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37화 (437/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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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천치 벌거숭이가…….”

    내가 이빨을 깨물면서 데이지를 노려보았다.

    당장 고함을 쳐서 저 녀석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 하지만 분노는 언제라도 토해낼 수 있었다. 노예에 불과한 데이지가 어떻게 나의 행동을 방해했는지, 이변의 원인을 파악해내는 것이 먼저였다.

    이 순간, 이미 머릿속에서는 세 가지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내 두뇌는 명백하게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으며, 예상치 못한 사건에 당황하기보다는 도리어 환호하며 어느 때보다도 가열차게 돌아갔다.

    첫 번째.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데이지에게 협력했다.

    데이지는 시녀장으로서 이바르를 마음대로 다루었다.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모르겠어도 데이지가 이바르를 통해서 인형을 구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이바르는 자기가 인형술사라는 사실을 감추었지만 데이지라면, 이 태생이 교활한 독사라면 그 정도 비밀을 알아내는 것쯤이야 쉬우리라.

    망설임일랑 불필요. 곧바로 첫 번째 가능성을 점검해보았다.

    ‘상태창!’

    데이지의 상태창이 푸르게 떠올랐다.

    십수 회차를 넘어선 용사답게 무지막지한 숫자가 주르르 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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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데이지 폰 커스토스

    종족: 인간   주인: 단탈리안

    속성: 중립(0)

    레벨: 69    명성: 8133

    직업: 모험자(A), 검사(AAA), 암살자(S)

    통솔: 100/100 무력: 166/166지력: 117/125

    정치: 95/95  매력: 100/100기술: 81/81

    호감도: 0

    종속도: 0

    *칭호: 1. 전설의 모험자 2. 전설의 용병 3. 던전 브레이커

    *능력: 전술(A), 검술(AAA), 작전술(B), 설득(S), 기마술(S), 원소마법(A)

    *스킬: 의용병, 천리행, 필살무효

    현재심리: 호감도와 종속도의 영향으로 인해 표시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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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눈동자가 재빠르게 상태창을 훑었다.

    ‘아니다.’

    나는 작게 혀를 찼다.

    무력 및 매력 부문 이외에는 한참 능력이 떨어지는 루크에 비하여, 데이지는 통솔과 정치, 심지어 기술까지 정점을 찍었다. 제아무리 이바르라고 해도 이런 무지막지한 괴물을 인형으로 만들기란 불가능하겠지.

    지금 내 눈앞에서 대검을 치켜들고 있는 소녀는 데이지 본인. 틀림없었다. 나는 즉시 첫 번째 가능성을 폐기했다.

    아울러서 두 번째.

    데이지가 모종의 수단을 동원하여 노예각인을 해제했다는 가설 또한 동시에 무너졌다.

    상태창에는 나 단탈리안이 데이지의 주인이라는 사실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여기에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녀석이 무언가 모종의 수단을 동원하여 노예각인을 지웠다고 추론했다만 아무래도 틀린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천한 인간 주제에 난동을 부리다니!”

    그때였다. 중립파 마왕들이 데이지를 둘러쌌다.

    “감히 신성한 법정을 어지럽히고도 살아남으리라 생각했는가!”

    마왕들이 제각기 무구를 빼들었다. 그들에겐 갑작스러운 난입자를 용서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들이 데이지를 향해 달려들려고 뒷발에 힘을 준 순간, 내가 버럭 소리 질렀다.

    “이 아이는 나의 딸이다! 절대로 건드리지 마라!”

    시퍼렇게 날이 선 고함에 중립파 마왕들이 멈추었다.

    생각에 잠긴 나머지 무심코 반말을 쓰고 말았다. 실질적으로 내가 그들보다 아득하게 상위의 권력을 쥐어잡은 마왕이라고 하나, 표면상으로라도 상대방을 존중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 일단 상황을 정리하자.

    “……죄송합니다, 동지 여러분. 제 딸이 무례를 범했습니다. 이 죄, 사건이 정리되고 마땅히 무게에 따라 처벌을 받겠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물론이오, 단탈리안.”

    중립파 마왕들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그대를 불쾌하게 만들 생각이 추호도 없소이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는 뒤를 돌아서서 재판석에 앉은 마왕들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친애하는 선제후 전하들에게 아주 잠깐의 유예를 청하는 바입니다. 저 단탈리안, 반드시 이번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겠습니다.”

