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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438화 (438/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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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머리에 열기가 차올랐다. 눈이 뜨거워지면서 내 입에서마저 과열된 숨결이 새어나왔다.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단 하나.

    언제나 환하게 웃는 라우라였다.

    자신만만하고, 대체로 만사에 귀찮아서 꼴사나운 얼굴로 하품을 하고, 가끔씩 질색하며 나를 매도하지만 결코 내 요망이나 소망을 거부한 적이 없고, 영원히 내 동반자이기를 자처한……나의 작은 군사 아가씨.

    ─ 미안해요, 주군. 미안해요…….

    ─ 소녀 때문에, 소녀 때문에 주군이 채찍질을…….

    라우라가 눈물을 흘리면서 절규한 그날 밤의 기억이.

    무언가가 망가진 것처럼 나한테 끊임없이 미안해요, 미안해요, 하고 사과하던 라우라의 모습이. 그 모든 음울하게 빗물에 젖은 색채의 기억이 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네가, 나의 라우라를.”

    “군무상서는 제 의도를 충실히 따라주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노예각인의 헛점을 하나 발견했으니까요. 아버님이나 아버님의 연인들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끼칠 수는 없을지라도, 간접적으로 의심암귀와 상해, 내분을 유발시키는 것은 가능했습니다.”

    단지 그 사실을 알아보기 위하여 데이지는 라우라를 망가트렸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겠지. 녀석의 심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라우라는 유일하게 내가 평대를 허락한 아이였다. 다시 말하자면 라우라와 나는 일반적인 군신 관계를 뛰어넘어서 친우로서, 연인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대했다.

    데이지는 그 유일한 관계를 깨트리고 싶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래야 나에게 심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기에. 나의 정신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기에.

    “마치 한 줄기 빛이 보이는 기분이었습니다.”

    데이지가 덤덤하게 고백했다.

    “군무상서는 저를 지하감옥에 가두고 며칠을, 수십 일을 고문했습니다. 벽에 매달아두고 하루에 눈물만큼 작은 양의 물만을 주었습니다. 돼지들에게 주는 사료를 음식이라며 제게 먹였지요. 하지만 그 상황에서, 제 머리만큼은 어느 때보다 희열을 느끼면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데이지는 작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원래 아버님과 제 내기판은 압도적으로 저에게 불리했습니다. 저는 아버님에게 상처를 줄 수도 없었고, 심지어 아버님의 연인들에게도 해를 끼치지 못했습니다. 패배하는 것이 정해진 노름판에서 하나의 탈출구, 한없이 좁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출구인 것이 확실한 빛줄기가 내려왔습니다. 저의 기쁨을. 저의 환희를 이해해주시겠지요.”

    “…….”

    “어두운 지하감옥에서 돼지 사료를 먹으면서, 구역질에 토를 하고 살갗이 채찍에 벗겨지면서, 그 와중에도 저는 어떻게 하면 이 헛점을 이용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아버님을 파멸시킬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행복하다, 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데이지는 어조가 완만했다. 자그마한 즐거움이 녀석의 목소리에 묻어나오고 있었다.

    인간의 아이로 태어나 마왕의 딸이 된 소녀는 나지막하게 자신의 악행을 밝혀나갔다.

    “사흘 정도 지났을 무렵일까요. 저에게 미친 듯이 매질을 내리치는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를 보면서 문득 깨달았습니다. 거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번개가 제 온몸을 핥고 지나간 것처럼 저는 떨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부 알아버렸습니다.”

    십할의 확률. 본래라면 지는 것이 확정된 게임에서 데이지는 기적적으로 승리패를 엿보았다.

    “이렇게 단순한 사실을 잠깐 잊어버렸다는 것이 도리어 부끄러울 정도였습니다. 제 눈앞에서 울부짖는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는――마왕 바르바토스의 연인이지 않습니까.”

    침묵이 감돌았다.

    당혹스러운 침묵이 아니었다. 인식의 간극에서 생겨나는 침묵이었다. 데이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당당하게 말을 했고, 나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서 입술을 벌렸다. 내 시선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는지, 데이지가 약간 재밌다는 말투로 얘기했다.

