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27화 (427/510)

00427 황금의 몰락  =========================================================================

공개적으로 처형식을 거행한다.

평원파 마왕들에게 이보다 굴욕적인 죽음은 없었다. 저들은 일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았다. 숙적으로 인정한 적에게 검을 받아 죽는 것이야말로 이상으로 그리던 최후일 터. 하물며 광장에서 참수당하다니.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으리라.

치욕으로 온몸을 떨어대는 평원파 마왕들을 향해 내가 말했다.

“물론, 바르바토스에 비해서 다른 평원파 여러분에게는 큰 죄질이 걸려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전원을 처형하는 것이 어쩌면 지나친 처벌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조건을 내걸겠습니다.”

“조건……?”

“예. 뭣하면 사법거래라고 부르셔도 좋습니다. 이래 봬도 저는 한때 여러분과 함께 바르바토스를 섬긴 일원입니다. 그야 부당한 방법을 써서라도 여러분을 구해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사람이 조금 지나치게 좋군요. 마음의 군살입니다.”

사법거래라는 말에 공기가 어수선해졌다.

제파르 형님은 그러나 변함없이 분노로 가득차서 소리쳤다.

“뻔한 헛수작을……웃기지 마라! 각하에게 불리한 증언을 지껄이라는 것 아니더냐!”

“섭섭하군요. 제가 그렇게 악마적인 자식으로 보였습니까.”

평원파 마왕들이 만에 하나라도 바르바토스를 배신하고 증언을 위조하는 데 동참할 가능성은 없었다. 바르바토스에 대해서 그들은 진정한 충성심을 품었다. 내가 의도하는 것은 조금 더 단순했다.

“조건은 간단합니다. 이번 사건에서 여러분이 죄인 바르바토스와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해주십시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마계의 온 민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당당히 선언하는 것입니다. 본인들은 파이몬의 암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으며, 단 한 지점에서라도 관련하지 않았다고. 어떻습니까? 정말로 간단한 요구사항입니다.”

평원파 마왕들의 얼굴에 혼란이 찾아들었다.

당혹스러울 만했다. 내가 내건 조건은 단순히 간단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진실이기도 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순순히 인정해도 아무런 손해가 없는 그런 발언이었다.

그렇기에 의심의 꽃이 더더욱 피어났다.

“더불어서, 마르바스는 물론이고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선제후가 제 거래를 보증합니다. 바르바토스가 저지른 범죄 행각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만 인정해주시면 여러분께 어떠한 위해도 끼치지 않겠습니다.”

“…….”

왜 이렇게 단순한 요구사항을 제시하는가, 하고.

그들이 생각하기에 바르바토스가 파이몬을 암살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거짓이었다. 모함에 불과했다. 그 모함의 진정한 목적은 평원파를 작살내는 것……그렇게 판단하고 있겠지.

하지만 내가 방금 말한 요구조건은 평원파 마왕들이 믿는 시나리오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만약 암살건이 모함이라면, '평원파 마왕들도 암살에 관련되어 있다'라고 어떻게든 엮어버리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정반대로 '평원파 마왕들은 관련이 없다'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어째서.

왜?

“제파르 대장. 무슨 일입니까. 왜 갑자기 말씀이 없어졌습니까.”

“…….”

“아주 단순한 요구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생각하는 대로 바르바토스가 암살을 획책하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그저 '존재하지 않았던 암살 사건'에 본인들이 연루하지 않았음을 고백할 뿐입니다. 아무런 문제도 없지요.”

내가 빙그레 웃었다.

완벽하게 호인(好人)이 지을 법한 미소였다. 단지 이런 상황에서 호인의 웃음이란 도리어 기괴하고 뒤틀린 인상을 주었다. 지금쯤 평원파 마왕들의 눈에 나는 한없이 역겨운 배신자로 비추고 있겠지.

“만약 바르바토스가 정말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여러분은 암살과 전혀 상관없으니 역시 진실을 고백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보십시오. 어느 경우에서든 여러분께선 진실을 얘기합니다.”

“…….”

