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22 황금의 몰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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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모든 마왕이 모였다.
모든 마왕, 이라고 거창하게 말해보았다마는 실제로 머릿수는 많지 않았다. 서른한 명. 고작 서른 한 명이었다. 한때 일흔두 명의 성세를 자랑하던 마왕군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제 반절도 안 되는 인원만이 남았다.
그때 시절과 비교하면 거의 몰락했다고 표현해도 부족하겠지. 머릿수뿐만이 아니었다. 가장 강대하고 강력한 마왕이라 불리우던 바알도, 아가레스도 죽었다. 마왕군의 질 자체가 압도적으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왕군은 삼천 년 역사가 시작한 이래 유례없는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신생 마왕군에 대한 마족들의 지지는 최고조였다. 대륙의 인간들은 마왕군의 위엄에 암묵적으로 복종하였다. 과거, 검은 산맥 일대에만 통치력을 발휘하던 마왕군은 이제 대륙 중부 전체는 물론이거니와 서쪽으로는 브르타뉴 왕국까지, 남쪽으로는 사르데냐 왕국까지, 동쪽으로는 폴리투니아 왕국까지 손길을 뻗었다.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약화된 마왕군은.
역설적으로, 역사상 전무후무한 황금시대를 펼쳐냈다.
“……마르바스 님은 아직인가…….”
“가미긴 전하께서는 곧 도착하신다고…….”
마왕들이 수군거렸다. 돔형의 지붕에 속닥거림이 나지막하게 울렸다. 지붕 꼭대기에는 둥그렇게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곳으로 밤공기와 함께 한 자락의 달빛이 떨어졌다. 서늘하게 푸른 달빛을 제외하고는 조명다운 조명이 없었다.
“오늘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안타깝게도 그럴듯한 정보가…….”
마왕들은 몸의 절반 가량을 어둠에 파묻어두고 있었다. 그렇지만 불평을 토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왕들은 태생적으로 밤눈이 밝았으며, 밝은 곳보다 어두운 곳에서 떠들기를 좋아했다.
달빛이 떨어지는 건물 정중앙에는 유리관이.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마치 잠든 듯이 누워 있었다.
이곳은 파이몬의 안치소였다. 오로지 그녀를 위해서 황궁에 새로이 만들어진 장소. 그곳에서 마왕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는둥 마는둥 하며 잡담을 나누었다. 어두침침한 허공 속에서 모든 윤곽이 애매했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입술들만이 간신히 뚜렷하게 비추었다.
“…….”
그때 무언가가 내 오른손을 감쌌다. 고개를 돌려보니, 바르바토스가 내 손을 꾸욱 잡고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고개 돌리지 마, 밥팅아. 다른 애들이 알아채잖아.”
“내가 그만 눈치 없게 행동해버렸군.”
나 역시 조그맣게 중얼거려서 대답해준 다음,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도로 시선을 돌렸다. 맞은편에는 시트리를 비롯해서 열한 명의 산악파 마왕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서로 귓속말을 나누면서 때때로 고개를 끄덕였고, 때때로 이쪽을 곁눈질했다.
“나를 선택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을 거야. 단탈리안. 네가 후회하지 않도록 만들어주겠어.”
“거 든든한 호언장담이네.”
내가 희미하게 웃었다.
바싸고와 가미긴, 두 사람 모두 나에게 각기 다른 이유로 설득되었다. 바싸고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서 결단을 내렸다. 반면에 가미긴은 오히려 기뻐서 날뛰며 ‘당연하지, 당연히 할게’라고 열렬히 좋아했다. 현재 두 사람은 건물 한쪽 구석에 뿔뿔이 흩어져서 조용히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
문득 바싸고와 눈길이 마주쳤다. 바싸고는 내가 바르바토스와 손을 잡은 모습을 흘겨보고, 차마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다는 듯 인상을 와락 찡그렸다. 그리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
“쿡.”
바싸고의 심리가 손에 잡히는 것 같아서 작게 웃었다.
나는 내가 점점 더 완벽해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원래부터 재능이 있었는지, 아니면 생뚱맞은 세상에 홀로 내팽개쳐진 극한상황이 내 무언가를 각성시켰는지, 정확히 어느 쪽인가는 모르겠어도 정치와 관련해서 나의 머리는 점점 더 뚜렷해졌으며, 날이 갈수록 무뎌지키는커녕 막 핏물이 맺힌 식칼처럼 생생하게 날카로워졌다.
