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26화 (426/510)
  • 00426 황금의 몰락  =========================================================================

    “그대가 만에 하나 진솔하게 사과했다면.”

    마르바스가 말을 이어받았다. 목소리에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운 가능성이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바토스. 그대가 만약 파이몬이 누운 자리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했더라면. 우리 중립파가 나설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애당초 그대의 도발이 없었다면 평원파와 산악파가 충돌하지도 않았겠지.”

    “…….”

    “깨닫지 못했는가. 아니, 깨닫는 것을 시도할 수조차 없었음인가…….”

    마르바스가 탄식했다.

    “우리는 마계대공들을 직접 불러들여서 진위를 검증했다. 대공들은 그대가 암살에 깊이 관여했음을 증언하였으며,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내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지. 알겠는가, 바르바토스.”

    마르바스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오늘 소집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시트리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

    “그러나 시트리는 그대를 고발하는 대신에 단지 사과를 요구했다. 그대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피눈물을 흘리며, 당장이라도 그대의 가슴에 칼을 꽂아넣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고, 단 한 번의 기회를 그대와 평원파에게 허락한 것이다.”

    마르바스가 애절하게 말했으나 그 언어는 전달되고 있지 않았다. 바르바토스는 오로지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리는 눈망울로 나를 직시하면서 애원하고 있었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무엇이든 좋다. 무엇이든 좋으니까――.

    제발, 네가 나를 배신했다는 것만은 부정해줘.

    바르바토스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바르바토스의 눈길을 피하지 않은 채로 말했다.

    “마르바스 전하. 잠시간 의장의 역할을 대신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버거우나마 제가 다시 소임을 다하고자 합니다. 오늘 밤을 주재할 권리를 돌려주십시오.”

    “……인정한다. 그대에게는 회의를 진행할 권리. 발언을 허하고 금할 권리. 의제를 투표에 부칠 권리. 회의를 연기하고 파기할 권리. 일체의 권한이 정당하게 인정되노라.”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다음. 내가 어떤 한 마디를 내뱉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

    바르바토스는 현명한 여자였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녀는 이미 전부 깨달았다. 그런데도, 그렇기에 오히려, 나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고 있었다. 현재 상황을 부정할 기회를 떠넘기고 있었다.

    우리가 그동안 쌓아온 것들이 이 순간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무례한 새끼. 숙녀의 집에 방문할 거라면 오기 전에 연통은 미리 줘야 할 거 아냐.’

    ‘사내자식이 말린 정어리처럼 어리버리하긴. 내가 네 나이 때는, 밥팅아, 사흘 밤낮으로 질펀하게 놀아대도 끄떡이 없었어.’

    우정이.

    ‘좋아, 협력해주지. 전쟁? 바라던 바야. 희생? 그딴 것에 연연할 성격이었으면 벌써 진즉에 포기했어. 단 한 순간의 명예로운 전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감당하지. 나는 마왕이니까.’

    ‘어이구. 우리의 꾀주머니, 족제비 마왕, 반쪽짜리의 단탈리안. 이번에는 또 얼마나 질나쁜 수작을 꾸며왔길래 그리 자신만만하게 손을 드실까?’

    신뢰가.

    ‘동지들. 보다시피 내가 이 녀석을 찜했거든. 미리 침 발라뒀으니까 혹시라도 얘 뺏고 싶으면 내가 친절하고 자상하게 두들겨 패줄게. 나랑 일대일로 깔 자신 있는 새끼만 등판하도록.’

    ‘……진짜로, 내가 제일이지?’

    ‘제발 내 옆에 있어줘. 나를 더 이상 혼자 내버려두지 마…….’

    결속이.

    시간조차 차마 감내하기 어려운 무게가 우리 두 사람의 사이를 짓눌렀다. 모든 것이 지금 순간에 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내가 혀끝을 움직인 순간, 마치 한 줄의 현(絃)이 우악스러운 손길에 잡아뜯기듯이――우리 두 사람을 이어주고 있던 무언가가 소리 없이 끊어졌다.

    “룩셈부르크의 고귀한 대공, 제국의 대시종장, 마왕 파이몬에 대한 암살을 획책하고 실행한 죄목을 물어, 바르바토스. 그대를 보헤미아의 왕좌에서 폐위한다.”

