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34화 (434/510)
  • 00434 존재의 긍지  =========================================================================

    잠시간 도화선과도 같은 침묵이 흘렀다.

    제파르가 던진 폭언에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직후, 광장에서는 전에 없이 거대한 노성이 터졌다. 나는 다른 곳이 아니라 시트리가 앉은 곳을 재빨리 바라보았다. 시트리는 시종일관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본인이 유일하게 아쉽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뿐. 붉은 머리카락의 창녀가 죽는 광경을 직접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틀림없이 지고의 명화(名畵)와 같았을 테지. 그 더러운 년의 얼굴이 참혹하게 뭉개지는 모습을 보지 못하다니, 안타깝고 또 안타깝구나!”

    다만 손이.

    시트리의 왼팔이 덜덜 떨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서 제파르를 노려보았다.

    “지금 발언, 한치의 거짓도 없다고 맹세할 수 있습니까.”

    “맹세고 뭐고 이것이 진실이다. 내가 암살을 주도한 장본인이다. 벨리알을 만나서 산악파 내부에 분열을 획책한 것도 본인이었지. 멍청한 녀석, 자기 행선지 하나 제대로 숨기지 못해서 금방 탄로 나더군.”

    제파르가 코웃음을 치면서 시트리를 쳐다보았다. 눈가에 비웃음이 가득했다.

    “애당초 산악파란 그 정도 애송이들밖에 없는 집단……내가 나서지 않았어도 어차피 언젠가 꼴사납게 거꾸러졌을 것이다. 도리어 본인은 감사받아 마땅하다. 적어도 그년에게 고귀한 희생자라는 감투를 씌워주지 않았는가. 어디 뒷골목에서 후레자식들에게 간살당해도 할 말이 없을 여자였거늘――.”

    그때, 시트리가 괴성을 지르면서 제파르에게 달려들었다.

    시트리는 정성스럽게 치료를 받아 팔이 재생되었지만, 아직 다리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그 탓에 시트리는 짐승처럼 땅바닥을 짚고서 제파르를 덮쳤다. 시트리가 주먹을 치켜들어 제파르의 얼굴을 집요하게 때렸다.

    “내 언니를! 파이몬 언니를 모욕하지 마!”

    사지가 묶인 제파르는 속수무책으로 폭력에 노출되었다. 피가 튀었다. 중립파 마왕들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시트리를 붙잡았다. 마왕들에게 제지당하는 와중에도 시트리는 울부짖었다.

    “왜――다들 왜 언니를――!”

    시트리가 사냥꾼에게 잡힌 짐승처럼 연약하게 몸부림을 쳤다. 시트리에게는 확성마법이 걸린 아티펙트가 없었다. 광장의 시민한테는 그녀가 하는 말이 들리지 않겠지. 그러나 어떠한 웅변보다 처절한 몸짓으로 시트리는 절규했다.

    “내가 너희를 구해줬어! 너희 평원파 새끼들이 아가레스에게 전멸당할 뻔했던 것을 내가, 우리 산악파가 구원해줬어! 너희들 따위를 도와주는 게 아니었는데! 아가레스한테 죽도록 버려뒀어야 하는데!”

    아가레스가 가미긴과 함께 평원파를 향해 반기를 들었을 무렵.

    마왕군이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편성되는 것에 반대하고 무소속 마왕들이 대거 군사를 일으켰을 때, 평원파는 절멸의 위기에 처했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서열 제1위 바알 역시 암묵적으로 반란군을 편들어주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바알이 반란군의 배후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평원파는 군사적으로는 아가레스에게, 정치적으로는 가미긴에게 당해서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사면초가에 몰렸다.

    그때 평원파를 구원한 마왕이 다름 아니라 시트리였다. 숙적임에도 불구하고 시트리는 약속을 지킨다는 명목, 그 가볍고도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평원파를 도와주었다. 덕분에 평원파는 위기에서 벗어났으며, 평원파와 산악파 사이에 잠시간의 평화가 이루어졌다…….

    “은혜도 모르는 개자식들!”

    시트리가 이빨을 드러내며 고함을 쳤다.

    “최소한의 명예도, 약속의 의미도 모르는 돼지 새끼들! 전부 죽어버려! 전부……!”

    “제파르에 대한 심문은 이로써 끝마치겠습니다.”

