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21 황금의 몰락 =========================================================================
바르바토스의 손바닥은 얼음장처럼 서늘했다.
“단탈리안 너, 일부러 모른 체하고 있는 거지.”
내가 상체만 비스듬하게 돌려서 바르바토스를 쳐다보았다. 내 몸을 놔줄 생각이 없는 것일까. 바르바토스는 계속 손목을 쥐어잡은 채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키 차이 때문에 그녀가 내 얼굴을 올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모른 체라니. 무엇을?”
“그냥 이참에 산악파를 흡수해버려도 되잖아. 무엇보다도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이지. 제파르가 고개를 숙일 필요도, 네 자식이 고개를 숙일 필요도 없어. 파이몬 년이 남긴 유산을 이번 기회에 모조리 지워버리면 만사형통이야.”
사자와 같은 황금색 눈동자가 살기로 번들거렸다.
“산악파 녀석들이 지금 죄다 여기 황궁에 모여 있다고? 잘 됐어. 좋은 기회야. 한번에 싸그리 청소해버릴 수 있겠네.”
“……제정신이냐, 바르바토스.”
나는 기가 막힌 나머지 헛웃음을 흘렸다.
“상대쪽에서 원하는 것은 단순한 사과 한 마디다. 네가 직접 사과할 필요도 없어. 그저 내가 고개를 숙이면 모든 것이 행복하고도 안전하게 끝난다. 그런데 기어코, 머리 하나 숙이는 게 어려워서, 전쟁을 벌이겠다는 거냐?”
“우리는 잘못한 게 없어. 제파르도 잘못하지 않았고, 너도 잘못하지 않았고, 그리고 시발 나도 잘못한 게 없어. 단탈리안. 저 개 같은 불씹장이한테 왜 사과를 해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바르바토스는 진심인 것 같았다.
“그게 정치란 거다.”
“정치는 최소한 대등해 보이는 사람들끼리 성립하는 수단이지. 나는 가장 강력한 마왕이야.”
내 손목을 휘어잡은 바르바토스의 손길에 힘이 들어갔다.
“더 이상 우리에게 정치는 필요하지 않아.”
“…….”
“내가 여태까지 산악파를 짓밟지 못하고 내버려둔 이유는 하나뿐이야. 파이몬 년이 마족들에게 인기가 많았거든. 원래 창녀처럼 헤프게 웃음을 흘리고 다니는 여자에게 사람들은 홀리기 마련이지. 하지만 이제 파이몬은 죽었어.”
바르바토스가 입가를 비틀었다.
“그리고 시트리는 자기가 얼마나 멍청한지 증명했지. 자그마치 십만 명의 마족을, 아무런 죄도 없는 백성을 학살했다고. 자기네 파벌의 생명줄이 마족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도리어 스스로 마족을 죽여댔어. 어리석은 년…….”
“덕택에 산악파는 하나로 단결되었다.”
“허약해빠진 것들이 하나로 뭉쳐봤자 지나가던 똥개도 두려워하지 않아.”
실제로 바르바토스는 정확한 지점을 타격하고 있었다.
시트리가 공포로 군림해준 덕에 산악파는 지금처럼 위급한 시기에도 하나로 뭉쳤다. 그러나 문제는 대중의 지지였다.
현재 마족들은 파이몬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다. 감히 파이몬 전하를 암살한 마계 대공들은 사지를 갈갈이 찢어도 시원치 않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시트리가 자행한 학살극, 대공과 같은 지배자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민간인까지 쓸어버린 대규모 범죄에 대해서는……당연하게도 매우 부정적이었다.
피투성이 시트리. 그것이 시트리에게 새롭게 붙은 별명이었다.
다만 아무도 소리 높여 비난하지 못했다.
비난하고 싶어도 비난하지 못했다.
마계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자들이 간단하게 죽어버렸다. 십만 명의 백성이 열흘 남짓하는 기간에 매장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트리에게 욕설을 날릴 만큼 대담한 마족은, 적어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전부 지하에 파묻혔으니까.