    “…….”

    “이는 이미 네 명의 선제후가 만장일치로 동의한 바. 항변의 여지는 없다. 죄인이 파벌의 수장인 점을 고려하여 죄인뿐만이 아니라 파벌에 소속한 마왕 전원을 투옥한다. 이에 따라 그들이 지닌 일체의 지위 또한 금일 이 시간부로 인정되지 않음을 선언한다.”

    한 줄기.

    바르바토스의 눈가에서 한 줄기의 눈물이 흘러 떨어졌다.

    “믿고, 있었는데…….”

    “…….”

    “내가 제일이라고……말했으면서…….”

    나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서 바르바토스의 목에 갖다 댔다. 내 손이 당장이라도 새하얀 목을 조를 것처럼 가까워졌지만, 바르바토스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단순히 마르바스의 검이 그녀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지.

    ─ 차락!

    내가 단숨에 그녀의 목에 걸린 장신구를 잡아 뜯었다.

    바르바토스가 언제나 지니고 다니는 목걸이. 다름 아니라 나의 손가락들이 꿰매어진 목걸이였다. 바르바토스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건네준 목걸이의 실줄이, 가볍게, 끊어졌다. 자신을 지탱해주는 실이 사라지자 두 개의 손가락은 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명령했다.

    “전원. 포로들의 뿔을 자르십시오.”

    중립파 마왕들은 즉각 행동에 들어갔다.

    마왕에게 뿔이란 심장과 더불어서 생명력과 마력의 근원이었다. 그렇기에 뿔이 왜소하면 왜소할수록 볼품없는 마왕으로 취급받았다. 내가 예전에 반쪽짜리 마왕이라 불린 까닭은,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지만 마왕답지 않게 외뿔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끄으……네놈들……!”

    “이러고도 무사하리라 생각하느냐, 단탈리안! 저주한다! 내 피에 맹세코 네놈을 영원토록 저주하겠다!”

    평원파 마왕들이 몸부림을 치며 발악했다.

    뿔은 마왕의 긍지. 그것을 잃어버린다는 건 죽음보다 더한 수치였다. 그들은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더없이 믿음직스러운 동료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가장 참혹스러운 형벌을 당했다.

    평원파 마왕들은 끝까지 저항했으나 이미 반죽음이나 다름없이 부상을 당한 처지였다. 그들은 딱딱하고 차가운 돌바닥에 머리가 처박혔다. 중립파 마왕들이 그들을 제압하여 손쉽게 뿔을 도려냈다. 쿵, 하고 거대한 뿔이 떨어지는 소리가 곳곳에서 연달아 들려왔다.

    “어째서……단탈리안, 어째서 배신 따위를 했느냐……!”

    제파르 형님이 바닥에 엎드려져 제압당한 채, 간신히 고개만 비틀어서 이쪽을 노려보았다. 제파르 형님의 얼굴은 충격과 굴욕으로 뭉개져 있었다.

    “누구보다 평원파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는가!”

    온몸이 난도질당하고 오른팔을 잃었건만 제파르 형님의 노호는 무섭게 요동쳤다.

    “군단장 각하를, 바르바토스 전하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더냐! 대답해라, 단탈리안! 대답해라……!”

    “아닙니다. 제파르 대장. 전혀 아닙니다.”

    내가 바르바토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제파르 형님을 쳐다보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저는 결코 평원파를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바르바토스를 사랑한 적도 없지요. 대장께서는 생기신 것과 다르게 낭만주의자로군요. 사랑이라니요. 그런 것에 얽매일 나이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나치지 않았는지요?”

    내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의도치 않은 웃음이었다. 그러나 적절했다. 내가 여태껏 피와 땀으로 쌓아올린 연기 실력은, 이미 내 의도와 상관없이 본능적으로 가장 올바른 길을 선택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솔직히 짜증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입만 열면 바르바토스, 바르바토스, 바르바토스……. 여러분은 스스로 숙고하고 행동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까? 사고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뭐, 라고…….”

    “머리에 든 고민이라고는 어떻게 해야 전쟁을 일으킬까, 그것밖에 없겠지요. 마왕군의 미래를 바르바토스의 미래와 동일시한 시점에서 저는 여러분에게 완전히 질려버렸습니다.”

