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36 존재의 긍지 =========================================================================
나는 바르바토스의 유언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그녀가 남기는 말이 무엇이든지 나는 절대로 잊을 수 없으리라. 단순히 말의 외형만이 아니라 문장에 섞여든 뉘앙스와 숨결, 감정까지 계속해서 나와 함께갈 것이다. 바르바토스는 이제 나의 세계에서만 입을 열고 손짓을 하는 사람이 된다.
비록 그 입에서는 저주만이 흘러나오고 그 손짓은 목을 조를 뿐이겠지만, 괜찮았다. 그런 식으로라도 바르바토스를 계속 볼 수 있다는 것은 반대로 생각해서 행운일지도 몰랐다. 아니, 그렇게 되면 환영들을 인정하게 되는 셈인가……진퇴양난이로군.
바르바토스와 내가 눈길을 주고받았다.
“…….”
“…….”
진흙탕보다 더러운 내 시간에서 바르바토스만은 찬란했다.
마왕이란 땅바닥에 가볍게 내려앉은 먼지와 같아서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인격을 잃어버린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이다. 나의 마음조차 내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안드로말리우스처럼 도박과 술에 빠져 지내는 것이 도리어 정상이겠지. 하지만, 바르바토스는 마왕들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으로 견고한 자아를 갖추고 있었다. 그녀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는 마치 어떤 승리에 대한 교향곡으로써 ‘나는 바르바토스다, 내가 바르바토스다’ 하고 끝없이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거의 첫눈에 반해버렸다.
내가 너와 무엇이 다른 것인지, 바르바토스. 나는 여전히 알기 어렵다. 너는 바르바토스이고자 하면 할수록 너 자신에 대한 찬가가 밤하늘의 불꽃놀이처럼 퍼진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내가 나이고자 하면 할수록, 나 자신이 정해놓은 것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도리어 나라는 것이 사라지는가.
바르바토스, 나는 가장 깊은 눈물로 너에게 묻고 있다.
왜 너에게는 삶이 하나의 승리이고 하나의 축복인가.
왜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종착역인가.
나는 너를 사랑한다기보다 동경한다. 나는 다름 아니라 너와 같이 사는 것을 갈망했다. 나를 이해해달라――애당초 나는 이방인이었다. 나는 이 세계에 살도록 허락받은 자가 아니므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야만 했다.
그러나 내가 이곳에서 최초로 저지른 일은 무엇이었던가――살인이었다! 그 다음에는 학살이었다! 그날 이후로 내 생애는 오직 최초의 학살들을 정당화하는 데 바쳐졌다. 말하자면 나는 악인으로 살아가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길이 없었다.
바르바토스.
제발.
바르바토스.
“…….”
그리고 그녀는 사뿐하게 두 무릎을 꿇었다.
아무런 말이 없었다. 유별난 몸짓이나 눈짓조차 없었다. 바르바토스는 단지 내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바라보고 지극히 평범한 몸동작으로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나는 망연하게 그녀를 쳐다보다가 깨달았다.
유언 없이.
바르바토스는, 유언을 남기지 않고 죽을 작정이었다.
나에게 환영이 보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에. 자기가 뱉은 말은 무엇이든지 내게 주박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기에――바르바토스는 차라리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죽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나는 충격에 온몸이 마비되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너는 지금 내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자신을 사랑했느냐고 물어볼 수 있고, 마땅히 물어보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다. 아니. 최소한 너의 부하들, 평원파 마왕들이 어찌되었느냐고 질문하고 싶어서 미칠 것이다.
질문이 아니라 유언은. 유언은 어찌되는가. 바르바토스, 이건 너의 최후다. 수천 년 동안 살아온 네가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없을 리 만무했다. 오히려 천 마디 문장과 만 개의 단어로도 표현하지 못할 감정이, 원한과 감사가, 저주가 네 가슴에 도사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것을 포기한다……?
고작 나 따위에게 저주를 남기지 않기 위해?
겨우, 그런 이유로, 네가 살아온 모든 것에 대해서 침묵하겠다고?
“웃기지 마!”