    마르바스가 진중하게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 얼굴을 찬찬히 감상하듯이 살펴보더니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대답이 없었다. 유예를 허락하되 단지 암묵적으로 허락해줄 뿐이라는 얘기였다. 고로, 나 역시 고개를 숙이는 것만으로 답례를 대신하였다.

    나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

    “…….”

    데이지와 나 사이에 대치가 이루어졌다.

    데이지는 마치 바르바토스를 지키는 것처럼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아까 전까지 시야를 흐릿하게 산란시킨 노이즈가 이제는 사라졌다. 덕분에 바르바토스가 똑똑히 보였다. 백발의 소녀, 긍지높은 마왕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식도에서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당장 한바탕 구토를 쏟아내고 싶었다. 그렇지만 데이지에 대한 분노, 나의 빈틈없는 계획과 여정을 중간에 끊어버렸다는 것에 대한 진노가 간신히 구역질을 가라앉혔다. 나는 단어 하나하나를 씹어내듯이 말했다.

    “네 년. 이런 곳에서 죽고 싶은 것이냐.”

    “저는 자살을 희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데이지가 즉답했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녀석은 이죽거리고 있었다. 그 시건방진 작태가 내 분노에 분노를 더하였다. 고마운 노릇이 아니고 뭔가. 헛구역질이 완전히 날아갔으니 말이다.

    “지금 아버님께서 고민하시는 것은 하나뿐이겠지요. 어떻게 당신의 의사를 거역할 수 있었는가. 정답을 아시겠습니까, 아버님.”

    “네 년에게 내려진 명령들.”

    내가 목소리에 노여움을 흘려보냈다.

    “그것들 사이의 충돌을 이용했겠지.”

    이것이 마지막 세 번째 가능성.

    데이지의 노예각인에 부여된 명령들은 다음과 같았다.

    나에게 해를 입히지 마라.

    내가 친애하는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지 마라.

    나와 그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결코 외면하지 마라.

    내 명령에 복종하라.

    너 자신의 삶보다 나의 삶을 우선하라.

    상기의 명령들을 언제나 절대적으로 준수하라.

    여기서 간단하게 추론되는 사실은, '내 명령에 복종하라'라는 사항과 '나와 내가 친애하는 사람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결코 외면하지 마라'라는 사항이 지금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것이었다.

    데이지는 나의 명령과 의사를 방해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바르바토스는 명백하게 내가 가장 친애하는 인물이었다. 데이지 입장에서는 '주인의 명령을 따르라'와 '바르바토스를 지켜라', 둘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했다.

    “과연 아버님입니다. 항상 그러하듯 이번에도 멋지게 착각하시는군요.”

    무표정한 얼굴. 그러나 눈가에는 상대를 모독하는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십중팔구 허장성세였다.

    건방진 녀석. 네 녀석이라고 해서 내가 봐주리라고 생각했다면 큰 착각이다. 감히 이런 자리에서 나를, 바르바토스를, 모든 마왕을 모욕한 죄과를 받아주마.

    “새로이 명령한다!”

    내가 확신을 담아 소리쳤다.

    “앞으로 모든 지시에서 바르바토스만은 예외로써 제외시킨다! 명령에 있어서 바르바토스를 나의 연인으로 취급하지 마라! 그러니 즉시 대검을 내놓아라, 천치 녀석!”

    나는 손을 뻗었다. 데이지가 얌전히 바알의 대검을 되돌려주는 것을 기다리면서.

    그러나 1초가 흘러도, 2초가 흘러도, 3초가 흘러도――데이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명령에 반항하는 것에 극심한 격통이 몰려올 것인데도 눈썹조차 까딱대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로운 눈매로 나를 바라보았다.

    “…….”

    어째서.

    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인가. 왜 당연하다는 듯이 데이지가 내 명령을 위반하고 있는가.

    데이지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래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버님께선 멋지게 착각하고 계시다고.”

    “네놈……대답해라. 어떻게 명령에 반항하는 것이냐.”

    “아쉽게도 '그 명령'은 저에게 유효하군요.”

    데이지의 목소리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뉘앙스는 역시나 조소였다. 녀석은 나를 도발하고 있었다. 뻔한 도발이었지만, 동시에 확실한 방법이었다. 나는 이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상당히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차분하게.

    데이지는 쓸데없이 상대를 도발하는 녀석이 아니다. 나를 분노에 휩싸이게 해서, 내 판단을 마비시켜서 무언가를 얻으려는 것이다. 녀석이 숨기고 있는 목적이 있다. 여기서 넘어가서는 데이지의 의도대로 춤을 춰주는 꼴이 된다.

