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29화 (429/510)
  • 00429 존재의 긍지  =========================================================================

    ――올려다본 하늘은 언제까지라도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

    소녀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코 끝에 매캐한 연기 냄새가 감돌았다. 희미하게 피냄새도 느껴졌다. 아무래도 또 전쟁터에서 잠들어버린 모양이라고, 소녀가 스스로 납득하였다. 뺨에서 무언가가 끈적거리길래 손바닥을 대보니까, 이게 웬걸. 검붉은 피딱지가 묻어 있었다.

    “어이.”

    두텁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것과 동시에, 축축한 물수건이 소녀의 얼굴에 부닥쳤다. 소녀는 수건을 쥐고 상대방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주 쥐 죽은 듯이 자더군. 간덩이가 큰 건지 머리가 빈 건지 모르겠군. 그러다가 패잔병한테 목이 베이기라도 하면 어쩌려는 거냐.”

    “안 죽었잖아.”

    소녀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얼마나 많은 핏물을 얼굴로 받아낸 것일까. 회색 수건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그중에서 어느 정도의 피가 자기 몸에서 나왔을지 소녀로서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러면 된 거 아니야?”

    “너무 아슬아슬해서 가만히 두고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오지랖이 넓네. 마왕답지 않아.”

    소녀가 무미건조하게 미소를 지었다.

    소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니까 이제 조금 시야가 보였다. 한없이 광대한 평원이었다. 수풀 한 포기 없이 삭막한 대지가 지평선까지 펼쳐져 있었다. 마법사들이 뭐라고 했더라, 하고 소녀가 문득 떠올렸다. 마력이 급속도로 낭비되면 이런 불모지가 형성된다고 했다.

    눈에 띈 것은 붉은 모래로 뒤덮인 대지뿐만이 아니었다. 시체. 수많은 시체가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어젯밤에 벌어진 전투에서 사망한 병사들이었다.

    “아직 마왕이 된 지 얼마 안 되어서 말이다.”

    “몇 살인데?”

    “글쎄. 나이를 세다 말아서……대충 아흔 살을 넘었나.”

    “완전히 꼬맹이네.”

    소녀가 실실 웃었다.

    딱히 상대방을 모욕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단지, 상대방이 너무 노안이었다. 회색 머리카락. 지긋하게 주름진 얼굴. 만약 얼굴로만 따지면 마왕들 전체를 통틀어서 제일 늙은이로 취급받을 기세였다. 그런데 실제로는 막내 중에서도 막내였다.

    “…….”

    “미안해. 무섭게 노려보지 마. 내가 너보다 이백 살이나 많다는 게 우스워서 그래. 뭐어, 이름이 어떻게 된다고 했더라?”

    소녀가 멋쩍게 뒤통수를 긁었다.

    “내가 사람 이름을 도통 못 외워서.”

    “어제도 그리 말했고, 그저께도 그리 말했다. 벌써 일주일이 지나지 않았느냐. 자기소개를 수십 번 해야 하는 나의 입장도 조금 생각해보는 게 어떤가.”

    “미안하다니까.”

    읏차, 하고 소녀가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찌뿌둥했다. 오래된 경첩처럼 관절의 마디마디가 삐꺽거렸다. 소녀는 허리를 이리저리 비틀면서 몸을 풀어주었다.

    “하지만 내가 나쁜 게 아니야. 모처럼 이름을 기억해봤자 전부 죽어버린다고. 특히 너 같은 신입 마왕은 말이지, 간단하게 모가지가 쓱싹 잘리거든. 어제 마왕이 몇 명 죽었지?”

    “내가 알기로 세 명이 전사했다.”

    “거 봐. 이번 주에 나자빠진 마왕만 스무 명이 넘는데, 걔네를 어떻게 일일이 다 기억해?”

    마왕과 용족.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지배자들의 혈투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마왕들은 자신들이야말로 마족의 군주임을 천명했다. 반면, 마왕의 지배력에 강력하게 대항할 수 있는 드래곤들은 이에 반발했다. 두 세력이 피로 피를 씻는 대전을 일으키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평범한 전쟁이 아니었다. 마왕과 용족은 각자가 이 세상에서 제일 고귀한 존재임을 주장했다. 둘 중 어느 하나가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벌이는 싸움. 말 그대로 절멸전쟁이었다. 물러설 수 없는 전쟁에서, 물러설 수 없는 자들이 무기를 쥐어들었다.

    소녀가 손가락을 들어서 하나씩 접었다.