상대방이 취하는 눈빛과 표정 따위가 나에게 직접 말을 건넸다. 상대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어떻게 해야 그 두려움을 이용해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분위기를 이끄는가, 감히 장담하건대 나는 모조리 알았다.
다만 단점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까지 내가 머릿속에 저장한, 혹은 저장되어버린, 사람들의 눈짓과 몸짓이 이따금씩 눈앞에서 저절로 재생되었다.
이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었다. 라우라도 몰랐다. 나와 모든 비밀을 공유하는 라피스조차 몰랐다. 제딴에는 나에 대한 것을 죄다 간파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데이지도, 당연하지만 이것만큼은 몰랐다.
─ 개 같은 놈.
허공에서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환청이었다.
여기 안치소처럼 어두운 장소가 특히나 위험했다. 밝은 장소에서는 비교적 환청이나 환각 따위가 생겨나지 않았다. 다만 시야가 멀어졌을 때, 즉 먼 곳의 풍경이 보이는 경우에는 꽤나 잘 나타났다.
─ 옥체에 어디 편찮은 구석은 없어? 응?
─ 자네가 마지막일세.
─ 거짓말……어째서…….
여하간에 이런 장소는 나에게 쥐약.
맥락도 없이, 대충 이십 초에서 삼십 초 정도의 간격을 두고 바로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목소리가 되풀이되었다. 나는 환청이 들릴 때 늘 그러했듯이, 품속에서 연초를 꺼내어서 입에 물었다.
“후우.”
연하게 피어오르는 연기 너머로 환청보다 훨씬 더 흐릿한 수준의 광경이 보였다. 뭐라고 할까. 내가 '본다'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보인다'라는 느낌이 강했다. 나의 뇌수가 맛이 가서 제멋대로 보여주는 연극을 나는 찬찬히 구경했다.
그건 아주 웃기는 광경이었다. 사람들이 안치소의 유리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두운 구석에 모여들어서 작은 소리로 대화하고 웃고 떠들었다.
웃음소리가 반짝거리는 먼지들과 함께 공기에 녹아들었다. 공기는 반은 지붕에서 새어나오는 달빛에, 또 나머지 반은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리프의 얼굴, 호크의 얼굴, 잭의 얼굴 등등을 하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오늘도 지랄발광을 하는군.
실로 별 것이 아니었다. 내가 한번 미친 척하고 '저것'에 말을 걸어본 적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아도 저들이 떠들어대는 것은, 아까도 말했다시피, 맥락 따위가 전혀 없었다. 가끔은 잭의 얼굴을 한 그림자가 엘리자베트의 목소리로 대화할 때도 있었다. 말 그대로 생지랄이었다.
그러니까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실물도 아니고, 실체도 없다.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푸욱 파인 발자국들과 같은 것으로서――길을 걸을 때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수밖에 없을지라도, 막상 뒤를 돌아보면 그동안 남긴 발자국들이 쭈욱 한꺼번에 보이듯, 꼭 그처럼 저 그림자들도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질 따름이다.
가끔씩 보면 꼭 쟤네가 살아 있는 것처럼, 마치 삶은 저들만의 특권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마는.
그야말로 착각이겠지.
나는 살아 있었다.
“……단탈리안?”
봐라. 지금도 내 오른손에는 바르바토스의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졌다.
내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불안해서 그래.”
“흐응? 웬일로 네가 약한 소리를 다하네.”
“이런 날에는 나도 약한 흉내 정도는 내고 싶어지거든.”
바르바토스가 한결 더 강하게 내 손을 잡아주었다.
“웬만하면 자주 약한 흉내를 내봐. 그러면 네 징그러운 면상이 약간은 귀엽게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야. 혹시 몰라? 내가 침대에서 조금 더 봉사해줄지.”
“크흠. 흠흠…….”
뒤편에서 제파르 형님이 헛기침을 했다. 제발 체통 좀 지켜주십시오. 대충 그런 의미였다. 바르바토스가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는 무심코 작게 웃었다.
일단의 중립파 마왕들이 안치소에 입장한 것은 그쯤이었다. 마르바스가 앞장서서 다섯 명의 중립파 마왕들을 거느리고 걸어들어 왔다. 마르바스는 먼저 바르바토스와 눈을 마주치고, 나와 마주친 다음, 안치소의 입구에 똬리를 틀었다.
산악파 열한 명.
평원파 아홉 명.
중립파 여섯 명.
무소속 다섯 명.
