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30화 (430/510)
  • 00430 존재의 긍지  =========================================================================

    *  *  *

    “…….”

    바르바토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쳤다.

    바르바토스는 약간 졸리운 듯 반쯤 눈을 감았다. 천장에서 매달린 채로 잠들면 피로가 거의 풀리지 않았다. 여러 의미에서 피곤하고 지쳤겠지. 바르바토스의 목소리는 어딘가 어슴푸레했다.

    “그리운 꿈을 꿨어.”

    “꿈인가.”

    “응. 그랬네. 제파르 녀석이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게 그쯤이었구나……예전부터 바보처럼 진지한 놈이었어.”

    바르바토스는 무엇이 재밌는지 쿡쿡 웃었다. 나는 연초를 뻐끔거리기만 했다. 그녀가 흘려보내는 웃음소리와 내가 피어내는 연기 사이에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나는 잘 알지 못했다.

    사방이 잿빛으로 틀어막힌 독방이었다. 항시 빗물에 젖은 응달마냥 서늘하고 음울했다. 우리 둘이 이런 곳에서 대화를 나누게 될 날이 오리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바르바토스도 똑같은 감상을 품었겠지. 손목에 걸린 쇠사슬을 장난스럽게 움직였다.

    “아, 아―. 결국 차여버렸네, 나. 이래서 남자 따위는 사랑하는 게 아니었는네. 나도 참 바보 멍청이라니까. 눈에 콩깍지가 씌어도 세 겹은 씌었어.”

    뿔이 잘리고 사지가 결박된 마왕이라기에는 한없이 태연자약했다. 그렇지만, 이게 바르바토스였다. 가슴에 긍지를 품은 암사자.

    “나를 사랑한 걸 후회하나?”

    “후회하지. 엄청 후회해. 나는 말이야, 애인을 차는 건 좋아해도 애인한테 차이는 건 정말로 싫어하거든.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당장 네 자식의 불알부터 박살낼 거야.”

    내가 웃었다.

    잠시 말없이 바르바토스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음악이 멈추었을 때처럼 내 심장 부근에서만 시간이 길게 늘어졌다. 그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다가 이윽고 활시위 끊어지듯 뚝, 하고 튕겼다.

    “내가 파이몬을 죽였다. 바르바토스.”

    “어? 알고 있어.”

    “아니야.”

    내가 고개를 저었다.

    “이 손으로. 직접 파이몬의 몸에 칼날을 쑤셔 박았다.”

    “…….”

    “파이몬이 흘리는 핏물을 내가 모두 내리받았어. 목덜미에 한 번. 등에 한 번. 뒷목에 한 번. 모두 세 번, 날카롭게 벼린 단검을 꽂아 넣었다.”

    나는 맨주먹으로 나의 목덜미와 등을 가볍게 두들기면서 시연했다.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찌를 때마다 파르르, 하고 말이야. 파르르, 하고 몸을 떨어대더군. 끝까지 버티려다가 안 됐는지 나한테 체중을 실었어. 정확하게 급소들만 노려서 공격했으니 숨이 넘어가는 것도 금방이었지.”

    그런 내 모습을 바르바토스가 망연하게 쳐다보았다. 바르바토스는 대공들이 파이몬을 죽였다고 알았다. 내가 그녀를 직접 살해했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나는 약간이지만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바르바토스가 멍한 표정을 지으면 난 항상 기분이 좋아졌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있지. 내가 일부러 목만 두 번 찔렀다는 거야. 피가 목구멍을 역류해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했거든.”

    “하아……?”

    “유언이다. 죽을 것 같으면 유언을 남길 거 아니냐, 바르바토스.”

    내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는 파이몬을 죽이기 전에 그녀한테 결혼반지를 선물했어. 행복은 방심을 의미하니까. 파이몬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방심하는 순간이지. 그래서 결혼반지를 준 다음에.”

    내가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들었다. 일찍이 직접 파이몬의 약지에 꽂아준 바로 그 반지였다. 나는 반지를 집게손가락으로 잡아들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찔렀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찔렀어. 어때? 조금 지나치게 참혹하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

    “파이몬도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너무 참혹하다고. 그러니까, 만일 파이몬이 유언을 남긴다면 틀림없이 나에 대해 온갖 저주를 토해낼 거란 말이지. 어떤 저주일지 도대체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어둡고, 깊고, 무시무시한 유언을…….”

