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25화 (425/510)
  • 00425 황금의 몰락  =========================================================================

    “아앙? 아직도 개소리를 입에 달고 있네, 천치가.”

    바르바토스가 오른발을 들어서 시트리의 복부를 걷어찼다. 흐윽, 하고 시트리가 신음을 뱉었다. 단지 소리뿐만이 아니라 시꺼멓게 뭉친 핏덩어리까지 토해냈다. 바르바토스는 개의치 않고 다시 발길질을 날렸다.

    “죄송해? 내가 파이몬한테? 왜?”

    “……언니한테……사과…….”

    “어이가 없어요. 네가 학살한 십만 명의 무고한 인민은 생명이 아니고 파이몬 년만 생명이야? 아주 지만 비극의 주인공인 것 같지? 들개 같은 년.”

    바르바토스가 싸늘하게 시트리를 내려다보았다.

    “왕으로 태어나서, 왕으로 대접받고, 왕으로 살아간 것 자체가 이미 비견할 데 없는 호사이고 사치다. 단 하루라도 배를 굶어본 적도 없고, 단 한 시간이라도 땅을 파본 적이 없는 년들이 허구한 날 비극을 떠들어대지.”

    바르바토스는 복부를 때리는 일에 신물이 났는지 목표를 바꾸었다. 시트리의 오른팔이 잘려나간 절단면을 발바닥으로 꾸욱 짓눌렀다. 핏물이 튀면서 바르바토스의 발가락을 붉게 물들였다.

    “아아아악! 아아아악……!”

    시트리가 고통에 몸부림을 쳤다. 바르바토스는 무표정하게, 거의 기계적으로 시트리에게 고문을 가했다.

    “나는 말이지. 네년처럼 세상을 저주하는 부류를 볼 때마다 위장에서 벌래가 기어다니는 것 같아서 끔찍하거든. 네 주제를 아세요, 주제를. 천 년이 넘게 권력자로 살았으면서 네가 마계의 신민에게 해준 게 뭐 있냐? 앙? 그냥 허리에 달린 좆이나 신나게 싸갈겼지, 네가 제대로 한 일이 뭐 있냐고.”

    “언니……언니…….”

    “싱거운 쓰레기 새끼.”

    바르바토스가 오른발을 거두었다. 고문이 끝났다. 시트리는 망가진 녹음기처럼 끊임없이 사과하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녀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휴, 기분만 잡치네. 마왕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어디 우팔라 지옥에서 창녀나 되었을 녀석이. 이런 애들 때문에 괜히 애꿎은 마족들이나 줄초상을 치르지.”

    바르바토스는 대낫을 어깨에 들쳐매고 한숨을 푹푹 쉬었다. 안치소에 눌러앉아 휴식을 취하는 평원파 마왕들을 쭈욱 둘러보고, 바르바토스가 버럭 소리쳤다.

    “떨거지들 몇 명 죽였다고 뭐 지쳤다면서 쓰러져 있냐! 일어서, 짜식들아!”

    벨레드 형님이 슬그머니 손을 들어올렸다.

    “존경하는 각하. 저는 다리가 병신이 되어버렸는데 어쩌면 좋습니까요?”

    “몰라. 평생 여기서 헤엄이나 치시든지.”

    평원파 마왕들이 작게 낄낄거렸다. 그리고 영감처럼 신음하며 한두 명씩 일어섰다. 벨레드 형님은 허벅지 아래가 통째로 잘린 탓에 동료들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 워낙에 덩치가 커서 두 명이 달라붙어야 그나마 지탱이 되었다.

    “가서 부축하는 것을 도와주도록.”

    마르바스가 명령했다. 그러자 중립파 마왕들이 예, 하고 우르르 흩어졌다. 바르바토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녀석은 타인에게 친절을 받는 것을 꺼려하는 성격이었다.

    “굳이 도와줄 필요까지야 없는데. 자기 몸은 자기가 건사해야지.”

    “중상자가 세 명이라지만 경상을 입은 동지가 많지 않은가. 호의는 받아두어라.”

    “뭐, 굳이 수고하겠다면야……이런 걸 빚으로 생각하진 않을 거니까. 자아, 뒈진 놈들한테는 보존마법 걸어두고 숨 붙은 놈들은 감옥에다 넣자고.”

