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24화 (424/510)
  • 00424 황금의 몰락  =========================================================================

    삼십 초.

    일생의 대부분을 산악파에 바친 마왕들이 파벌을 배신할지 말지 결정하기에는 지나치게 짧았다. 그러나 이럴 때는 시간을 넉넉하게 주지 않은 편이 효과적임을 바르바토스도 알고 있었으리라. 산악파 마왕들은 명백하게 동요했다.

    “…….”

    십 초쯤이 흘렀을까. 한 노인이 무기를 내리고 터벅터벅 평원파로 걸어갔다. 산악파 마왕들이 경악에 빠져서 소리쳤다.

    “모락스!”

    “파벌을 배신할 속셈인가!”

    전(前) 서열 제21위의 마왕 모락스였다. 검버선이 피어난 얼굴로 모락스가 자신의 동료들, 아니 일찍이 동료였던 자들을 돌아보았다.

    “나는 파벌을 배신하지 않았소. 산악파를 배반한 것은 오히려 시트리 님이오. 파이몬 전하께서는 누구보다 마계 신민들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셨으며, 무엇보다 마족의 미래를 앞서 생각하셨지. 그런 파이몬 전하의 이상을 시트리 님이 배반했소. 이제 지긋지긋하구려.”

    모락스가 한숨을 쉬었다. 노신사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위대한 이상은 사라지고 남은 것이라고는 파벌 논리에 따른 정치적인 싸움뿐……그래서 시트리 님을 위시로 하여 우리가 새로이 산악파를 재건한다 한들, 거기에 무엇이 남아 있소? 마인들을 위한다는 이상? 십만의 마족을 학살해버린 우리가 무슨 권리로 마왕을 자칭하겠소까?”

    모락스가 시트리를 지긋하게 쳐다보았다. 굵은 주름살에 감추어진 노인의 눈동자는 적의로 빛나고 있었다.

    “벨리알에게 파벌을 바꾸라고 처음 권고한 것은 다름 아니라 본인이오.”

    “뭣이……!”

    “이탈자가 나올 경우에 시트리 님이 어찌 대처할지 살펴볼 요량이었지.”

    산악파 마왕들이 충격에 술렁거리는 가운데, 장본인인 모락스와 시트리만은 서로를 조용히 노려보고 있었다. 모락스가 두터운 입술을 열었다.

    “노부 나름대로 시험을 해본 것이라 해도 좋소. 어찌되었든 시트리 님은 이미 민간인을 수없이 학살한 범죄자였소. 그때 시점에서 파벌을 이탈해도 괜찮았소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험해보고 싶었소. 과연 파이몬 전하의 뒤를 이을 만한 인물인지 아닌지…….”

    “…….”

    “결과는 여기 있는 모두가 아는 대로요. 시트리 님은 벨리알에게 공개적인 항변의 기회조차 주지 않았소. 그 즉결처형은 더없이 불법적이었고 또한 야만적이었소. 노부는 깨달았지. 마왕 시트리는 모든 문제를 피로 해결할 줄밖에 모르는 작자라고……!”

    모락스가 폐부를 쥐어짜낸 듯 절절하게 말했다.

    시트리는 그에 대해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는 안치소에 들어서고 단 한 차례도 흐릿해지지 않았다. 단지 올곧게 맑은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시선에 일말의 애잔함을 느꼈다.

    아아.

    이곳에서 나만이.

    시트리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오직 나만이 이해하고 있었다.

    ─ 만약 그렇게 파이몬 언니가 소중했다면, 어째서, 언니를 예전부터 구해주지 않았던 거야.

    시트리는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나는 시트리의 시선에서 천 가지 단어와 백 가지 문장을 읽을 수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니었다. 시트리는 시선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다만 나밖에 알아듣는 사람이 없을 따름이었다.

    ─ 파이몬 언니가 월맹군 전쟁에서 죽을 뻔했을 때. 마나가 망가져서 빈사상태에 이르고, 언니의 목숨을 처결할 권리가 단탈리안에게 넘어갔을 때――왜 아무도 단탈리안에게 달려가서 제발 언니를 살려달라고 빌지 않았던 거야?

