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31 존재의 긍지 =========================================================================
“…….”
“불쌍한 놈 쳐다보듯이 할 필요가 없어. 여기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무언가가 내 발목에 들러붙었다. 축축하고 눅눅한 그림자 같은 것이었다. 만일 내가 발목을 내려다보면 촉감이 즉시 사라지겠지. 하지만 그래서야 함정에 걸리는 것에 불과했다.
나는 이걸 개인적으로 간지럼증이라고 불렀다. 발목이 간지러워서 발목을 긁으면 이상하게도 허리가 가려워졌다. 허리를 긁으면 이번에는 또 어깨가 가려워졌다. 꼭 그처럼, 일단 저 그림자들에 시선을 줘버리면 한도 끝도 없이 이어졌다.
발목을 보고, 허리를 보고, 어깨를 보아서, 그렇게 그림자들을 쫓아내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 퇴로에 막히게 되었다. 분명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감촉만이 남아서 내 손목을, 발목을, 등을 쥐어잡아서 끌어당겼다.
벌레들이 온몸을 갉아먹는 것처럼.
별로 유쾌한 기분이 아니라는 사실만 말해두겠다.
“파이몬이 죽고 나서 넌 아무와도 자지 않았어…….”
바르바토스가 흐느끼듯이 중얼거렸다. 아니, 그건 흐느낌이었다.
“난, 그게 네가 나한테 싫증이 난 탓이라고 멍청이처럼 생각했어…….”
“아아. 여자들에게 질렸거든. 사람에게 질렸지.”
내가 연초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
“성욕이란 것도 정말로 사람한테 질려버리면 사라지는 물건이더군. 성욕에서 벗어난다는 게 이토록 기쁜 일인지 미처 몰랐지 뭐야. 흉악한 포주한테서 도망치는 데 성공한 창녀가 된 기분이라고 할까.”
“파이몬의 환영이 계속 비추기 때문이잖아……!”
나는 말없이 손수건을 꺼냈다. 실수로 붉은 손수건을 꺼냈는데, 그걸 도로 집어넣고 새하얀 손수건을 쥐었다. 그리고 바르바토스에게 다가가서 눈물로 엉망진창이 된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년이, 결국 그년이 너를 망쳤어……아아! 이럴 줄 알았는데! 이미 옛날에 알아차렸는데, 내가 바보같이 주저하는 바람에……! 진즉에, 너한테 말하지 않고 내가 죽여버렸어야 했어!”
“그만 울어.”
“어디야, 그년은 어디 있는 거야……나한테 달라붙어 있어? 네가 보는 여자마다 파이몬이 겹쳐서 보이는 거야? 아아, 단탈리안, 이 바보야……멍청한 개자식아…….”
내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네 얼굴은 아주 잘 보여.”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바르바토스가 생각하는 것처럼 상황은 그리 최악이 아니었다. 만일 내가 보는 여자마다 파이몬이 악령처럼 달라붙어 있었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내가 여자를 정면으로 쳐다보지도 못했겠지.
정반대였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사업적인 얘기를 나눠보자.”
파이몬은 내 등 뒤에 있었다.
오른팔로 나의 가슴을. 왼팔로는 나의 허리를 껴안은 채.
그녀는 턱을 내 오른쪽 어깨에 올려두었다. 덕분에 그녀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 흘러들었다. 고장난 오르골처럼 자신이 마지막으로 남긴 한 마디의 말을 되풀이하고,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했다. 간헐적으로. 마치 숨결을 내쉬듯이.
어깨와 가슴에서는 축축한 무언가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아마도 핏물을 의미하겠지. 비유하자면 조금 강도가 센 간지럼증이었다.
“나를 죽이지 마, 단탈리안…….”
“…….”
“나를 죽이면 안 돼. 제발. 차라리 동토(冬土)의 감옥에 영구히 가둬. 내가 죽은 모습으로 너한테 비추면 정말로 끝장이야……그런 걸 네가 견딜 리가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네 자신이 잘 알고 있잖아…….”
바보 같은 소리를.
바르바토스처럼 거물인 마왕을 동토에 가두어놓은들 위험부담이 너무나 컸다. 마계에는 바르바토스를 숭배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었다. 설령 파이몬을 암살했다는 죄목이 낱낱이 밝혀질지라도, 소수의 마족은 끝까지 바르바토스를 구하려 들겠지.
당연한 판단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도저히 짊어져도 괜찮을 부담이 아니었다.
