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23 황금의 몰락 =========================================================================
“……바르바토스. 네가 사과를 하겠다고?”
시트리는 의외라는 어투였다. 애당초 그녀가 목적했던 것은 제파르 형님 선에서 사태가 정리되는 정도였다. 설마 라이벌 파벌의 대표가 나설 줄은 몰랐겠지.
“나는 평원파를 대표하는 마왕이야.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길 생각도, 비겁하게 숨을 생각도 일절 없어. 만약 사과가 이루어진다면 내 입에서 이루어져야 마땅하지.”
“시트리가 제기한 혐의를 인정하는가?”
마르바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대가 산악파의 내분을 획책했으며 벨리알을 회유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인가.”
“인정하지 않아.”
“무슨…….”
바르바토스의 단언에 좌중이 소란스러워졌다. 시트리를 포함해서 산악파 마왕들의 마왕이 구겨졌다. 그러면 그렇지, 하는 분위기도 얼마간 있었다. 이번만큼은 마르바스도 소동을 잠재울 생각이 없었는지 그대로 기세를 타서 되물었다.
“사과를 하겠다는데 혐의를 부인하다니. 대체 어찌된 일인가, 바르바토스.”
“이런 얘기지. 내가 산악파에 몹쓸 짓을 저지른 건 맞아. 얼마든지 인정해주겠어. 하지만 저쪽에서 시트리가 제기한 혐의대로 잘못을 범하지는 않았어.”
바르바토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몸짓에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그것이 산악파 마왕들을 자극했다. 시트리가 나지막하게 뇌까렸다.
“나는 사과를 요구했지, 네 개소리를 들으려고 여기 온 게 아니야.”
“진정하라고, 시트리. 네가 사랑하는 언니께서 보시고 계시잖아. 이런 곳에서 언성을 높이는 것은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응?”
바르바토스가 파이몬의 유리관을 왼손으로 쓰다듬었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산악파 마왕들과 평원파 마왕들이 무기를 꺼내든 것은 거의 동시였다.
비록 그들이 안치소에 출입할 때 무기를 모두 반납했다고는 하나, 마왕에게는 마법진을 그리지 않고도 자신의 병장기를 소환하는 능력이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시트리의 손에 사복검(蛇腹劍)이, 벨레드 형님의 손에 도끼가 들렸다.
“당장――거기서 더러운 손을 치워.”
시트리에게서 진득하게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러자 바르바토스가 여전히 장난스러운 느낌으로 워워, 하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사람이 얘기하면 끝까지 들어주는 것이 도리이지. 그리 성급하게 날붙이부터 꺼내면 어디 쓰나. 그럼, 뭐야? 나에게는 관을 만질 자격조차 없다는 거야? 정말로 여기서 피를 보고 싶다면 보고 싶다고 말해.”
“…….”
“마르바스 영감, 봐봐. 산악파의 새로운 지도자께서는 아무래도 머리에 피가 너무 쉽게 오르는 것 같은걸. 적어도 파이몬은 이런 도발에 무기를 꺼내지는 않았어.”
안치소에서 살기가 점점 더 짙어졌다. 거기서 한 마디만 더 내뱉어봐라, 하는 공기였다. 어느새 각 파벌의 마왕들이 서로가 서로를 빈틈없이 겨누고 있었다. 바싸고와 가미긴, 아몬 등, 무소속인 마왕 다섯 명만이 개판 일보 직전인 광경을 흥미진진하게 관람했다.
“……본인의 위장이 썩어빠지도록 각자가 다들 최악을 보여주고 있군. 마치 그것이 최선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마르바스가 한숨을 쉬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약한 한숨이었지만, 내 귀에는 거의 하늘이 무너지는 수준의 한숨으로 들렸다. 슬슬 마계의 연금술사들이 마르바스를 위해서 위장약을 발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대들이 난장판을 벌이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하다. 마음대로 싸우도록. 그러나 먼저 상대방을 공격하기로 결정한 파벌은 각오를 단단히 해두게. 우리 중립파는 선공을 범한 파벌을 공격할 것이니.”
마르바스의 선언이 떨어지자마자 중립파 마왕들이 무구를 소환하였다.
산악파와 평원파가 맞붙는다면 십중팔구 평원파가 승리했다. 그러나 중립파가 산악파에 가세한다면 승부의 향방은 오리무중으로 빠졌다. 어느 한쪽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성립했다.