“제파르 대장. 여전히 저를 불경하다고 매도하실 것입니까? 저는 여러분을 위해 세상에서 제일 쉬운 사법거래까지 마련해왔습니다.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얘기하면 완전무결하게 무죄를 인정받는다니. 이런 기회는 좀처럼 없습니다…….”

어서 피어나라.

화려하게 개화해라.

열심히 머리를 굴려라. 이 정도 추리는 너희에게도 충분히 가능하다. 싸움질밖에 할 줄 모르는 평원파일지라도 이렇게까지 힌트를 주었다면 능히 정답을 생각해낼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의심해라. 자신의 믿음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봐라. 대단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정상적이고 올바른 사고방식이다. 다른 사람을 의심하는 게 쉬운 만큼,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평원파여. 너희의 문제점은 너무나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마왕에게는 별다른 통치술이 필요하지 않았다. 가만히 옥좌에 앉아만 있어도 마족들이 저절로 충성하고 복종하는 존재. 그것이 마왕이었다.  아무리 개판으로 다스려도, 백성을 돌보지 않아도, 마왕의 권력은 절대적……. 권력이 영원하므로 정치술은 태어나지 않았다.

통치가 사라진 왕좌에는 무엇이 남는가?

전쟁이다. 오로지 전쟁만이 남는다.

서열 제도 자체가 그것을 증명했다. 서열 제1위에서 제72위까지 평가하는 기준은 순전히 '얼마나 전쟁을 잘 수행하느냐'였다. 마왕의 세계란, 오직 전쟁에서 발휘하는 능력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해버리는 곳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니고 뭔가.

저들은 왕이었다. 그런데도 타인을 잘 다스리는 실력이 아니라 타인을 잘 꺼꾸러트리는 실력에 따라서, 서열과 명예가 전부 결정되었다……. 이래서야 마왕들이 수천 년 동안이나 서로 내가 잘났네 네가 못났네 분열을 일삼은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그런 마왕의 세계에서 평원파였다.

천부적으로 싸움과 전쟁에 관하여 재능을 타고난 자들. 전장에서 피를 흘리는 것에서 쾌락을 느끼며, 기마병을 이끌고 적군을 유린하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는 전투병기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마왕으로 태어난 것을 천명이라 여겼으리라. 당연했다. 자신들이야말로 마왕다운 마왕이라고 한치의 의심 없이 자부했겠지. 그리고 자신들보다 뛰어난 전사인 바르바토스를 숭배하는 데 어떠한 주저도 없었다…….

자신들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자체가 평원파 마왕들에게는 생소했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바르바토스가 걸어가는 길이 올바르다고, 정말로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았다.

명예로운 전사를 그리는 모습은 틀림없이 아름다웠지만.

그들의 아름다움은 그들의 맹목이었다.

이제 아름다운 꿈에서 깨어날 때다. 딱히 꿈을 살아가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멋지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지금 나에게 당신들의 의심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걱정하지 마라. 너희의 신념을 완전하게 부수지는 않겠다. 말하자면 너희는 지금 꽃봉오리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거기에 약간의 의심이 더해지면 바야흐로 꽃이 만개하는 것이다. 나를 믿어도 좋다. 이 분야에 관해서만큼은 내가 전문가다…….

“……그래서.”

마침내 제파르 형님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자네가 얻는 것이 무엇인가. 자네들은 어떤 이익을 얻느냐는 말이다.”

“죄송합니다.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익이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모른 척 반문했다. 노골적으로 모르쇠로 일관하면 되레 어색할 테니 단지 정중하게 당신의 질문을 다시 설명해달라고 요청했다. 암살자가 술에 독약을 타듯이 어디까지나 평범하게 행동했다.

“시치미 떼지 마라. 우리가 그런 발언을 해봐야 아무런 이익이 없지 않은가……!”

아니다, 제파르. 그게 아니다. 당신도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하는 경우는 오직 바르바토스가 정말로 모함을 당했을 때에 한정된다. 정말로 바르바토스가 암살건을 저질렀다면――당연하게도 당신들의 선언은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마르바스와 중립파의 목적은 순전히 바르바토스를 단죄하는 것이니까.