내 무표정한 얼굴에서 절망적인 대답을 느낀 것일까. 바르바토스가 눈물을 쏟아내며 울부짖었다.
“차라리, 나랑 도망쳐……!”
손수건을 쥔 내 손이 멈칫했다.
“나랑 같이 도망치자, 응? 네가 모든 걸 짊어져야 할 필요가 대체 어디 있는데. 마계 어디론가……사람의 발길도 마물의 발길도 닿지 않는 곳으로 가서……수백 년을, 천 년을 지내다보면 전부 다 괜찮아질 거야.”
그렇게 바르바토스와 단 둘이서 지내는 것인가.
평범한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어, 한적한 산골에 오두막을 지어 그곳에서 살아간다. 마왕에게는 많은 식량이 필요하지 않다. 살림에 쫓겨서 바빠질 일도 없겠지. 소일거리로 농사를 짓는 것도 괜찮겠지. 이래 봬도 나는 농사에 재능이 상당했다.
아마도 바르바토스는 '뭐 이렇게 심심한 일에 열중하냐' 하고 비웃을 것이다. 열심히 농기구를 휘두르는 나를 옆에서 보며 깔깔거리겠지. 천하의 단탈리안이 결국 취한 직업이 농사꾼이냐고. 그러면서도 내가 일과를 끝마치면 '수고했어'라고 빙그레 웃어줄 거다.
영원과도 같은 평화가 흐르리라.
나는 매일 밤마다 악몽과 환영에 시달린다. 그런 나를 바르바토스가 부드럽게 안아준다. 낮에 비웃던 것과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한없이 상냥하게 미소를 지으며 내 등을 쓰담는다. 괜찮다고. 네 옆에는 내가 있다고. 언제든, 언제까지나, 언제라도, 내가 당신의 옆에 있어줄 테니 전부 괜찮아질 거라고…….
비극을 겪었지만 두 사람이 있으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해도 무너지지 않는 두 사람이 있다면, 설령 백 년이 걸릴지라도, 천 년이 소요될지라도, 우리는 틀림없이 견뎌낼 수 있겠지.
“단탈리안…….”
바르바토스가 애원하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무척이나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비웃는 것처럼 내 입끝이 일그러졌다.
이내 비웃음으로도 견딜 수가 없어,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내가 양손으로 바르바토스의 뺨을 잡았다. 행여라도 금이 갈까봐 두려워서 부드럽게 그녀의 살결에 손바닥을 올려두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나의 얼굴을 바르바토스의 얼굴에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나는 입을 비틀어서 히죽 웃었다.
“그 따위 미래가 가능할 리 없지!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내가, 이 단탈리안이 용납하지 않는다! 도망이라니! 도주라니! 꼴사납게 몰락하고 말았구나, 바르바토스!”
바르바토스의 눈동자에 악귀와 같은 웃음이 비추었다.
“내가 행복이라는 미명 아래 모든 것을 잊어버릴 사람으로 비추었다면 큰 오산이다! 왜, 사랑하는 이의 불행에 마음이라도 울적해졌느냐! 내가 온 세상의 불행을 짊어진 아틀라스로 보이기라도 한 거냐! 어설프다!”
내가 바르바토스의 턱을 잡아올렸다. 눈가에 고인 눈물이, 파르르 떨고 있는 눈썹이 너무도 가까이 있었다.
“쓸데없는 것에 정신이 팔리니까 그 모양이 된 거다――이치는 간단하다! 지금 이 자리에, 예전부터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이치는 단 하나뿐이다!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는 것이지! 그것조차 해내지도 못하는 자가 어찌 왕을 자칭하겠나!”
“단, 탈리안…….”
내가 큰소리로 웃었다. 웃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인간은 분노하고 저주함으로써 사물을 죽인다. 그러나 나는 웃음으로써 죽인다.
살아 숨쉬는 사십만 명조차 나를 막아서지 못했다. 사십만 명이 죽어서라도 나를 제지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말하자면 그것은 존재의 환지통(幻指痛)이었다.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 괴로움은 아무리 뚜렷할지라도 결국 나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그까짓 환영이 나를 침범하려 하다니 가당치도 않았다!
“나에게 왕이 되라고 충고했지, 바르바토스!”
나는 바르바토스의 눈동자를 바로 코앞에서 노려보았다.
“이것이 나의 대답이다. 나는 단지 지금 살아 있는 백성들에게만 책임을 지는 왕 따위는 되지 않겠다. 내가 죽인 생명들, 내가 학살한 목숨들, 그 모든 것들이 내 영토의 정당한 신민임을 이곳에서 선언한다!”