마르바스는 세상을 저주하고 싶은 심정이겠지. 결국 폭력적인 위협이 없어지면 마왕들은 언제든지 상대 파벌을 무력으로 제압하려 들었다. 세상사가 원래 그런 것이라고 타협하면 그만이겠지만, 정치적인 타협을 제일로 여기는 마르바스에게는 위장이 쓰라릴 수밖에 없었다…….
“뭐, 우리는 애시당초 유혈사태를 일으킬 생각 자체가 없었지만.”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얘기야. 나는 물론이고 우리 평원파의 어느 누구도, 산악파에 계획적으로 내분을 일으킬 계획을 짜거나 행동을 실행한 적이 없어. 하지만 제 발로 오자고 하는 사람을 막을 생각까지야 없지.”
“……순전히 벨리알이 단독으로 벌인 행각이라는 말이야?”
“응, 그게 진실이야.”
바르바토스가 입꼬리를 히죽 올렸다.
“우리는 너희를 건드릴 생각이 전혀 없었어. 벨리알은 다만 자진해서 소속을 바꾸겠다고 했을 뿐이야. '원래대로'라면 우리가 그쪽에 사과를 해야 할 이유 따위는 어디에도 없지만 말이야……그래도, 뭐.”
바르바토스가 목을 삐닥하게 기울여서 뒤쪽에 서 있는 평원파 마왕들을 쳐다보았다. '그렇지?' 하고 동의를 구하는 모양새였다. 물론 진지한 태도는 아니었다. 평원파 마왕들이 우스갯소리를 들은 것처럼 조용히 웃어댔다.
“내가 약간 부주의했던 것 같기도 해. 이야아, 겨우 하위 마왕 한 명이 이탈하려고 했을 뿐이잖아. 설마 그거 가지고 발정난 원숭이처럼 길길이 날뛸 줄은 몰랐지. 그 정도로 산악파의 분위기가 나빴을 줄 미처 몰랐어. 미안, 미안.”
“…….”
“내가 조금 배려심이 부족한 면모가 있거든. 약소 파벌의 사정까지 헤아려서 행동거지를 잘 다스려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아니, 정말로 미안해. 파이몬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했나? 어차피 움직이지도 못하는 시체인데, 뭐. 고개쯤이야 얼마든지 숙여줄게.”
바르바토스가 연극 무대에 선 극단주마냥 양팔을 활짝 벌리고 유리관을 향해 깍듯하게 인사했다. 어디를 어떻게 봐도 진심으로 사죄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안치소의 공기가 끊임없이 싸늘해지는 가운데,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들어서 씨익 웃었다.
“그런데 시트리. 내가 진짜로 궁금해서 호기심 때문에 물어보는 건데.”
“…….”
“그깟 조무래기 하나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쓰레기 조직은, 그냥 차라리 멸망해버리는 편이 세상을 위해서나 고인을 위해서나 올바른 일 아닐까?”
시트리가 사복검을 휘둘렀다.
칼날이 채찍처럼 휘어져서 바르바토스의 목덜미에 꽂히려는 순간, 벨레드 형님이 어느새 검격을 가로막는 위치에 서 있었다. 벨레드 형님은 장작을 패듯이 사복검의 허리를 내리찍었다. 쿵, 하고 안치소 바닥이 흔들렸다.
찰나에 공격이 이루어졌으며, 찰나에 공격이 차단당했다.
“―――.”
벨레드 형님이 시트리를 향해 비웃음을 흘렸다. 이미 전투태세에 들어간 것일까. 벨레드 형님의 갈색빛 근육이 살아 움직이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에 반해, 시트리는 무심하고 차가운 얼굴로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했구나.”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그녀는 벨레드 형님에게 몸이 반쯤 가려져 있었다.
“이 나를, 먼저 공격해버렸어.”
바르바토스가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검은색 마나가 소용돌이를 치며 그녀의 손에서 퍼져나갔다. 곧이어, 바르바토스의 상징이자 반신(半身)인 대낫이 소환되었다. 신체뿐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절단해버리는 사신의 대낫이.
“마르바스 영감. 이제 어쩔 거야? 저쪽이 먼저 나를 공격해버렸는데.”
“…….”
“아직도 정치적 타협이니 뭐니 물렁한 얘기를 꺼낸다면, 나 영감한테 조금 실망해버릴지도 몰라.”
마르바스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쌌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모양이었다. 마르바스는 얼굴 표정을 가린 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원. 평원파에 합세해주게나.”
중립파 마왕들이 일거에 칼끝을 돌렸다.
이로써 평원파 9명, 중립파 6명, 총 15명의 마왕이 산악파를 에워싸는 형국이 완성되었다.
