀면서 미소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러는 동안에도 내 머리 한 구석에는 녀석을 관찰하는 시선이 남아 있어, 데이지의 눈짓과 몸짓에서 과장스러운 연극적 어조를 감지하고 있었다.

    “아버님은 신과 같습니다만 거꾸로 뒤집히고 비틀린 신입니다. 아버님과 같이 도덕의 왕국을 역설적으로 이룩해낸 사람은 일찍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출현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범행, 고백, 선언은 전부 '나다! 내가 이 일을 저질렀다! 내가 여기에 있다! 나야말로 이 사건의 주인이다'라고 소리칩니다.”

    데이지가 아주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인사하는 것 같기도 했고, 시선의 각도를 비틀어서 이쪽을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아버님의 헌신에 경의를 표합니다. 제 무례를 용서하시길. 저는 아버님의 악마적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낭만적인 희생극에 지쳤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께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한 것입니다.”

    “선물……?”

    “저는 이 자리에서 선언합니다.”

    데이지가 대검을 한층 더 똑바로 치켜세웠다.

    데이지의 매끄러운 입술에서 광장 전체를 울릴 것만 같은 노호가 터져 나왔다.

    “당신은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망가트리지 않았습니다. 그건 당신의 착각. 그 붕괴에 원인이 있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바로 저 데이지 폰 커스토스이며, 고로 당신은 그에 대해서 책임을 질 자격도 권리도 없습니다!”

    차가운 목소리가 매섭게 분출했다.

    “파이몬을 죽음으로 몰아세운 사람이 아버님 자신이라는 것 또한 웃긴 착각에 불과합니다. 진실한 범인은 저입니다. 당신의 고뇌, 당신의 슬픔, 당신의 상처――아버님의 모든 것은 단 하나도 빠짐없이 오롯하게 저에게서 비롯했습니다. 안 됐군요, 아버님.”

    데이지의 두 눈동자가 희열로 번들거렸다. 승리자의 시선. 무엇보다도 정복한 자의 시선이었다.

    “당신께서는 더 이상 자신이 두 사람을 몰락시킨 주범이라고 자부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있기 때문에! 모든 죄악을 당신의 어깨로 짊어지겠다는 환상은 유리잔처럼 깨졌습니다! 방금, 당신을 파멸시키려고 했냐고 질문하셨습니까?”

    데이지가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이 무슨 착각인지요. 정반대입니다. 저는 당신을 시시한 파멸에서 구해주려는 것뿐입니다. 이제 아버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아버님이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예. 양자택일입니다.”

    데이지가 반쯤 비스듬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첫 번째. 이 세상에 '나'라는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슬슬 인정하십시오. 당신의 위악이 아슬아슬한 곡예라는 걸 자인하시지요. 물론, 아버님에게 이런 선택은 불가능하겠지요……알고 있습니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진즉에 도피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첫 번째가 도저히 안 되겠다면, 두 번째.”

    데이지가 말했다.

    “제가 모든 일의 범인이라는 걸 인정하십시오.”

    “…….”

    “파이몬, 제파르, 벨레드, 당신에게 소중한 이들을 앗아간 것은 다름 아니라 저입니다. 당신은 한낱 가련한 꼭두각시 인형이자 피해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연극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다면, 당신이 가련한 조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십시오.”

    물론, 하고 데이지가 말했다.

    “――그것도 불가능하겠지만.”

    데이지가 크게 웃었다. 소리를 내어서 웃었다는 얘기가 아니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감출 수 없는 웃음소리가 팽팽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녀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웃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아버님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양자택일의 구조가 아닌지요. 그렇습니다. 아버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역설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아버님은 상대방을 지배했지요. 그리고, 이제는 제가 아버님을 가질 차례입니다.”

    마치 체스판이 요동치듯이.

    여태까지 하수인에 불과했던 졸병이 마지막까지 내달려서 마침내 여왕으로 변하듯이.

    데이지가 고했다.

    “이제부터 아버님의 고통은 모조리 제 것입니다. 아버님의 악몽도, 어쩌면 숨결까지도 온전히 제 것입니다. 당신은 저에게 삶 전체가 저당 잡혔습니다. 아버님께서 세상의 악마가 되겠다면――저는 오직 아버님만의 악마입니다.”

    광장에 약한 바람이 불어 데이지의 흑발이 살며시 흩낱렸다.

    나는 충격에 사로잡혀서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그저 데이지가 남긴 여진에 몸을 떨었다. 우리 둘 사이에 침묵이 훑고 지나간 다음, 내가 입을 열었다.

    “아직 마지막 선택이 남아 있다.”

    나는 더없는 분노를 담아서 데이지를 노려보았다.

    “네 년을 죽인다. 그리 되면 나는 다시금 내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게 된다.”

    데이지가 미소를 지었다. 어째서인지 녀석의 입술도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와 같이 분노로 인해서 떨리는 것이 아니라, 주체할 수 없는 성취감으로, 승리에 대한 도취로 떨리는 것이었다.

    “요컨대, 이제부터 아버님의 삶은 저를 죽일 수 있느냐 없느냐로 전부 결정된다는 얘기로군요.”

    “…….”

    “아버님이라면 틀림없이 그리 말씀하시리라 믿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제가 바라던 바입니다. 드디어, 저는 여기까지 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제 치욕과 고통은 모두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있었다고 해도 좋습니다.”

    데이지는 대담하게도 두 눈을 감았다. 그녀는 가만히 자신의 온몸이 환호하는 것을 잠시 내버려두고 그대로 느끼는 것 같았다.