    ─ 왜?

    ─ 어째서 나만이, 모든 파벌을 통틀어서 인원이 가장 많다는 산악파 중에서 고작 나 한 명만, 단탈리안의 막사에 처들어가서 애걸복걸했던 건데?

    ─ 위선자들.

    시트리의 검 끝이 아주 조금이지만 기우뚱거렸다.

    그녀가 묵묵부답하는 동안 산악파 마왕들은 슬금슬금 발을 옮겼다. 모락스가 일단 도망치니 부담감이 적어졌는지, 한두 명씩 서서히 대열을 이탈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트리는 똑바로, 한없이 똑바로 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 너희는 전부 위선자야.

    ─ 자기가 유리할 때는 파벌에 복종하지. 언니의 자세를 칭송하고 이상이니 뭐니 온갖 화려한 단어를 써가면서 치장해. 하지만 조금이라도 태세가 불리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모른 척해버려.

    ─ 너희는 파이몬 언니가 처분당할 것 같았을 때 일부러 움직이지 않았어. 자칫 파이몬 언니의 측근이라는 인상을 주위에 심어주었다가는, 다음 차례에 자신이 당할 거라고 걱정했으니까.

    ─ 언니는.

    ─ 내 언니는, 너희 같은 것들보다 훨씬 더……훨씬 더, 가치 있는 사람이었어.

    ─ 차라리 너희가 전부 죽어버리고 언니가 살아야 했는데.

    ─ 그게 세상의 올바른 형태였는데……!

    오 분이 넘게 지났다.

    미리 약속한 삼십 초가 한참 전에 흘렀으나 바르바토스는 짐짓 모른 체하며 유예기간을 연장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산악파 마왕들이 시트리의 곁을 떠난 것은 물론이었다. 시트리는 그들에게 입을 열지도 않았고, 눈길조차 한번 주지 않았다.

    그 결과.

    시트리의 곁에 남은 마왕은――두 명.

    불과 두 명뿐이었다.

    열 명 중에서 무려 여덟 명이 이탈했다. 8할. 압도적인 비율. 그야말로 압도적인 비율로, 산악파 마왕들은 짧게는 수백 년 길게는 수천 년 동안 신세를 진 자신의 파벌을 배반했다.

    “카핫.”

    바르바토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유쾌해서 참을 수 없다는 웃음이었다.

    “봐라, 제군들. 이것이 본질이다. 파이몬 년이 잘난 듯이 떠들어댄 이상과 신념의 본질이다. 모두가 평등하고 화목하게 참여하는 파벌의 진짜 모습이란 이토록 초라한 것이야!”

    바르바토스의 표정이 미소로 일그러졌다. 만면이 귀기(鬼氣)로 비틀려서 흉악했다.

    “더 이상 산악파에는 예전과 같은 이상이 없다는 명분! 이제 배신해도 괜찮다고, 아니, 배신해도 사실은 배신한 게 아니라고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는 명분……! 거기에다 실질적인 위협! 여기서 배신하지 않으면 죽어버릴지도 모르니, 이제 배신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

    바르바토스가 이빨을 하얗게 드러내며 진심으로 웃어댔다.

    “두 가지가 합해지면, 아아, 돼지들은 그 두 가지만 갖추어지면, 수천 년의 맹세조차 간단하게 깨버릴 수 있다! 이것이 산악파다! 파이몬 년이 마계의 미래라며 자랑하던 파벌의 실제 모습, 더럽고 천박한 돼지 우리다!”

    “무슨…….”

    분위기가 일변했다. 바르바토스가 내뱉은 폭언에 소속을 바꾼 여덟 명의 마왕이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들이 뭐라고 반박하기 직전, 바르바토스가 파안대소하며 일갈했다.

    “제군들――주제도 모르고 울부짖는 돼지 새끼들의 모가지를 따버려라!”