“아아, 아아아…….”
“행복과 평안 따위는 개먹이로나 던져주라지.”
내가 바르바토스의 턱에서 손을 거두었다.
“내일 모레. 니블헤임의 광장에서 처형식이 거행된다. 그것이 너의 처형식이 될지, 아니면 평원파 전원의 처형식이 될지는 순전히 네 증언에 달려 있다. 네가 저지른 암살 때문에 벨레드와 제파르까지 죽는 것을 원하지는 않겠지.”
“너에게는……그렇게 해서 너한테는 뭐가 남는데……?”
이런 순간까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나를 걱정하는 것인가. 정말로 어쩔 도리가 없는 여자였다.
누구보다 잔인하게 행동하는 주제에 정작 자기가 마음을 준 사람에겐 지나치게 부드러워졌다. 그것이 너의 단점이었다. 왕이라면 마땅히 평등해야 했다. 애인은 물론이고 최종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평등하게 재판해야만 했다.
그러지 못한 자는 결국 폭군에 지나지 않으며, 바르바토스, 너는 그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상냥한 폭군이었다.
“모든 것이 남는다.”
나는 오히려 환영들에 감사하고 있었다. 행여라도 내가 미치는 것을 방지해주고 있잖은가.
내 정신이 돌아버려서 이제껏 내가 무엇을 했는지조차 떠올릴 수 없게 되는 것을, 그런 우습지도 않은 정신병자 노인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을, 저 환영들이 철저하게 막아주었으니까.
잭이 저주하고 호크가 울부짖고 파이몬이 속삭일 때마다, 그럴수록 도리어, 내 정신은 뚜렷해졌으며 나의 이성은 날카로워졌다. 내가 다른 것에 한눈 파는 외도를. 예컨대 방금 바르바토스가 건넨 유혹에 넘어가는 짓 따위를 원천봉쇄했다.
물론 보는 각도에 따라서 나는 미쳤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누구나 어느 정도의 광기를 갖고 있기 마련이었다. 문제는 미쳤느냐 미치지 않았느냐가 아니라――거기에 패배하느냐 마느냐였다.
“걱정하지 마, 바르바토스. 내일 모레 처형식에서 칼을 잡는 사람은 나다. 너를 죽이는 역할을 설마 내가 다른 사람한테 넘겨줄 리가 없잖아. 확실하게. 변명할 여지가 없이 사형을 집행하겠어.”
“…….”
“우리 모두, 최후까지 책임을 지도록 하자.”
나는 그리고 등을 돌렸다.
내 시선에 따라 나를 바라보는 시체들의 시선도 움직였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옥문으로 걸아갔다. 뒤에서 바르바토스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탈리안, 안 돼……가지 마……제발, 단탈리안…….”
그건 아마도 울음에 묻힌 절규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소리를 끊어내듯이 철문을 강하게 닫았다. 쇳소리가 감옥의 복도에 오래도록 울려 퍼졌다. 외길로 단 복도에서는 데이지가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데이지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녀석도 바르바토스와 비슷한 감정을 눈동자에 담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으므로 나는 데이지의 왼뺨을 후려쳤다. 얄밉게도 데이지 녀석은 고개가 살짝 돌아가기만 했다.
“이제부터 나머지 평원파 마왕들을 일일이 만나봐야 한다. 갈 길이 멀거늘 뭘 맥빠진 눈길로 나를 보고 있느냐. 앞장서라, 머저리 같은 녀석.”
“한 가지만.”
데이지가 중얼거렸다.
“한 가지만 알려주세요, 아버님.”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제 마을에 살던 사람들도. 아버님께서 살해하신, 제 마을의 사람들도……비추는 건가요?”
“오냐. 아주 잘 비친다. 눈알이 파먹히고 입구멍이 창칼로 꿰뚫린 채 나를 저주하고 있구나. 어떠하냐. 이제 만족했느냐?”
내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나에게 동정심이 생기느냐? 용서해주고 싶다는 마음이라도 생겼느냐? 허면, 결국 네 의지는 그 정도에 불과하다는 얘기겠지. 그들의 죽음을 용서할 권리가 너에게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나는 망토를 끌면서 복도를 걸어갔다. 내 발소리와 또 다른 중얼거림이 뒤섞이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그림자들을 잠깐이라도 인정해버린 탓인지 오늘따라 유난히 녀석들이 어지럽게 떠들어댔다.
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나는 여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