    내가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서 끼어들었다. 중립파 마왕들이 제파르한테 다시 투구를 씌우고 단상에서 끌어내렸다. 투구에 의해 얼굴이 가려지기 직전, 제파르는 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무덤덤한 눈동자에서 나는 아무것도 읽어내지 않았다.

    그러나 시트리의 고통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제파르 다음으로 차례차례 끌려온 평원파 마왕들이 뒤를 이었다.

    “그렇다. 내가 파이몬을 암살했다!”

    “천박한 몸뚱어리가 갈갈이 찢어지도록 칼날을 쑤셔박으라 명령했지!”

    “바르바토스께서는 아무것도 모르셨노라!”

    전원.

    다섯 명 전원이 바르바토스의 무죄와 자신의 유죄를 선언했다. 그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파이몬을 처절하게 모독했다.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에게 원망이 쏠리도록.

    사흘 전, 나는 일일이 감옥을 돌아다니면서 평원파 마왕들에게 의심을 심었다. 바르바토스가 정말로 암살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이대로 재판이 진행된다면 십중팔구 바르바토스가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되리라는 것 또한 분명하게 각인시켰다.

    평원파 마왕들이 이런 식으로 나오리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평원파 마왕들은 바르바토스가 죽는 것을 방관하느니 차라리 자신이 희생되고자 했다. 거기엔 어떠한 열외도 없었다. 제파르와 벨레드를 비롯하여 전원이 자신의 유죄를 소리높여 주장했다.

    바르바토스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은 순수했다.

    그 순수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평원파 마왕들은 파이몬을 가리켜서 창녀라고, 더러운 년이라고, 죽어 마땅한 여자라고 소리쳤다. 그들에게는 파이몬 따위보다 바르바토스가 훨씬 더 소중하므로.

    “…….”

    결국 시트리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눈물을 떨어트렸다.

    누구도 죽은 사람의 명예를 지켜주지 않았다. 그 죽은 자가 이천 년이라는 시간이 넘도록 오로지 마족을 위하여 헌신했다는 사실을 누구도 기려주지 않았다. 시트리, 그녀만이 홀로 파이몬을 위해서 눈물을 흘렸다.

    도대체 몇 개의 마음이 교차하는 것일까.

    평원파 마왕들은 단지 바르바토스를 구하고자 자신들이 저지른 적도 없는 죄를 고백했다. 시트리는 그저 파이몬의 원한을 갚아주고자 모든 것을 바치고 있었다. 실제로 파이몬을 죽이고 바르바토스를 죽이려 하는 범인은 바로 이곳에 있는데도, 어느 누구도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훌륭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심문할 마왕을 호명했다.

    “동지 여러분. 이제 최후의 죄인을 이곳에 부르고자 합니다. 바르바토스를 소환해주십시오.”

    “승인한다.”

    중립파 마왕들이 바르바토스를 끌고 나왔다.

    바르바토스는 거의 헝겊에 가까운 옷가지를 걸치고 있었다. 더럽고 낡아빠졌으며, 누리끼리한 조각으로 간신히 몸을 가렸다. 두 손목과 두 발목은 쇠사슬에 단단히 묶였다. 처참한 몰골이었다.

    바르바토스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쇠사슬이 삐꺽거리며 그녀의 팔다리를 옥죄었다. 이미 살갗이 찢어져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르바토스가 핏물을 뚝뚝 흘리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연단을 향해 올라섰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 퍼억.

    무언가가 바르바토스의 백발에 부딪쳤다. 썩은 과일이었다.

    그것을 기점으로 연단에 가까이 서 있었던 마족들이 온갖 더러운 물건을 던지기 시작했다. 바르바토스의 근처는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되었다. 바르바토스는 붉고 끈적한 액체에 뒤덮였다.

    “비겁한 암살자!”

    시민들이 소리쳤다. 마계대공들의 증언에 의해서 바르바토스는 이미 유죄가 확정되었다. 평원파 마왕들은 조금이라도 바르바토스를 무죄로 만들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두 명이라면 모를까 평원파 마왕 전원이 자신의 유죄를 주장했다. 똑같은 범죄를 저지른 범인이 여섯 명이나 생겨버린 것이었다. 아무리 멍청한 사람이라도 평원파 마왕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과유불급이었다.