그러니까, 달리 말하자면.
“시트리는 제 손으로 무덤을 파고 있어.”
마족이 아니라 마왕이라면. 유일하게 마왕에게 대항할 수 있는 동족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시트리를 비난하는 것이 가능했다.
“무고한 마인을 십만 명 죽인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허용한계를 뛰어넘었어. 그런데 이제는 자기 파벌인 벨리알까지 숙청했지. 단탈리안, 이 멍청아. 이런 때 우리가 고개를 숙이면 안 돼. 이건 기회야. 다시는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
바르바토스의 말이 옳았다.
만일 산악파를 없애고자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하늘이 선사한 기회였다.
우두머리인 파이몬이 암살되었으며, 새롭게 수장으로 등극한 시트리는 인망을 잃어버렸고, 반면에 평원파는 굳건하게 성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평원파에게는 산악파를 추락시킬 명분과 실력이 갖추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걸 지적하지 않은 까닭은…….
“파이몬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마, 단탈리안.”
“…….”
“네가 이제 와서 산악파를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고 해봤자 꼬락서니가 우스워질 뿐이야. 왜? 시트리가 미쳐버리니까 불쌍해지기라도 했어? 갑자기 이게 전부 너의 잘못인 것 같아서 자괴심이라도 들었냐?”
바르바토스가 비웃었다.
“웃기지 마. 동정심이나 자책감 같은 싸구려 감정은 개돼지한테나 어울리는 사료야. 영혼에 군살을 늘리는 것 이외에 쓰잘데기라곤 어디에도 없지. 네가 이렇게 물렁하게 나올 거였다면, 아예 처음부터 파이몬을 죽이지 말고――.”
바르바토스는 내 손을 잡아 끌어서 자신의 가슴에 올려놓았다.
“나를 죽였어야지. 날 선택하는 대신에 파이몬 그년을 선택해야 됐어. 하지만, 단탈리안 멍청아. 너는 나를 골랐어. 영원히 선택의 몫을 짊어져야 한다고!”
바르바토스가 내 뺨을 쳤다. 강하게 친 것이 아니었다. 고개가 약간 돌아갈 정도로 강도가 낮았다.
육체보다는 정신을 때리는 듯한, 그런 손짓이었다.
“어설프게 나오지 마. 끝까지 독해져. 이건 네가 말한 대로 단순한 정치야. 그리고 정치의 본질은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잡아 먹힌다는 거야! 파이몬이 사라진 산악파에는 아무런 명분도 쓸모도 없어! 도대체, 명분도 쓸모도 없는 약자를 우리가 왜 살려둬야 하는데!”
그제야 바르바토스가 내 손목을 풀어주었다.
하지만 바르바토스의 시선만큼은 시종일관 내 몸을 옭매었다. 그것이 나를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결정했어. 제파르가 보고할 때만 하더라도 반신반의했지만, 네가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준 덕택에 마음이 바로 섰어. 아아, 그래. 이참에 마왕군을 갉아먹는 구더기들을 갈아버릴 거야.”
“무모해. 산악파에 무투파가 거의 없다 하더라도 시트리가 있어.”
“하, 입은 삐뚫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 시트리 년을 빼면 아무도 없는 거지. 그년이 벨레드랑 제파르 그리고 나를 한꺼번에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십 분이라도 버티면 대단한 기적이겠는걸.”
내가 입을 다물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잠시 휴지(休止)를 두고 말했다.
“……평원파가 독주하는 걸 다른 마왕들이 방관할 리 없어. 당장에 마르바스를 봐라. 누구보다도 상식적인 교양인이 이번 학살에 대해 침묵하는 이유도, 지금 산악파가 무너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트리가 벨리알을 죽였다는 정보를 넘겨주겠어.”
바르바토스가 즉답했다.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얘기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이미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홀로 정원에 앉아 연못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숙고했겠지. 그렇게 바르바토스는 계획을 짜고 있었다.