    바르바토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때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렸다. 마르바스, 바르바토스, 내가 고개를 돌려서 소리가 퍼진 곳을 쳐다보았다. 정반대편에서 가미긴이 양손으로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저 병신이 또 고질병 도졌나.”

    바르바토스가 혀를 찼다. 그녀는 내색하고 있지 않았지만 평원파 마왕 중 한 명이 사망한 터라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시트리를 고문한 것에는 분풀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미긴이 웃어대니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만했는데, 그건 마르바스와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대는 왜 또 웃고 있는가, 가미긴.”

    “아니――미안해. 마르바스. 아하하, 미안. 그런데 너무 웃긴 광경이잖아.”

    가미긴이 손등으로 금발을 쓸어넘기고 안치소 정중앙을 가리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황궁 정문에 오순도순 모여서 누가 먼저 단탈리안이랑 잘지 툭탁거렸는데에. 한 애는 저기 자빠져 있고.”

    가미긴이 다음으로 피웅덩이에 널브러진 시트리를 가리켰다.

    “한 애는 저기서 팔이랑 다리 하나씩 잃은 다음에 헤엄치고 있고.”

    가미긴이 바르바토스를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아하핫. 아니, 그냥. 이건 이제 웃을 수밖에 없는 농담이 아닐까.”

    “하아……? 야, 두개골에 철사 때려 박은 년아. 나한테 시비를 걸고 싶으면 제발 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떠들어라. 네가 입을 열 때마다 덜떨어지는 지능이 풀풀 새어나오잖아.”

    “응, 미안해. 미안해, 바르바토스. 오늘 너무 유쾌한 장면들을 보게 되어서.”

    “가미긴.”

    그때까지 쭉 입을 다물고 있었던 바싸고가 한 마디 중얼거렸다.

    “조용히 해라.”

    “아아. 미안, 진짜 미안해. 내가 너무 눈치가 없이 좋아했지? 후후. 그냥 파이몬의 안치소가 공동묘지가 되니까 신기해서.”

    “조용히 닥치라고 했다.”

    그제야 가미긴은 잡담을 멈추었다. 하지만 만면에 활짝 핀 웃음기는 여전했다.

    “…….”

    바르바토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마침 바싸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라, 한 템포 느리게 바르바토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바르바토스의 황금색 눈동자가 뚫어지라 나를 바라보았다.

    “…….”

    “…….”

    주위에서는 평원파 마왕들이 중립파 마왕들의 도움을 받아서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기에 유독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을지 몰랐다.

    “도와줘서 고맙네. 나중에 한 턱 쏘지.”

    “내 참, 늙은이가 의외로 힘이 쎄서 고생했다니까.”

    주변에서 부상자들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는 멀리 안치소의 벽에 부닥쳐서 다소 둔중하게 메아리쳤다.

    “…….”

    바르바토스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 그녀는 마르바스를 쳐다보았다. 마르바스는 진즉에 시선을 받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곧바로 그녀의 눈동자와 직면했다. 내 경우와 달리 바르바토스는 마르바스와 길게 눈길을 교환하지 않았다. 다만, 자그맣게 입술을 벌렸다.

    “…….”

    바르바토스가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황금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애원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세상의 공기가 전부 멈추어버리고 오로지 우리 두 명만이 동떨어져서 말없이 대화하는 것 같았다.

    내가 한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바토스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피해!”

    그녀가 고함을 지른 것보다 한 발자국 앞서. 혹은 그것과 동시에.

    중립파 마왕들은 무기를 꺼내들어서 평원파 마왕들의 신체를 거칠게 찔렀다. 칼날들이 복부를, 허리를, 목등을, 허벅지를 거침없이 쑤셔 박았다. 상대방에게 몸을 맡기고 있던 평원파 마왕들이 비명을 질렀다.

    “크하아아아악!”

    사방에서 핏물과 비명이 허공에 튀었다.

    중립파 마왕들은 일격에 그치지 않고 곧바로 재차, 몇 번이고 평원파 마왕들의 신체에 칼끝을 찔러넣어 비틀었다. 평원파 마왕들은 잠시간 난도질을 견디는 듯이 두 발로 바닥을 딛고 섰지만, 직후, 무릎이 꺾이면서 쓰러졌다.

    “이―――!”

    바르바토스는 그 광경을 눈에 담자마자 입술을 깨물고 대낫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바르바토스는 거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바르바토스의 턱 바로 아래에 겨누어져 있었다.

    마왕 마르바스의 검이었다.