    평원파 마왕들은 바르바토스를 감싸주려고 노력했지만 그 노력이 너무나 노골적이었다.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주군의 과오를 덮어버리기 위해 거짓으로 증언하고 있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쳐놓은 함정이었다.

    만약 제파르 한 명이 자신의 유죄를 주장했더라면 역전의 기회가 있었겠지.

    만약 평원파 마왕이 모두 순순히 무죄를 고백했더라면, 우리는 절대로 암살을 저지르지 않았노라고 주장했다면 역시 기사회생의 기회가 있었으리라.

    하지만 어느 누구도 무죄를 고하지 않았다.

    평원파 마왕들은 그저 단순히 바르바토스를 내버려두는 편이 좋았다. 그녀를 외면하고, 암살을 실행했을지도 모르는 그녀를 매도하고, 알아서 자기가 살 길을 찾아나서는 편이 나았다. 그랬다면 모두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을 가능성 또한 작게나마 있었다.

    나는 평원파 마왕들의 충성심을 신뢰했으며, 고로 충성심을 이용했다.

    그 결과가 지금 바르바토스에게 쏟아지는 오물 세례였다.

    “…….”

    썩은 과일과 날계란에 바르바토스는 온몸이 얼룩졌다. 안 그래도 더러운 헝겊 조각은 더없이 더러워져서 차마 옷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머리에, 가느다란 팔뚝에, 새하얀 종아리에 물건들이 부딪쳤다.

    바르바토스는 한때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마족들에 의해서 능욕당하고 있었다. 성녀에서 마녀로 전락해버린 어느 여전사처럼. 그런데도 그녀는 묵묵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마침내 바르바토스가 연단에 올라섰다.

    내가 말했다.

    “바르바토스. 대공들이 그대의 유죄를 인정했습니다. 그대의 유죄는 거의 확정되었습니다.”

    “…….”

    “다만 평원파 마왕들은 이 범행이 당신의 지시로 인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암살을 기획하고 실행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이라는군요. 바르바토스, 그대는 범행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그리고 이것이 최후의 함정이었다.

    바르바토스, 너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나의 유죄를 폭로하는 것이다. 이번 암살이 순전히 나와 너의 계획에서 비롯했고, 파이몬을 죽인 책임 또한 우리 두 사람에게 있음을 주장한다. 나는 이 주장에 대해 반박할 생각이 없다.

    너와 깔끔하게 이 자리에서 죽을 생각이다.

    왜냐하면, 바르바토스. 너에게는 나를 죽일 권리가 있기에. 너와 동반자살하는 것은 나에게도 별로 나쁜 이야기가 아니다. 파이몬을, 그 아름다운 여인을 죽인 죄값을 함께 짊어진 채로 낙화하자…….

    다른 하나는 너가 홀로 모든 죄를 끌어안고 죽는 것이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평원파 마왕들이 유죄를 받아버린다. 그들은 저지르지도 않은 범행 때문에 처형당한다. 바르바토스, 네가 자신의 유죄를 주장해야만 그들의 무죄가 인정될 가능성이 생겨난다.

    선택해라.

    나와 함께 죽을지, 아니면 평원파 마왕들을 살릴지.

    바르바토스는 한동안 침묵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아? 그게 무슨 개소리야? 우리 애들이 파이몬을 암살했다니.”

    바르바토스가 얼굴을 들었다.

    온갖 잡다한 오물에 얼룩져서 그녀의 얼굴은 처참하게 더럽혀져 있었다. 그러나 황금색 눈동자만큼은 빛바래는 일이 없이 오롯하게 정면을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는데. 파이몬, 그년이 아무리 멍청하다지만 우리 애들처럼 둔한 애들한테 당할 만큼 머저리는 아니여서 말이야. 그년을 죽이려면 꽤나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단 말이야.”

    마족들에게 배신당하고 연인인 나에게까지 배신당한 바르바토스는.

    “우리 애들이 암살을 저지른 게 아니야. 바로 나, 전 서열 제8위이자 평원파의 주인이요, 세상에서 파이몬을 가장 증오하고 그년의 죽음을 가장 열렬하게 갈망했던 내가, 바르바토스가 파이몬을 죽였다.”

    바르바토스는 활짝 웃고 있었다.

    여느 때의 그녀와 같이 당당하고 아름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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