    내가 오른손으로 바르바토스의 뺨을 쓰다듬었다. 눈물이 흐르고 지나간 자국이 내 손바닥에도 희미하게 자국을 남겼다.

    “보십시오. 여러분이 그토록 숭배하던 바르바토스입니다. 전사의 명예라느니 긍지라느니 잘난 듯이 떠들었습니다만, 결국 숙적인 파이몬을 죽일 때 사용한 방법은 비겁하기 짝이 없는 암살……. 자신이 내건 신념조차 지키지 못했습니다.”

    문득, 내 손등을 적시는 것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그것이 바르바토스가 더한 눈물임을 알았다.

    ――괜찮았다.

    얼마든지, 무엇이든 끝까지 해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명예를 운운합니까? 대단하군요. 살인자가 자신의 죄악을 미학으로 치장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저도 모르게 감탄이 나옵니다.”

    “불경한 손을 치워라! 각하께서 암살 따위를 하셨을 리가 없다!”

    “저런, 모함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곤란하군요. 하기사 모함이라고 믿는 편이 여러분에게는 여러모로 마음이 편하겠지요.”

    “네놈, 언제까지 우리를 조롱할 테냐……!”

    “알겠습니다. 모쪼록 모함이라고 여겨주십시오. 제가 거짓말로 바르바토스를 모욕했으며, 여기 계신 마르바스 전하를 비롯해서 중립파 전원이 거짓말을 공유하기로 합의했다고, 그리 믿어주십시오.”

    제파르 형님의 표정이 정지했다.

    그렇다. 배신자인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제파르 형님도 알고 있겠지. 마르바스는 결코 거짓 모함 따위에 거사를 일으키는 위인이 아니란 것을…….

    모든 마왕을 통틀어서 가장 공정하며 고결한 자, 절대적인 법정을 관장하는 자, 고귀한 마왕 마르바스. 그는 지난 이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거짓된 중상모략에 편 들어준 적이 없었다. 마르바스가 내 고발을 지지한다는 사실 자체가 나의 발언에 압도적인 신뢰성을 부여했다…….

    제파르 형님이 이를 물고 고함쳤다.

    “말도 안 된다……그럴 리가 없다!”

    공기가 술렁거렸다. 의심의 독이 퍼지고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암살 같은 짓거리를 저질렀을 리 없다는 믿음. 그러나 동시에 수많은 세월 동안 마르바스가 보여주고 입증해낸 신뢰. 두 개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저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파르 대장. 저 역시 바르바토스를 끝까지 신뢰했습니다. 제 품에 안겨서 파이몬이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그 순간조차, 저는 바르바토스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

    “진실을 알고 난 이후, 저는 바르바토스에게 말했습니다. 시트리에게 사과하라고. 공식적으로 사과할 수 없다면 적어도 우회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사과하라고.”

    뻔한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거짓임이 입증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건 정치적으로 이미 진실이었다.

    “우회적인 방법이라니……설마…….”

    “예. 오늘 이 소집이 바로 우회적인 사과를 위한 자리였습니다. 제파르 대장께서는 본인이 사과하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래서야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요. 어디까지나 바르바토스가 직접 사과해야 할 문제였습니다.”

    제파르 형님의 얼굴에 재차 충격이 내려앉았다. 지금 형님의 머릿속에서는 지난 며칠 간 이루어진 사건과 대화가 전혀 다르게 재구성되고 있으리라.

    “눈치도 없게 잘 끼어들어 주셨군요, 대장. 난감했습니다.”

    “…….”

    “물론, 대장께서 나섰다고 해서 바르바토스가 사과할 기회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보셨겠지요. 바르바토스는 오늘 이 자리에서 사과를 건네기는커녕 산악파를 말살하려 들었습니다.”

    내가 건조하게 웃었다. 내 웃음소리가 둥그런 돔을 타고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이미 오래 전에 번개는 내리쳤다. 이제 뇌성이 울릴 차례만이 남았다.

    “용서받을 죄가 아닙니다. 용서받아서는 안 될 죄이지요. ……바르바토스를 비롯해서 여러분 전원, 마계의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광장에서 참수될 것입니다.”

    평원파 마왕들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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