내가 소리쳤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고함이었다. 그리고 또한 진심이었다. 내 몸은 이미 통제에서 벗어났다. 손이 멋대로 튀어나가 바르바토스의 머리카락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닫고 말았다. 바르바토스는 눈을 감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에게 최후의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는 더더욱 분노가 치밀어 올라 그녀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말을 남겨! 내 눈동자를 쳐다봐!”
나는 바르바토스의 뺨을 후려갈겼다. 그런데도 바르바토스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광장의 시민들은 이것이 막간의 고문극이라고 생각했는지 격렬하게 환호를 보내왔다. 나는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눈을 뜰 때까지 그녀의 발등을 짓밟고 뺨을 때렸다.
폭력이 이어질수록 광장의 열기는 더해졌다. 그러나 정반대로 내 주변만은, 마치 나와 그녀가 주변에서 격리되어버린 것처럼, 바깥의 열광도 손뼉소리도 옅어져서 거의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카핫.”
바르바토스가 웃었다.
“나한테 거짓말을 하기에는 천 년이 이르다고, 단탈리안.”
“거짓말이라니……무슨 헛소리야.”
“파이몬. 너, 그년이 유언을 길게 남길까봐 일부러 목덜미를 찔렀다고 말했지. 어설퍼. 그런 말도 안 되는 속임수로 이 몸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으면 넌 정말 멍청한 거야. 야아, 너무 감쪽 같아서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지만.”
바르바토스 슬쩍 눈을 떠서 나를 바라보았다.
“감옥에서 찬찬히 생각해보니까 말이 안 되더라구. 정말 유언을 듣기 싫었다면 목을 잘라버렸어야지, 안 그래? 아니면 거기 네 호위 꼬맹이한테 명령해서 파이몬을 죽이던가. 그런데 너는 이렇게 말했지. 목덜미를 한 번, 등을 한 번, 다시 뒷목에 한 번, 단검을 쑤셔 넣었다고…….”
바르바토스의 입가가 비틀어졌다.
“이게 무슨 뜻일까. 간단해. 단탈리안, 너는 파이몬을 껴안은 채로 죽였다는 얘기야. 자세가 그렇게 나오거든. 어라아. 이상하지 않아? 응? 뭔가 구린 냄새가 풍기는데 혹시 내 착각일까?”
“…….”
“환영에 시달리기 싫어서 재빨리 파이몬을 죽였다는 양반이, 정작 죽일 때는 파이몬을 온몸으로 부둥켜 안아서 죽여? 게다가 목을 그어버리지도 않고? 바보 단탈리안, 이거 모순이잖아. 말이 안 된다고.”
내 이빨이 떨렸다. 입안에서 피냄새가 느껴졌다.
“정반대였어. 단탈리안. 너는 파이몬이 유언을 남기지 못하도록 목덜미를 찌른 게 아니야. 오히려 가장 농축된 유언을 듣고자 그런 짓거리를 저지른 거지. 너는 파이몬과 제일 가까운 곳에서, 제일 모욕적인 방식으로 배신을 때리고, 제일 뼈아픈 저주를 들으려고 의도적으로 살해 방법을 선택한 거야.”
바르바토스가 코웃음을 쳤다.
“나를 기만하지 마. 난 그렇게 우스운 여자가 아니야. 파이몬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네가 원하는 대로 죽어줄까보냐. 멍청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똑똑히 들어.”
바르바토스가 내게 얼굴을 바싹 가까이 가져왔다. 그녀가 연하게 웃음기가 섞인 숨결로 속삭였다.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아.”
“…….”
“너를 신뢰한 것도 나야. 너를 좋아한 것도 나야. 너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주어서 배신당할 빌미를 준 것도 나고, 파이몬을 죽이라고 지시한 것도 나야. 그러니까 지금 내가 맞이하는 죽음은 온전히 내 책임이지, 단탈리안, 결코 네깟 남자 때문이 아니야.”
내가 굳어서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자, 바르바토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녀석. 그렇게 중얼거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래. 이 말만은 남겨줄게. 미안해. 단탈리안.”
“…….”
“미안해.”
무엇이 미안하다는 것일까.
도대체 그녀는 무엇을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아……으, 아…….”