    그리고, 사방에서 피가 난자했다.

    벨레드 형님이, 제파르 형님이, 평원파의 모든 마왕이 일제히 병장기를 휘둘렀다. 불길한 낌새를 알아채고 주변을 경계했던 여덟 명의 배신자도. 아울러서 시트리를 비롯한 세 명의 마지막 산악파 마왕도 무기를 내뻗었다.

    안치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크아아악! 다리가! 내 다리가!”

    “이, 이건 얘기가 다르지 않소! 바르바토스 전하! 이탈을 유도하면 향후 지위를 보장해주겠다고 약조하기 않았소외까!”

    모락스가 비명을 질렀다. 과연. 신중해 보이는 노신사가 어쩐 일로 가장 먼저 배신하는 초강수를 두었는가 궁금했는데, 바르바토스가 사전에 음모를 꾸며둔 것이었는가……. 여전히 빈틈이 없는 녀석이었다.

    나는 싸움 따위에 재능이 없었으므로 진즉에 한 발자국 물러나서 중립파 마왕들에게 보호받고 있었다. 중립파 마왕들과 무소속 마왕들은 여차하면 끼어들 태세로 준비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싸움에는 끼어들지 않았다. 당연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산악파와 평원파의 결투였다…….

    “흐응? 무슨 잠꼬대인지 모르겠는걸.”

    “크으으읍……!”

    초반에 기습을 허용하고 말았는지 모락스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내가 알기로 모락스는 마법사였다. 강력한 반마법이 형성된 이곳에서 본 실력을 발휘하기란 극히 어렵겠지. 반면에 바르바토스는 흑마법사였지만 예전 직업이 전사였다. 상대가 되지 않았다.

    모락스가 팔뚝에 철철 흐르는 피를 부여잡고 소리 질렀다.

    “이, 이제 와서 모르쇠로 나오다니! 약조가! 약조가 다르오, 바르바토스 전하!”

    “그러니까 왜 잠꼬대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잖아.”

    바르바토스가 히죽 웃으면서 대낫을 크게 휘둘렀다.

    “나는 네깟 새끼의 '전하'가 아니야. 병신 머저리야.”

    대낫이 정확하게 모락스의 목 정중앙을 절단했다. 모락스는 오른팔을 내뻗어서 저항해보려 했지만, 치켜든 팔까지 통째로 잘렸다. 무서우리 만치 신속한 참수였다.

    “……, …….”

    모락스의 목은 한동안 몸뚱어리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일 초, 이 초가 흐르자 머리통이 기우뚱 미끄러지면서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노인의 얼굴은 굴욕과 고통으로 뒤틀려 있었다.

    “참혹하군.”

    내 옆에 선 마르바스가 중얼거렸다.

    “참혹하기 그지없어.”

    “의외의 말씀이군요, 세바스토크라토르. 이보다 더 끔찍한 광경을 수도 없이 지켜보시지 않았습니까?”

    “겉보기로 끔찍한 정도를 따지자면 그러하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은 단순히 누군가가 누군가를 살해하는 모습이 아니다. 우리가. 마왕군이 몰락하고 있다…….”

    그런 의미였는가. 나는 묵묵히 유혈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마르바스에게는 그렇게 비출 수밖에 없겠지.

    혈투는 이십 분 만에 종료되었다.

    승자는 당연하게도 평원파였다. 안 그래도 평원파가 유리한 싸움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산악파는 변절자와 충신으로 갈라지기까지 했다. 오히려 이십 분이나 버틴 것에 대해 칭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주로 시트리가 격렬하게 반항한 덕분이겠지. 벨레드 형님과 제파르 형님이 협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시트리는 두 사람에게 큰 부상을 입혔다. 시트리는 광전사와 같은 기세로 전장을 지배했다.

    그러나 안타까웠다. 두 형님이 시트리의 발을 묶어둔 사이, 바르바토스가 평원파 마왕들을 이끌고 나머지 잔당을 깔끔하게 청소했다.