    그걸 잠자코 들을 자신이 없었다.

    파이몬이 마지막으로 남긴 저주는 반드시 나의 뇌리에 쑤셔 박혀서 영원토록 지워지지 않을 것이었다. 파이몬의 저주는 환영과 환청으로 남아서 끊임없이 나를 원망하겠지.

    나는 나 자신의 정신력을 과신하지 않았다. 이미 상태가 꽤 위태로웠다. 환청까지는 어찌저찌 괜찮다고 넘어갈지라도 환영은 심각했다. 거기에 파이몬의 저주를 끼얹으면, 정말로 내 정신이 붕괴할지도 몰랐다.

    신속하게.

    유언을 남길 틈조차 없이.

    그렇게 살해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마력을 모조리 잃었다 한들 마왕은 역시 마왕이야. 딱 한 마디. 최후의 한 마디 정도를 남길 여력이 남아 있었지. 물론 너무 길게 얘기할 수는 없었어. 복잡한 어휘를 사용할 수도 없었고. 입에서 계속 피가 역류했으니까, 짧고 단순하게 말해야만 했다…….”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하기에 아무래도 한 마디의 말은 너무나 짧았다. 하지만 파이몬에게는 그같이 부조리한 유예만이 남아 있었다.

    생각할 시간조차 부족했다. 눈앞에서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 약혼자이기도 하며, 살인자이기도 한 남자에게 서둘러 유언을 남겨야 했다. 파이몬은 마지막 힘을 끌어내서 입을 열었다.

    “사랑해요, 라고 말하더군.”

    “…….”

    “그 여자. 자기 손바닥을 내 뺨에 갖다대고 말이야. 마지막으로 사랑한다고 말한 다음에 죽어버렸어.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어, 바르바토스? 단순한 고백이 아니야. 당연히 아니지.”

    내가 담뱃대를 입에서 빼어들고 히죽 웃었다.

    “그 여자는, 파이몬은,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정도로 긴박한 상황에서조차……제일 효과적이고 제일 잔인한 저주의 한 마디가 무엇인지 떠올리고 만 거다. 완벽하게 천재적이지.”

    “…….”

    “파이몬은 알고 있었지. 나라는 사람을 파멸시키는 데 굳이 수없이 많은 저주를 퍼부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악랄한 여자가 아니고 뭐냐. 본능적인 교활함이야.”

    바르바토스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슬퍼하는 것도 아니었고, 걱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단탈리안. 너……언제부터 환영에 시달린 거냐?”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나는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환영이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시치미 떼지 마. 난 전쟁에 집어 삼켜진 병사들을 수천수만 명이나 봤어.”

    바르바토스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자기가 살해하는 사람이 유언을 남길까봐 두려워서 빨리 죽인다니. 그거, 전형적으로 환영에 사로잡힌 살육자들이 보이는 태도야. 나한테 변명할 생각하지 마. 전쟁에 관련해서 나만한 전문가는 없으니까.”

    바르바토스가 내 눈동자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처음에는 악몽으로 나타났지? 그 다음에는 환청. 마지막 단계가 환영이야. 거기까지 증상이 악화되면 손쓸 방법이 없어. 언제부터였어? 얼른 대답해.”

    나는 가만히 바르바토스의 시선을 받아냈다. 더없이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바르바토스가 서서히 입술을 벌렸다.

    “말도 안 돼……아니, 너……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그런 상태로…….”

    “착각하지 마. 나는 아주 멀쩡해.”

    “그러니까 마약이랑 술에 빠진 게……잠깐만, 그건 월맹군 때부터……아니, 단탈리안. 나를 바라봐. 내 눈동자를 봐, 개자식아!”

    정말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바르바토스는.

    아까 전부터 계속 너만 바라보고 있지 않는가.

    “아……! 아아!”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던 바르바토스의 얼굴이 정리되었다. 혹은 더욱 비틀어졌다고 표현해야 올바를지도 모르겠다. 바르바토스는 순전히 경악에 물든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이걸……이렇게 단순한 걸 눈치 채지 못하다니……!”