    “처음에는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였습니다.”

    “……무슨 헛소리냐.”

    “라우라 데 파르네세. 아버님께서 아끼시는 규중 아가씨 말입니다. 그새 잊어버리셨습니까?”

    봐라. 말 끝마다 나를 조롱하는 악센트를 주고 있었다. 멍청한 것, 역효과였다. 그리 빤하게 도발해서야 내가 침착해지는 것을 도와줄 따름이었다. 내가 가르쳐준 것은 어디에 잊어버리고 저리 어수룩하게 나와는지 한심했다.

    하지만, 라우라라니. 이것만은 의문이었다. 왜 라우라의 이름이 언급되었는가. 내 머리가 차가워질수록 의문은 더욱 깊어졌다.

    “저는 아버님의 명령이 어디까지 유효한지 시험해보고 싶었습니다. 오 년 전부터, 각종 독극물과 함정을 동원해보았지요. 다만 '아버님께 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수단'은 어떻게 해서도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건 익히 알고 있었다.

    데이지는 틈만 나면 홍차에다 몸에 해로운 물질을 섞곤 했다. 문제는 차마 독극물이라 부르기에 부끄러울 정도로 효력이 미약한 약물만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나는 마왕. 자체적으로 독을 해소하는 체질을 갖고 있었다. 데이지가 건네주는 약물 따위는 수천수만 번을 섭취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저는 역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버님이 아니라 아버님 주위의 인물을 뒤흔드는 것은 유효하지 않을까, 하고.”

    “뭐……?”

    “기본적인 발상입니다. 적군의 요새가 지나치게 강대하고 견고할 경우, 주변의 위성 요새들부터 공략한다. 친히 아버님께서 가르쳐주신 전략이 아닌지요.”

    데이지가 여유롭게 얘기를 이어나갔다.

    “라줄리 국무상서는 파고들 틈이 없었습니다. 제레미 스승은 아버님께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았지요. 반면에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는 아주 적절한 사냥감이었습니다. 저는 그녀와 단 둘이 있을 때마다 아버님을 험담했습니다.”

    “…….”

    “너무 노골적이어서는 곤란했습니다. 그저 아버님에 대한 화제가 입에 오를 때, 천천히, 착실하게, 제가 얼마나 아버님을 증오하는지 알렸지요. 아버님께 드리는 찻물에도 항시 장난질을 친다는 것도 말해주었습니다.”

    데이지가 자그맣게 입가를 올렸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시지 않았습니까? 군무상서는 본디 저를 마음에 들어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저를 경계하고, 꺼리며, 틈만 나면 트집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혹시 군무상서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버님의 양녀인 저를 괴롭히리라고 생각하셨는지요.”

    뜨거운 무언가가 내 목뼈를 타고 뒷머리로 치솟았다. 간신히 내려앉은 분노가 다시금 역류하고 있었다.

    “네 년……설마…….”

    “예. 제가 유도했습니다. 아버님께서 바타비아의 관저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쓰러지셨을 무렵,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는 적나라하게 저를 의심했습니다. 아버님께서 사흘이 넘도록 의식이 없으니 혹여라도 제가 중간에 장난을 친 것 아닌지 걱정한 것이지요.”

    데이지의 입꼬리가 그리는 곡선이 짙어졌다.

    “얼마 뒤, 군무상서가 저를 불러들여서 물었습니다. 네가 약물에 엄한 짓을 저질렀냐고. 저는 제가 깔아놓은 거미줄에 이 가여운 군무상서가 걸렸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대답해드렸지요. 비웃음을 흘리면서, 그녀한테 정면으로 말해두었습니다.”

    “…….”

    “제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증거는 있으십니까――하고.”

    데이지가 마침내 웃음을 흘렸다. 어쩌면 단순한 숨결이었을지도 몰랐다. 녀석은 시종일관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내 귀에는, 내 눈에는, 더없이 뚜렷한 비웃음으로 비추었다.

    “그랬더니, 그 여자. 간단히 미쳐버리더군요.”

    “…….”

    “아버님께도 꼭 보여드리고 싶은 광경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감히 내 주군을, 내 주군을, 하고 망가진 오르골마냥 쉴 새 없이 울부짖었지요. 그날부터 군무상서는 저를 고문했습니다만……솔직히 고문 실력이 너무 형편없어서 실소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내 손이 분노로 떨렸다.

    “어떻습니까, 아버님. 참으로 아버님께 지극정성인 여자가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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