    “바르바토스 말입니다. 아버님. 여기 있는 바르바토스요. 생각해보십시오.”

    데이지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바르바토스는 어느 날부터 아버님을 갑자기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원인이 궁금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바르바토스가 파이몬을 증오했다고 하더라도 암살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는지요?”

    그러자, 이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바르바토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너, 무슨…….”

    “당신은 닥치십시오.”

    바르바토스가 입을 연 순간이었다. 데이지가 대검을 내리찍었다. 대검은 정확하게 바르바토스의 허벅지를 찔렀다.

    바르바토스가 비명을 내질렀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데이지를 포위하고 있던 중립파 마왕들까지 움찔거렸다.

    데이지가 무표정하게 바르바토스를 흘겨보았다.

    “저는 지금 아버님과 대화하고 있습니다. 감히 제3자 따위가 끼어들 곳이 아닙니다.”

    “이, 개 같은, 년이…….”

    “당신에게 허락된 것은 하나의 대답밖에 없습니다. 바르바토스. 누가 당신에게 파이몬을 조심하라고 말해주었습니까?”

    데이지가 대검으로 허벅지를 찌른 채 그대로 칼날을 거꾸로 돌렸다. 칼날이 바르바토스의 속살을 깊이 파고들어 엉망진창으로 헤집었다. 바르바토스는 입술을 깨물어가며 비명을 참았지만, 끔찍한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데이지가 자그맣게 혀를 찼다.

    “대답조차 제대로 못하는 건가요. 쓸모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여자로군요. 고작 이런 버러지한테 반해버렸다니, 아버님. 딸인 제가 다 민망할 지경입니다.”

    내가 이빨을 으드득 씹었다.

    “당장 집어치워라……!”

    “방금 전에 아버님께서 하신 얘기를 또 뒤엎는군요. 앞으로 바르바토스를 모든 명령에서 제외시켜라. 바로 조금 전에 그리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데이지가 희미하게 조소했다.

    “저로서는 당황스러워서 어느 쪽의 명령에 복종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괜찮겠지요. 저는 효녀입니다. 아버님께서 바라신다면 기꺼이 불합리한 명령일지라도 받아들이겠습니다.”

    푹, 하고 데이지가 대검을 거둬들였다. 바르바토스의 허벅지에서 검붉은 핏물이 샘솟았다. 데이지는 귀찮다는 듯 칼날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분위기가 안 좋았다.

    데이지는 지금 명백하게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중립파 마왕들도 어느새 데이지의 목소리에 귀가 사로잡혀서 경계와 더불어 호기심으로 녀석을 쳐다보았다. 광장의 시민들은 술렁거리면서도 이 난입자의 대담한 짓거리를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막아야 한다.

    내 본능이 위험신호를 맹렬하게 보내왔다. 그러자 데이지의 흑빛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여기서 저를 막으실 생각입니까? 그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미리 알리겠습니다. 만일 여기서 제 발언을 막는다면, 아버님께서는 영원토록 제가 어떻게 노예각인에 반항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좋다면, 예. 얼마든지 저를 막으십시오.”

    “나를 협박할 속셈이냐.”

    “협박이 아닙니다. 그저 사실입니다.”

    데이지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저는 바르바토스를 제 손으로 참수하겠습니다. 아버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연인이, 아버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죽는 것입니다. 그것만큼은 절대로 견디실 수 없겠지요.”

    “…….”

    “이야기를 본론으로 되돌립니다.”

    데이지가 바르바토스의 허벅지에 오른발을 올렸다. 하필이면 대검에 헤집어진 부위에. 바르바토스가 입술에서 피를 흘리며 신음을 참아냈다.

    “이 여자가 대답하지 못한 질문을 제가 대신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르바토스는 누군가에게 다급한 경고를 들었습니다. 마왕 파이몬을 조심하라고, 이대로 가다가는 십중팔구 파이몬이 아버님을 살해하고 말 것이라고. 바르바토스는 이 경고를 들었기 때문에 파이몬을 배제하고자 움직였습니다.”

    아.

    “그 인물은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

    아아.