이로써, 총 서른한 명의 마왕 전원이 집합했다.
“발푸르기스의 밤을 개최하기에는 상당히 부적절한 장소로군.”
마르바스가 입을 열었다.
“본인은 고인의 눈앞에서 난동이 일어나는 사태를 좌시하지 않을 것일세. 황궁에는 이미 반(反)마법이 펼쳐져 있네마는 이곳은 본인이 특별히 신경을 기울여서 마법에 금제를 걸었다. 오늘 모여준 동지들께서 부디 평소보다 더욱 더 언동에 신경 써주기를, 진심으로 당부한다.”
마왕들이 소리를 내어 대답하진 않았지만 대체로 찬동하는 분위기였다. 마르바스가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허면, 오늘 이 자리, 발푸르기스의 밤이 개최됨을 의장으로서 선언한다. 본래 의장은 단탈리안 궁중백이 맡는 것이 관례이나…….”
마르바스가 나를 쳐다보았다.
“오늘, 쟁점이 될 의제가 매우 민감한 관계로 오늘밤만큼은 본인이 의장을 대리하겠다. 이는 사전에 투표권을 가진 여섯 명의 마왕이 전원 찬성한 바, 본인에게는 회의를 진행할 권리, 발언을 허락할 권리 및 발언을 중단시킬 권리, 의제를 투표에 부칠 권리, 회의를 연기하고 파기할 권리가 정당하게 인정된다. 다섯 선제후(選帝侯)는 본인에게 일체의 권리를 맡길 것을 동의하는가?”
“동의해.”
“동의하겠어.”
순서대로 바르바토스, 시트리, 가미긴, 제파르, 바싸고가 대답했다.
마르바스가 턱 끝을 끄덕거렸다.
“좋다. 허면, 발푸르기스의 밤을 열 것을 제청한 시트리부터 발언하도록.”
“내 요구.”
시트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아니, 우리 산악파의 요구는 간단해. 알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겠지만, 그저께 우리는 마왕 벨리알을 처단했어.”
“마왕이 마왕을 사사로이 벌하는 것은 강력하게 금지되어 있다.”
마르바스가 엄하게 질책했다.
“만일 어느 마왕에게 잘못이 있었다면 마땅히 발푸르기스의 밤에 의제를 올려, 그 마왕을 처벌할 것인지, 만일 처벌한다면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 세세하게 의논해야만 한다. 시트리여. 적법한 과정을 건너뛰고 벨리알을 주살한 까닭은 무엇인가.”
“응. 내가 잘못한 건 맞아.”
시트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발푸르기스의 밤 자체를 신뢰하지 못하겠다면 어떨까.”
“무슨 뜻인가?”
“벨리알이 우리 파벌을 배신하도록 의도적으로 책동한 사람이 있다는 얘기야.”
마왕들이 웅성거렸다. 마르바스가 눈썹을 치켜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마왕들이 입술을 닫았다. 마르바스는 시선을 시트리에게 되돌렸다.
“그게 누구인가, 시트리. 미리 말해둔다만 심증만으로 상대를 비난할 수는 없다. 설마 증거도 없이 벨리알 살해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려는 의도는 아니리라 믿는다.”
“물론, 우리에게는 심증뿐만이 아니라 증거도 증인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어.”
시트리가 덤덤히 대꾸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범인을 찾아내어서 필요 이상으로 강력하게 처벌하는 게 아니야.”
“허면?”
“우리는 '진심 어린' 사과를 바라고 있어.”
시트리가 이쪽을. 평원파 마왕들이 서 있는 이곳을 노려보았다.
“우리가 지적하기 전에 상대방이 먼저 나와서 고개를 숙여주기를 원해. 우리에게. 그리고 여기 잠들어 있는 파이몬 언니에게.”
그래서 하필 파이몬의 안치소에서 회의를 열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벨리알로 하여금 파벌을 배신하게 만들고, 우리의 정보를 몰래 넘기게 만든 사람이, 솔선해서 사과하는 것.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 우리가 원하는 건 그뿐이야. 아주 온화한 요구라고 생각하고 있어.”
“…….”
주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무도 섣불리 소리를 내지 않았다. 마르바스 역시 시간을 두고 기다리려는 듯 조용했다. 그렇게 일 분 정도가 흘렀을까.
“아아. 알겠어, 시트리.”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그 사과. 내가 하겠어.”
하얀 머리카락을 지닌 마왕.
평원파를 지배하는 자――바르바토스가 유리관을 향해서 한 걸음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