어째서인지 눈앞이 흐릿해졌다. 사물이 뿌옇게 흔들렸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위험했다. 그녀를 죽이지 못하게 된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패배하고 말 것이다.
바르바토스를, 너무, 사랑하게 되어버린다.
안 된다.
그러면 안 된다.
나는 철두철미하게 악으로 남아야만 하는 자. 내가 사랑한다고 해서, 내가 죽이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걸 변명으로 삼아 도피해서는 안 되는 자다. 내가 지금까지 수없이 학살해온 목숨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저 역시 사랑을 하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라고 변명해서는 안 된다.
면죄부를 허락해서는 안 된다.
“이 바보가……뭐하는 거야.”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바르바토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내 귓가를 쓰다듬듯이, 그렇게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바르바토스의 목소리에도, 흐릿한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얼른 죽여, 개 같은 자식아.”
내 등을 떠밀어주는 그 한 마디에.
나는 검을 치켜들었다. 바르바토스의 마지막 모습을 뚜렷하게 담을 수 없다는 것이 한이었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녀를 죽여야만 했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이 아니라면 내가 그녀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바르바토스를 살해한다
당장이라도 놓쳐버릴 것 같은 검자루를 필사적으로 쥐어잡고.
당장이라도 무너져 쓰러질 것 같은 무릎을 필사적으로 세워서.
그녀의 목을 향해서, 망설임 없이, 일격에, 그녀를 죽인다.
“…….”
바르바토스가 목을 숙였다.
그것과 동시에, 내 칼날이 아래로 쇄도했다.
나는 처음부터 너와 만나지 않았어야 했다. 아니. 모험대가 쳐들어왔을 때 순순히 잡혀들어서 무명의 사형수에게 죽어버리는 편이, 훨씬 더 좋았을 터다. 적어도 너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 같은 건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누군가를 죽이기 전에 먼저 나를 죽여야만 했다.
차마 그것이 불가능했다. 사람들을 학살하면서까지 살고 싶었다. 그랬더니, 그렇게 살았더니, 어느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죽으면 안 되는 자가 되어버렸다. 개죽음이나 자살 따위는 허락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차라리 세상에 지옥이란 것이 있다면.
그때는 그곳에서, 반드시 너에게 미안하다고 고백할 테니까.
너에게 사과할 테니.
지금 너한테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나를 제발 용서하지 마라.
그리고 나는, 검을 마저 내리찍었다.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오른손이 튕겨져 나갔다.
잠시 뒤, 바알의 대검이 허공을 풍차처럼 날아다니다가 땅바닥에 깊이 박혔다.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내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는 악귀처럼 얼굴을 구기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죄송합니다.”
목소리가 들린 그곳에는.
“아버님.”
데이지가 발을 접은 자세로 나를 조용히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망연자실하게 녀석을 쳐다보다가 이윽고 상황을 파악했다. 바르바토스를 죽이려는 찰나, 데이지가 다리를 쳐올려서 내 손등을 튕겨버린 것이었다. 그 충격에 나는 대검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감히……네 년, 감히 무슨 짓거리를……!”
“수없이 고민했습니다.”
데이지가 내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새까만 눈동자가 오직 나만을 오롯하게 비추고 있었다.
“수많은 밤을, 차마 헤아리지 못할 시간 동안 고민했습니다. 당신이 저를 살려둔 이유. 제가 당신을 죽이지 않는 이유와 죽여야만 하는 이유. 어느 것이 올바르고, 어느 것을 선택해야만 하는지, 무수히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고 데이지가 말했다.
“이제 확실해졌습니다.”
그녀가 바알의 대검을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그러자 대검이 데이지의 마력에 이끌려서 그녀의 손아귀에 돌아왔다. 데이지는 나를 향해서 대검을 치켜세웠다.
“저는 당신을 막습니다.”
그리고 소녀는 흑발을 흩날리며 선언했다.
“제 이름은 데이지 폰 커스토스. 저의 모든 생명을 다하여, 마왕 단탈리안. 지금부터 당신을 가로막겠습니다.”
============================ 작품 후기 ============================
─ 챕터 <존재의 긍지>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