    “어디 보자. 맘몬 아저씨는 사지가 찢겨서 죽었고, 베엘제붑 아줌마도 통째로 바싹 구워져서 죽었고, 벨페고르도 피부가 싹 다 벗겨져서 죽었고. 바알 아저씨는 반죽음 시체로 후방에서 죽을 준비나 하고 있고. 봐, 가장 잘났다는 놈들이 싸그리 다 당했잖아. 내가 네 이름 기억해봤자 어디 보름은 더 가겠어?”

    “나는 죽지 않는다.”

    노안의 마왕이 불쾌한 듯 말했다.

    “적어도 너처럼 죽으려고 환장한 것보다는 나중에 죽겠지. 맹세해도 좋다. 설령 내가 죽을지라도 너보다 먼저 죽지는 않을 것이다.”

    “거 웃긴 놈일세.”

    소녀가 인상을 찡그렸다.

    “알았어. 이번엔 정말로 기억해줄게. 이름이 뭐야?”

    “제파르.”

    남자가 소녀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제파르다. 영원히 까먹지 마라, 꼬맹이.”

    “누가 누구 보고 꼬맹이래. 백 년도 살아보지 못한 애송이가.”

    소녀가 수건을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나중에 빨아서 돌려줄 속셈이었다.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소녀라고 모를 리 없었다. 소녀가 기절하듯이 곯아떨어지자, 행여라도 변을 당하지 않도록 남자가 주변에서 번을 봐주었다는 것. 일부러 물에 젖은 수건을 준비해서 소녀에게 건네주었다는 것.

    아마도 남자는 죽겠지.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 마왕이 살아남을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용족을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마왕군의 피해가 너무도 심각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적수, 가장 강력한 용군주(龍君主)를 토벌하기 위해 진군해야만 했다.

    거기서 십중팔구. 아니, 반드시 남자는 죽으리라.

    그렇기에 의도적으로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지도 않았다. 죽는 것이 당연한 전장에서 서로가 서로를 인식해봤자 나중에 괴로워질 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신세를 졌는데 통성명조차 거부하기란 어려웠다……소녀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바르바토스야. 오늘도 죽지 않도록 노력해보자고.”

    “바르바토스.”

    남자가 그 이름을 되새기려는 듯이 천천히 읊었다.

    “그대에게 한 가지 물어보고 싶다.”

    “응? 뭐.”

    “수십만 명에 이르는 마족이 이번 전쟁으로 인해 죽어나가고 있다. 마계 전체의 피해까지 고려한다면 그야말로 경악스러울 수준이다. 이런 피해를 짊어지면서까지 전쟁을 치를 필요가 있는가?”

    소녀가 미간을 좁혔다.

    “뭐야. 좀 과묵하다 싶었더니 쓸데없는 고민으로 괴로워하는 철학자였나.”

    “나는 진지하게 질문하고 있다. 어차피 그대도 원해서 마왕이 된 것이 아닐 터. 언젠가 눈을 떠보니, 태어나보니 우연하게 마왕이었을 뿐이지 않는가. 그런 우리에게, 수십만 명의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권리 따위가 어디 있다는 말이냐.”

    남자가 뚫어지라 소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비교적 젊은 마왕에 속했다. 그러나 전쟁에서는 누구보다 압도적인 재능을 보여주었다. 소녀가 양손검을 휘두르며 나아가면, 병사들은 용기백배해서 산더미만한 덩치의 용족을 향해서 돌격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요컨대, 소녀에게는 목숨을 던져서라도 뒤따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남자는 거기에서 생각했다. 어쩌면 소녀는 의문에 대답해줄지 모른다. 병사들이 기꺼이 죽음을 바치는 소녀라면 그 죽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해줄지도 모른다…….

    “간단한 문제야.”

    소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왕이 다스리는 세상과 용족이 다스리는 세상. 어느 쪽이 마인들에게 더 행복할지 생각해보면, 정답은 저절로 나오잖아.”

    “행복……?”

    “그래. 우리 마왕들은 마인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어. 적어도 거짓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 알아볼 정도는 돼. 우리가 재판관이 된다면 최소한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로 처벌당할 사람도, 죄를 저질렀는데도 처벌당하지 않는 사람도 사라지겠지.”

    소녀가 빙그레 웃었다.

    “알겠어?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사라지는 거야.”

    “…….”

    “겨우 그것뿐이지만. 겨우 그것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지금 세상이잖아.”

    소녀가 하늘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움켜 잡으려는 듯이 꾸욱 주먹을 쥐었다.