정치적인 모함이 아니다. 증언을 거짓으로 조작해내서 평원파를 파멸시키려는 것도 아니다. 마르바스는, 중립파는, 그저 정도(正道)에서 벗어나 파이몬을 암살해버린 바르바토스를 처벌하려는 것이다.

그뿐.

바르바토스 이외의 평원파를 처벌할 이유는 없으므로. 오히려 무죄를 선언해주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그대들에게 양심고백의 기회를 선사하고 있다.

“재차 반문하도록 하지요.”

알겠는가. 너희는 지금 전제를 잘못 세워두고 있다.

우리는 지금 바르바토스를 중상모략하는 것이 아니다.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제파르 대장.”

그대들의 자랑스러운 주군은, 명예로운 군단장은, 진실로 파이몬을 암살했다.

바로 이 전제 아래에서만 너희의 고백은 의미를 갖는다. 이 전제가 올바르기에 우리는 너희에게 고백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해답이다.

정답에서 고개를 돌리지 마라, 평원파.

“…….”

내가 반문했음에도 불구하고 제파르 대장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질문에 대해 반문하는 것도 때때로 훌륭한 대답이 되었다. 지금 경우가 그러했다. 내 반문 자체가 제파르 대장의 머리에서 하나의 가설을 강화했다. 강화해버렸다.

제파르 대장이 예상하고 기대했을 '사악한 이익'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적어도 마르바스와 중립파에게는 없었다.

중립파는 순전히 바르바토스의 폭주와 독주를 막으려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제파르 형님이 이빨을 꽉 물었다.

“만약에……만약에, 네놈들이 바르바토스 각하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이 성공하면……그리고 우리가 그 말도 안 되는 모함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선언하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걸려 들었다.

제파르 형님은 '누명'이라든지 '그 말도 안 되는 모함'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그렇게 위장 연막을 뿌려봤자 질문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방금 제파르 대장이 입에 담은 질문을 진정한 문장으로 복구시키면 다음과 같았다.

――만약에 바르바토스가 정말로 암살을 지시했다면 어떻게 되느냐, 라고.

명백한 의혹.

의심암귀(疑心暗鬼).

어쩌면 바르바토스 각하께서 파이몬의 암살을 획책했을지도 모른다는, 단순한 가능성. 여태까지 맹목적인 충성심과 믿음에 의해서 가려져 있었던 가능성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마치 새벽 어스름에 슬그머니 꿈틀거리는 나팔의 꽃처럼.

“우선 한 가지 사항을 짚고 넘어가지요.”

이제 멈출 수 없었다. 한번 피기 시작한 꽃이 다시 봉오리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자아.

이곳이 나의 영역이었다.

“암살건은 결코 누명이 아닙니다. 언젠가 여러분에게도 증거를 보여드릴 날이 오겠지요. 아니, 당장 내일 보여드릴 계획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지속될 시간은 겨우 열다섯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감히 선언하나니. 지금부터 평원파와 바르바토스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게 된다.

마르바스가 지배를 관장하듯이. 바르바토스가 전사의 영혼을 관장하듯이. 각각의 마왕에게는 자신이 다스리는 지대가 있었다.

“그리고 질문에 대답해드리자면, 당연히 바르바토스는 처형되고 여러분은 무죄로 풀려납니다. 우리가 임의로 거두어들인 지위도 모두 돌려드리겠습니다.”

“…….”

“당연한 것을 왜 굳이 물어보시는지요, 제파르 대장?”

나, 이면의 마왕 단탈리안이 관장하는 것은 모략과 복수, 연기술. 하나의 단어로 통틀어서 가리키자면 속임술. 의심이라는 청동으로 배신이라는 동상을 주조해내는 조각술이요, 거짓된 납덩어리를 황금으로 바꾸는 연금술 중의 연금술이다.

마르바스도, 가미긴도, 바싸고도, 오늘 밤에 협력해준 어떤 마왕도 지금부터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에 불과하다.

만마를 거느리고 천의 군세를 휘두르는 마왕들이여. 턱을 숙이고 눈을 아래로 두어라. 주름진 이마를 조아리고 내 언어에 복종하라.

여기서부터가 나 단탈리안의 영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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