    “파이몬이 아닙니다. 엘리자베트 통령도 아닙니다. 바르바토스도 아닙니다. 오직 저만이. 제가 아버님을 살해할 권리와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들이 도대체 아버님의 '무엇'을 죽일 수 있다는 말입니까……생명? 기껏해봐야 목숨입니까? 아아, 모자랍니다. 그것만으로는 아버님을 죽일 수 없습니다.”

    데이지가 눈을 떴다.

    그와 함께 데이지는 광소했다. 단지 큰웃음만이 광소는 아니라는 것을 이때 깨달았다. 단락적으로. 마치 일부러 발음을 끊어서 흘리듯이, 아핫, 하핫, 하고 데이지는 짧게 웃음들을 내보냈다.

    “그들은 아버님을 절대로 죽일 수 없습니다! 이로써 제 맹세는 완전무결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아버님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세계 전체,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 저 하나뿐! 그렇기에 아버님의 신념을, 고통 자체를, 인격 자체를 말살할 수 있는 사람도――오로지 저 하나뿐!”

    데이지가 왼손을 치켜들었다.

    그 순간, 광장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시민들이 비명을 질렀다. 내가 데이지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곁눈으로 광장을 바라보았다. 짙은 먼지구름에서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 그림자를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금발의 남자아이.

    정갈하게 집사복을 차려입은 소년은, 데이지의 오라비이자 내 노예일 터인, 루크였다.

    루크는 자신의 키만큼이나 거대한 대검을 두 손에 쥐고 있었다. 대검에서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광장에 테러를 감행한 것이리라. 데이지뿐만 아니라 루크마저 노예각인의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뜻인가……!

    “데이지……!”

    “실례하겠습니다.”

    바람이 가르는 소리와 함께, 데이지가 바알의 대검을 휘둘렀다. 칼날이 순식간에 거대한 원을 그리면서 데이지의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중립파 마왕들의 무기를 절단냈다. 대검에 서린 오러는 마왕들의 가슴을 찢었다.

    네 명의 마왕이 가슴을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핏물이 사방에 튀어올랐다.

    일격.

    단 한 번의 호흡만으로 데이지는 중립파 마왕들 네 명을 무력화시켰다. 아무리 바알의 대검을 쓰고 있다 하더라도 가히 압도적인 무위였다. 그러고도 데이지는 가볍게 파리들을 치웠다는 듯 여유로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얼 그리도 심각한 표정을 짓고 계십니까? 거대한 비극이 일어나기라도 했습니까? 오히려 아버님께서 꿈에도 그리던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어서 저를 칭찬해주십시오.”

    내가 이빨을 악 물었다.

    “나의 명령이다! 자결해라, 데이지!”

    “아하.”

    데이지가 작게 웃었다.

    “죄송하지만 그 명령에는 복종할 수 없습니다. 아버님. 바로 제가, 가장 비천한 노예이자 화전민의 핏줄을 타고난 여자아이가 오롯이 당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했습니다. 가장 강력한 자들이 모두 당신을 처단하기 위해서 달려들게 될 것입니다.”

    데이지가 대검을 가뿐하게 네 번 휘둘렀다.

    그러자 데이지의 발 밑에서 신음하고 있던 바르바토스가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칼날이 바르바토스의 사지를 잘라버린 것이었다. 그것과 더불어서 바르바토스의 두 팔과 두 다리를 묶어두고 있던 마력봉인구도 절단되었다.

    어째서 명령이 통하지 않는 것인가. 데이지는 아직도 내 노예였다. 그런데 어째서, 데이지는 물론이고 루크까지 나를 방해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데이지가 공손하게 한쪽 치맛자락을 잡아들고 허리를 숙였다.

    “아버님은 자신의 알량하고 이기적인 환상을 만족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켰습니다. 이제부터 대가를 치를 시간입니다.”

    “무슨 짓을 할 속셈이냐……!”

    “그걸 기대하면서 기다리시는 것 또한 아버님의 낭만적인 삶을 즐겁게 치장해줄 향신료가 아니련지요.”

    데이지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는 바르바토스의 옷덜미를 우악스럽게 끌어당겼다. 바르바토스는 바닥에 끊임없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미 뿔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당장 바르바토스가 감당하기에는 상처가 너무 심각했다.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부디 안녕히 계시기를. 저는 최고의 무대를 마련하기 위해서 잠시간 아버님 곁을 떠나겠습니다. 술은 적당히 드시고 마약도 슬슬 끊으시지요. 술과 약에 취한 정신으로 마주해도 좋을 만큼 저는 가소롭지 않습니다.”

    그때, 하나의 검이 데이지를 향해 쇄도했다.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데이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방심한 것처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데이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검을 치켜들어서 공격을 막았다. 공격이 날아온 곳에는 시트리가 서 있었다.

    시트리가 이를 씹으며 말했다.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지만……네 년이 우리 언니를 죽이는 데 일조했다는 거지?”

    “예. 일조한 정도가 아닙니다. 만약 제가 없었다면 파이몬이 개처럼 죽을 일도 없었겠지요.”

    데이지가 시트리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부외자는 꺼져주십시오. 감히 인형이 주제도 모르고 끼어들다니.”

    가볍게, 데이지가 대검을 비틀었다.

    데이지의 검을 뱀처럼 휘감도 있던 시트리의 사복검이 유리처럼 산산조각 나며 깨졌다. 장력에 의해서 버티고 있던 시트리가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무릎을 꿇었다. 아직 시트리는 지난 번에 입은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본래 공주님을 약탈하는 것은 마왕의 역할이라지만.”

    데이지가 바르바토스를 허리에 안았다.

    “가끔씩은 역할이 뒤바뀌어도 상관없겠지요. 당신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여인을 인질로 빌려가겠습니다. 외롭다고 너무 울지는 마시길, 아버님. 당신의 딸이 부끄러워지니까요.”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