    “이 세상에서 불행하고 억울하게 죽는 생명이 단 하나도 없어질 때까지. 나는 그때까지 싸워 나가겠어. 모든 것이 명확해지는 세상을. 죄를 지었으면 처벌을 받고, 죄를 짓지 않았으면 희생되지 않는 세상을 나는 원해.”

    그건 오직 우리만이 이룰 수 있는 이상이야, 하고 소녀가 말했다.

    “물론 거기까지 가는 데 수많은 사람이 죽을 거야. 그 생명들에 내가 책임을 질 방법은 사실상 없어. 그러니까――적어도 내가 가장 앞장서기로 맹세했어.”

    그렇기에 전쟁터에서 소녀는 누구보다 앞서 달려나갔다.

    마왕이라고 해서 누군가의 뒤에 숨지 않았다. 병사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았다. 언제나 최전선에 서서 병사들을 이끌었다. 마인들은 그런 소녀의 모습에 매혹되어서, 소녀의 진심 어린 행동에 감화되어서 뒤따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최후의 결전.

    그곳에서도 소녀는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양 날개를 가진 용족을 눈앞에 두고, 마왕들 전원이 굳어버렸을 때. 용족이 울부짖은 소리가 대지를 진동시켜 십만 명의 병사가 모두 공포로 사지를 떨었을 때. 바로 그때, 아무런 주저도 없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발자국을 내딛은 자가 그곳에 있었다.

    소녀는 백발을 휘날리며 자신보다 두 배는 거대한 양손검을, 자신보다 천 배는 거대한 용족을 향하여 휘둘렀다. 그 일격은 틀림없이 강철보다 단단한 용족의 비늘을 찢었다.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소녀는 피를 흘렸고.

    다시 한 발자국 내딛었을 떄, 어느새 수만 명의 함성이 소녀를 뒤쫓아서 쇄도했다.

    전투는 사흘 밤낮으로 이어졌다.

    모두가 지쳐서 쓰러져도 소녀만큼은 무릎을 굽히지 않았다. 이제 패배할 수밖에 없노라고 절망하여 멍하게 눈앞을 쳐다보면, 바로 그곳에서 소녀는 쉴 새 없이 검격을 날리며 거용(巨龍)의 눈을 잡아두었다.

    아마도 어느 한 순간은 소녀 혼자서 용에게 맞서 싸웠다. 주변에 누군가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소녀는 계속하여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만약 신화가 실존한다면, 그때야말로 신화가 펼쳐진 순간이겠지.

    자그마한 소녀가 자신의 검에 의지해서 홀로 용을 토벌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용이 내뿜은 불길에 타올라서 사라질 것 같았지만, 소녀는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불길을 피했다. 당장이라도 용의 발바닥에 짓눌려서 터질 것 같았지만, 소녀는 단 한 치의 거리를 두고 공격을 피해냈다. 그리고 끊어질 것 같으면서도 결코 끊어지지 않는 검격을 이어나갔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불멸.

    ――불멸의 바르바토스.

    결국, 마지막 용군주의 콧등에 칼날을 내리찍은 사람도 또한 소녀였다. 십만의 군세 중에서 팔만의 병사가 목숨을 잃어버리고 마흔 명의 마왕이 전사해버린 전쟁은, 소녀의 발걸음에서 시작하여 소녀의 검으로 끝났다.

    “…….”

    용에게 결정타를 날리자마자, 소녀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남자가 황급하게 달려가서 소녀를 부축했다. 남자는 이때 진심으로 소녀가 죽은 줄 알았다. 지난 사흘 동안, 소녀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혈투를 벌여왔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남자의 품안에 안긴 소녀는 작게 웃었다.

    “서로가 엉망진창이네.”

    “……아아. 정말이지, 엉망진창이다.”

    남자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진짜로 이번엔 죽는 줄 알았어. 어때? 나 조금 멋있지?”

    “부정할 수 없는 게 슬프군.”

    그 순간, 남자는 자신의 의문에서 해답을 찾았다. 이 소녀를 지킨다. 그녀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사수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마왕으로 태어난 의미임을 남자는 깨달았다.

    “너무 멋있어서 반했다. 나와 결혼해다오.”

    “뭐래, 애늙은이가.”

    소녀가 두 눈을 감으면서 희미하게 속삭였다.

    “수염이나 멋있게 길러봐. 그럼 고려해주지 못할 것도 없어.”

    그렇게 대전은 종결되었다.

    오래된 기억.

    한 명의 남자가 영원한 충성을 맹세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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