비록 산악파가 총 11명으로서 숫자상 아주 불리한 것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수가 아니라 질이었다. 평원파에는 바르바토스, 벨레드, 제파르가 있었다. 중립파 마왕들은 다들 하나같이 전쟁에 숙달된 장수였다. 주로 온건한 마왕들이 속한 산악파에게 지금 상황은 너무도 버거웠다.
“크윽…….”
“무례한 짐승 새끼들이……!”
산악파 마왕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조금이라도 공간을 좁힘으로써 적은 아군으로 많은 적군을 상대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기세에서 밀리고 있었다.
그중 일부는 본능적으로 안치소 출입구를 흘겨보았다. 여차하면 도망칠 구석을 확보하고 싶겠지.
“헤에. 다들 싸울 생각 만만이네~.”
애석하게도 출입구 방향은 세 마왕, 바싸고와 가미긴 그리고 아몬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들은 무기를 들고 있지 않았으나 이런 상황에서, 이런 형국에서, 하필 입구를 차단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만큼 멍청한 사람은 여기 없었다. 그걸 증명하듯이 가미긴이 흥미진진한 눈동자로 안치소 중앙을 바라보고 있었다.
“…….”
“…….”
평원파 마왕들이 한 발자국 내딛었다.
그에 응답해서 산악파 마왕들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침묵이 요동치고 있었다.
평원파 마왕들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사냥감을 사방에서 둘러싸는 암사자 무리처럼 천천히 상대편을 옥죄었다. 기껏해야 일 분에 한 걸음을 내딛었다. 다만,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안치소에서는 하나의 걸음이 결정적이었다.
오 분이 흐르자, 산악파 마왕들은 평원파 마왕들에 의해서 완벽하게 포위당했다. 그 뒤에서는 중립파 마왕들이. 더 뒤쪽에는 무소속 마왕들이 버티고 있었다. 물 샐 틈조차 없다는 건 이런 형세를 가리키겠지.
“진부하게 항복을 권고하지는 않겠어.”
바르바토스가 미소를 짓고 말했다.
“하지만, 시트리. 네 년만큼은 아니야.”
“…….”
“파이몬이 죽어서 슬펐어? 산악파가 공중분해되면 파이몬이 세상에 남긴 증거까지 사라질 것 같아서 불안했냐? 그래서 무고한 마계의 인민을 십만 명이나 도륙했냐. 그렇게 하면 파이몬의 원혼이 얌전해져서 편히 눈을 감을 거라고 생각한 거냐.”
바르바토스의 표정이 일순 차가워졌다.
여태껏 장난스럽게 풍기던 웃음기가 일체 증발했다.
“웃기지 마, 쌍년아.”
“…….”
“내가 진실을 말해주지. 네가 학살극 따위를 저질러서 가장 절망했을 마왕을 한 명 뽑으라면, 그게 바로 네가 사랑하고 또 사랑한 파이몬이다. 너는 마왕으로서 책무를 저버렸을 뿐만이 아니라, 네가 온몸을 바쳤다고 울부짖는 년의 마음까지 배신한 거야.”
바르바토스가 소리쳤다.
“마르바스! 이 자리에서 안건을 제출한다! 십만의 무고한 백성을 학살한 죄!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마왕 벨리알을 사사로이 주살한 죄! 두 가지 죄를 물어서, 죄인 시트리를 마왕군의 이름으로 처단한다!”
“……안건으로 받아들인다. 죄인으로 지목된 마왕 시트리와 죄인을 지적한 바르바토스, 아울러 의장인 본인은 일시적으로 선제후의 자격을 박탈. 남은 세 명의 선제후가 투표를 행사한다.”
마르바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절할 이유가 딱히 없으니까 동의할게~.”
“물론, 동의하오.”
“……흥. 본인도 동의한다.”
가미긴, 제파르 형님, 바싸고가 찬동했다.
마르바스가 한숨을 쉬었다.
“투표권을 가진 세 명이 전원 동의했으므로 마왕 시트리에 대한 처단을 만장일치로 가결한다.”
“터무니없는 결정이다!”
“네놈들, 제정신인가!”
마르바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산악파 마왕들이 고함을 질렀다. 단지 코앞에서 평원파와 서로 칼날을 겨누고 있는 상태인지라 시선을 딴곳으로 돌리지는 못했다.
바르바토스가 히죽거렸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그쪽 양반들. 아직은 명예롭게 소속을 바꿀 수 있어.”
“…….”
“나는 관대해. 학살자 시트리를 처단하는 데 함께할 사람이 있다면 지금 말해라. 앞으로 딱 삼십 초만 기다려주겠어.”
산악파 마왕들이 치켜든 검이 불안하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