    평원파 마왕들도 소소하게 부상을 입었지만 그뿐. 바르바토스는 잔당을 해치운 다음 형님들한테 가세했고, 가볍게 시트리를 제압했다. 바르바토스는 전술적으로 압승을 거두었다…….

    “꽤나 애를 먹이잖아. 불씹장이 년.”

    바르바토스가 퉷, 하고 침을 뱉었다. 바닥에 쓰러진 시트리의 얼굴에 붉은색 침이 떨어졌다. 시트리는 팔 하나와 다리 하나가 잘린 채 간신히 숨을 쉬고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제파르. 형편없는 녀석. 겨우 이 년 하나 잡는 데 그리 엉망진창으로 당해?”

    “송구합니다, 각하.”

    제파르 형님은 오른팔이 한짝 잘렸으므로 비교적 양호했다. 적어도 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바르바토스가 바라보기에 그 정도는 중상 축에도 끼지 못하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제파르를 매도했다.

    “피해상황. 보고.”

    “여덟 명의 적을 사살하고 세 명의 적을 생포했습니다. 아군은 한 명이 사망했고, 세 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아앙? 중상자가 세 명이나 된다고? 제파르 자식아. 설마 너를 중상자로 분류한 것 아니겠지. 벨레드처럼 다리가 나가버렸으면 또 모를까, 어디서 팔 한 개 갖고 유세를 떨어?”

    “……죄송합니다. 중상자는 두 명입니다.”

    바르바토스가 코웃음을 쳤다.

    제파르 형님의 보고에는 역설적인 구석이 있었다. 8명의 적이 죽었고, 3명의 적이 생포되었다. 여기서 8명은 산악파를 배신한 마왕들을 가리켰다.

    바르바토스가 사전에 귀띔하지도 않았건만 평원파 마왕들은 배신자에게 가차없이 철퇴를 내리친 반면, 끝까지 의리를 지킨 자들은 어떻게든 사로잡았다. 사실 이것 때문에 평원파의 피해가 생각보다 커진 것이었다.

    미쳐 날뛰는 시트리를 죽이는 것만도 어려운데 거기에 더해서 생포하다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지를 잃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걸로 여기는 무투파들이나, 그러니까 평원파 마왕들이나 벌일 행각이었다.

    “자아. 위대하시고 고결하신 산악파의 새로운 우두머리 대령이오.”

    바르바토스가 시트리의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시트리는 꿈틀거리지도 못한 채 이쪽으로 질질 끌려왔다.

    오늘밤을 주관하는 의장은 마르바스였다. 바르바토스는 마르바스의 발 아래 시트리를 내팽개쳤다. 시트리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마치 시체처럼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아니, 실제로 시체가 호흡하는 것에 불과했다.

    “후우.”

    폭풍이 지나가고 난 다음의 고요가 찾아왔다. 바르바토스는 한건 끝냈다는 기분으로 기지개를 쭈욱 폈다. 평원파 마왕들은 무기에 기대어서 바닥에 나앉았다. 누구나 가릴 것 없이 흥분된 피를 식히느라 숨을 깊이 내쉬고 있었다.

    그때 희미한 중얼거림이 안치소 바닥에 퍼졌다.

    “……사……해.”

    마왕들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시트리가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험상궂게 인상을 구겼다.

    “아앙? 뭐라고?”

    “……사……과해…….”

    무언가가 바닥에 흘렀다. 핏물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투명하고, 더 흐릿한 액체였다.

    ――이날 처음으로, 시트리가 차가운 무표정을 깨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팔다리가 잘려서 고개조차 들 수 없는 몸이었다. 마지막 유언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핏물에 잠긴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시트리는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최대한 또박또박 발음하려 노력하며, 자신의 몸속에 쌓인 무언가를 조금씩 토해냈다. 핏덩어리보다 붉은 것을 필사적으로 게워냈다.

    “파이몬, 언니……한테…….”

    “…….”

    “언니한테……사과……해…….”

    시트리는 그렇게 절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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