    “진부한 말로 항복을 권고하지는 않겠네, 바르바토스. 다만, 그대의 부하가 현재 시점에서는 아무도 우리에 의해 죽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말하마. 그대처럼 현명한 자라면 본인의 권고를 이해할 터다.”

    네가 움직이면 그 즉시 평원파의 부하 마왕들을 죽이겠다. 그런 의미가 담긴 협박이었다. 대낫을 쥔 바르바토스의 두 손이 자그맣게 떨렸다. 안치소는 살육의 향기로 물들었다.

    “크허억……크흡……!”

    순식간에 평원파 마왕의 절대다수가 허물어졌다. 제파르 형님도, 벨레드 형님도 참화를 피하지 못하고 끔찍하게 난자당했다. 이미 부상을 입고 있었다. 거기에 기습까지 당한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멀쩡하기란 불가능했다.

    산악파 마왕들의 시체가 널린 그곳에.

    다시 한 번, 평원파 마왕들이 포개어지듯이 쓰러졌다.

    “네놈들, 감히……!”

    중립파 마왕들이 달라붙지 않아서 기습을 피한 평원파 마왕 세 명은, 이미 바르바토스의 목에 검이 들이대진 시점에 꼼짝없이 동작을 멈추었다. 현명한 처사였다. 만일 그들이 조금이라도 반항했다면 이번에는 무소속 마왕들이 나섰을 것이다.

    무서운 침묵이 안치소를 지배했다.

    “바르……바토스……님…….”

    “각하…….”

    평원파 마왕들은 피를 쏟아내는 가운데에도 바르바토스가 있는 방향으로 손을 내뻗었다. 더 이상 무언가를 할 기력이 그들에게는 남지 않았다. 설령 기력이 남았더라도 저항하기는 어렵겠지.. 중립파 마왕들은 현명하게도 평원파 마왕들의 양손 손가락을 전부 잘라버렸는데, 혹시라도 무기를 잡지 못하도록 조처한 것이었다.

    평원파 마왕들이 간간히 흘리는 신음만이 공기를 부르르 진동시켰다. 그것 이외에는 모든 것이 침묵하고 있었다. 중립파 마왕들도. 무소속 마왕들도. 유리관에 안치된 파이몬도,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시트리도, 모든 것이.

    나를 포함해서.

    “……어째서.”

    바르바토스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바르바토스는 온몸이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가 닫았지만 결국 흘러나온 단어는 어째서, 그것밖에 없었다. 마르바스는 슬픔이 담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파이몬의 죽음을 용납하면 안 되었다, 바르바토스. 시트리의 죽음을 꾀해서도 안 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된 행보였어.”

    “…….”

    “파이몬과 시트리가 사라진 이상, 산악파가 자립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은 명약관화하다. 그리 되면 파벌 간의 균형은 무너지고 그대가 권력을 독점하겠지. 본인이 그대를 견제하겠지만 역부족일 터.”

    마르바스가 쓸쓸하게 말해나갔다.

    “본인은 그대와 파이몬이 서로를 증오하는 것이 불안하고 또 불길했네. 두 사람은 우리 마왕군의 양쪽 날개다. 혹여 그대들이 서로를 증오하느라 가장 단순한 진실, 즉 아무리 위대한 새일지라도 반쪽짜리 날개만으로는 결코 비상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바르바토스가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마르바스는 칼날을 더더욱 바르바토스의 목에 가까이 붙였다. 살결이 배여서 샛붉은 피가 한 줄기 흘렀다. 바르바토스는 몸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두려움은 현실이 되었다. 세상사란 정말이지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군……. 이미 알고 있었지만, 언제나 회한을 불러일으킨다.”

    바르바토스가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마르바스를 노려보았다.

    “감히……!”

    “죄목을 밝히겠다. 바르바토스. 그대가 파이몬의 죽음을 조장했다는 증거가 확보되었다.”

    바르바토스의 눈에서 초점이 흔들렸다.

    “거짓말이야…….”

    “마계대공들 전원이 바르바토스, 그대에게 협박 내지는 권고를 들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는 본인이 직접 그들에게 청취한 사실이다. 본인은 그대가 파이몬을 간접적으로 암살했음을 확신하고 있다.”

    침묵이 흘렀다.

    바르바토스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녀는 말없이 나에게 묻고 있었다.

    그리고.

    “그래. 바르바토스.”

    나는 말했다.

    “마르바스에게 진실을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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