    아, 아아아!

    “군무상서는 안 그래도 마왕 파이몬을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합니다. 워낙에 파이몬이 아버님과 대립한 일이 많았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하필 아버님에 대한 독살이 시도된 장소가 바타비아의 총독 관저였습니다. 마왕 파이몬이 암약하는 바타비아 공화국의 관저 말입니다. 과연 군무상서가 이걸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했다고 보십니까?”

    데이지가 고개를 저었다.

    “군무상서는 한시라도 급하게 대책을 마련해야만 했습니다. 파이몬이 아버님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직접적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증거가 없다고 해서 아무런 방책을 준비하지 않을 정도로 아버님에 대한 군무상서의 사랑은 가볍지 않았습니다. 군무상서는 어떻게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마왕 파이몬을 막아줄 안전책을 고안했습니다…….”

    나는 머리가 뇌전에 당한 것처럼 마비되었다.

    턱 끝이 떨렸다.

    “아버님.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자부하시는 아버님. 저에게 알려주십시오.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가 누구에게 상담했을 것 같습니까?”

    “말도 안 돼……그럴 리가…….”

    “마왕 파이몬은 강대한 자입니다. 파이몬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그녀만큼 강력한 인물이어야만 합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가 경고를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친밀하며, 파이몬만큼 강력하며, 또한 동시에 파이몬을 위험시하는 자.”

    데이지가 오른발을 꾸욱 짓눌렀다.

    바르바토스의 미약한 비명이 터졌다.

    “그렇습니다. 군무상서는 바르바토스에게 경고한 것입니다.――파이몬이 아버님을 죽이려고 시도한 것 같으니 부디 주의해달라고.”

    지하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던 도중.

    데이지는 라우라의 혹독한 심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단 한 마디, 라우라의 마음속에 의심을 꽃피울 말을 딱 한 마디만 속삭였다고 한다.

    ――바타비아에선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까.

    그것은 데이지가 파이몬과 협력하고 있다는 심증을 강력하게 굳혔다. 적어도 라우라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라우라는 어느새 심증을 확신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가장 믿음직스러운 연인이자 아군인 바르바토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당연히, 하고 데이지가 말했다.

    “바르바토스는 파이몬을 예의주시했습니다. 라우라는 아버님의 최측근입니다. 그런 측근이 경고할 정도라면 상황이 심각하다고 여길 법하지요.”

    바르바토스가 파이몬을 죽여달라고 울부짖었던 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단순히 파이몬을 질투해서가 아니었는가.

    라우라는 파이몬이 공화주의 해방동맹의 수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약 라우라가 그 사실을 바르바토스에게 알려주었다면, 파이몬이 얼마나 용의주도하고 위험한 인물인지 말했다면, 바르바토스의 경계심은 극도로 높아졌을 터.

    바로 그 타이밍에 마왕군에서는 노예제 폐지 안건이 올라왔다.

    바르바토스의 눈에는 그것이 공화주의자인 파이몬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증거로 비추지 않았을까.

    그래서 위험을 무릅써서라도 파이몬을 없애려고 든 것인가.

    달리 말해.

    라우라가 의심암귀에 사로잡혀 망가진 것도.

    바르바토스가 필요 이상으로 파이몬을 경계한 나머지 결국엔 암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저질러버린 것도.

    내가 파이몬을 죽이게 되는 시점에 이르게 된 것도――.

    “물론, 그렇다고 바르바토스가 파이몬을 암살할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기껏해야 장대한 파벌 싸움에 돌입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만.”

    데이지가 미소를 지었다.

    “그건 매우 기쁜 계산착오라고 불러야 마땅하겠지요.”

    전부 데이지가 자아낸 함정이었다.

    ============================ 작품 후기 ============================

    오늘 전개를 감탄스러울 정도로 정교하게 예측하신 독자가 한 분 계십니다.

    그분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오늘 본문에는 그분의 닉네임을 알게 모르게 숨겨 놓았습니다. 문단의 첫 글자만 따로 읽어보시면 중간에 닉네임이 드러납니다. 제 작은 장난입니다! 헤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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