    “내 착각이 아니라면 우리 둘 사이에서 대화가 성립하지 않고 있는데. 나는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바르바토스.”

    “단탈리안, 너, 사람이랑 대화할 때 상대방의 얼굴이랑 눈만 바라보잖아!”

    대화가 점입가경에 이르렀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히 사람과 대화할 때는 그 사람에게 집중해야지. 그게 예의 아니냐.”

    “진작에 알아차렸어야 했는데……내가 왜 그것도……너는 상대방을 바라보는 게 아니었어. 시선을 둘 곳이 상대방의 얼굴 정도밖에 없었던 걸, 그걸…….”

    “정신이 나간 사람은 아무리 봐도 내가 아니라 너인 것 같군.”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바르바토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몇 명이야! 몇 명이나 있는 거야!?”

    “아까 전부터 말하고 있잖냐. 네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 방안에서 죽은 놈들 면상이 몇 명이나 보이는 거냐고!”

    그러니까.

    이 방안에는 바르바토스와 나, 두 사람을 제외하고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데.

    왜 바르바토스는 이상한 주장을 고집하는 것일까.

    “사법거래다. 제파르가 너를 대신해서 죄를 뒤집어 쓰겠다고 말했다. 네가 공개석상에서 파이몬의 암살을 오직 너 혼자 기획했다고 증언하지 않으면, 평원파 전원이 사형당할 거다.”

    “고개를 돌려!”

    “너는 부하들을 사랑하고 있겠지. 평원파가 이대로 궤멸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면 순순히 죄를 고백하는 것이…….”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려봐! 빌어먹을 개새끼야! 내가 시키는 대로 시선을 어디 다른 방향으로 돌리라고!”

    바르바토스가 소리를 내질렀다. 아무래도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협상에 응하지 않을 속셈인 것 같았다. 내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독방의 한 구석이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자아. 됐냐. 네가 원하는 대로 고개를 돌려주었다. 이제 소원이 풀렸으면 나와 조금 더 건설적인 대화를…….”

    “거기서 뭐가 보여?”

    바르바토스가 끈질기게 물어왔다. 정말이지 거머리보다 악독스러운 여자였다.

    “그쪽 구석에 뭐가 보이는지 대답해.”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안 보여. 그냥 축축하게 젖은 돌벽이 있을 뿐이다.”

    “…….”

    “자아, 쓸데없는 망상으로 시간을 소비하지 말자고. 지금 우리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지 않냐.”

    내가 한숨을 참으면서 다시 바르바토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리고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바르바토스의 얼굴이, 지금껏 내가 목격한 그 어떤 표정보다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왜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나한테 아무런 말도 안 한 거야……. 내가 언제나 네 옆에 있었는데……한 마디 말만 해줬으면, 나한테 조금만 의지했으면,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

    “바보 단탈리안……그쪽 구석에는 고문도구들이 놓여 있어…….”

    더 많은 눈물이. 보다 많은 눈물이 궤적을 그리면서 흘러내렸다.

    “도대체 뭐가 네 시선을 '가로막고' 있는 거야……?”

    그곳에는.

    ――온몸이 피투성이인 시체들이 쭈그려 앉아 있었다.

    이 방안에만 수십 명이 나를, 바르바토스를 에워싸고 있었다. 창에 꽂혀서 매달린 시체들이, 참수당해서 머리밖에 남지 않은 시체들이, 핏물로 뒤집혀서 우리 두 사람을 포위했다. 대체로 그들은 앉아 있거나 형편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공통점은 하나.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때때로 저들끼리 속삭이기도 했는데, 대체로 내가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자그마한 소리였다. 머리통만 남은 시체가 얘기를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저들은 모조리 존재하지 않는 허깨비. 환상에 불과했다.

    “파이몬도 있구나.”

    바르바토스가 눈물에 흐려진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파이몬까지 보이는 거야. 그렇지, 단탈리안? 솔직하게 대답해줘……지금 네 눈에 파이몬이 어디서 비추고 있어……?”

    나는.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기엔 아무도 없어, 바르바토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