“마르바스 영감탱이가 두려워하는 건 파벌의 붕괴 그 자체가 아니야.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이지. 만약 시트리 년이 제어 불가능한 수준으로 날뛰고 있다는 확신이 들면, 영감탱이는 다소의 출혈을 각오해서라도 시트리를 배제시킬 거야.”
그것 역시 사실이었다.
시트리가 민간인을 학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심지어 공포정치를 지속하기 위해 같은 파벌의 마왕까지 망설임 없이 죽였다고 하면, 마르바스 역시 심각하게 산악파의 해산을 노릴 것이었다.
“산악파 마왕을 죄다 죽여버릴 필요도 없어. 어차피 지들을 이끌어주는 우두머리가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찌질이들이야. 시트리만 없애버리면 알아서 기어다니겠지. 뭣하면 그놈들 전부 중립파에 들어가도 상관없어.”
“…….”
“그리고, 단탈리안. 십만 명의 마인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었어.”
바르바토스가 음울하게 말했다.
“마왕이란 마인을 책임지는 자. 그 책무를 잊어버리고 사사로운 복수심에 눈이 멀어 날뛰어댄 시트리에게는 이미 마왕을 자칭할 자격조차 없어. 나는 마인들을 위해서라도 시트리를 처단하지 않으면 안 돼.”
바르바토스에게는 이것이 결정적인 이유이겠지.
단지 결정적인 호기를 잡아채지 못해서 가만히 숨을 죽인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 입장에서 시트리가 벨리알을 숙청한 것은 도리어 간절하게 바라던 바였다. 실로 오래된 숙원, 산악파를 없애고 평원파야말로 마족의 의지를 대신한다는 구상. 그걸 이룰 수 있는 기회였다…….
“단탈리안. 내가 브루노에서 말했지. 이제 너는 더 이상 애송이가 아니어야 한다고. 만마(萬魔)의 총의를 등에 짊어진 마왕이 되어야 한다고. 만일 우리에게 왕이 되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면――그건 바로 지금과 같은 때를 말하는 거다.”
“…….”
“자신의 백성을 십만이나 몰살시킨 미치광이를 처단해. 거기에 죄책감같이 사적인 감정이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어.”
바르바토스가 주먹으로 툭, 하고 내 가슴을 가볍게 두들겼다.
“마르바스 영감은 내가 설득하겠어. 너는 바싸고와 가미긴을 설득해줘. 두 사람 다 네 부탁이라면 사막 한가운데서라도 발가벗고 춤을 출 테니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내가 영감만 설득해내면 모든 것이 끝나.”
그리고 바르바토스는 나를 지나쳐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밤구름이 달을 가려서 어둑해진 뒷정원의 돌길을, 하얀 장발의 마왕이 천천히 밟았다.
“만약 도저히 시트리를 죽이지 못하겠다면……나한테 와서 직접 말해. 거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너의 감정을 존중해줄게. 하지만 너에게 많이 실망하게 될 거야. 아주 많이.”
발걸음 소리가 점점 더 멀어지더니 이윽고 어느 시점부터인가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정원에 혼자 남겨졌다.
바르바토스는 언제나 나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했고 이번에도 그러했다. 파이몬인가, 나인가. 시트리인가, 나인가. 흐릿하고 불분명한 상태를 뚜렷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선택의 책임을 껴안는 것은 나였다.
나는 거기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았다.
바르바토스를 탓하고 싶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가지려고 한 내가 원인이었다. 평원파도, 산악파도, 중립파도, 무소속 마왕들도, 모두 내가 조종하고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숙한 자신감이라고 평가해야겠지. 당연하게도, 누천 년 동안 대립해온 파벌들과 개인들이 고작 나 하나 때문에 오래된 앙금을 털어버릴 리가 없었다.
이런 형태가 아니었더라도 언젠가 나는 바르바토스와 파이몬, 둘 중 하나를 잘라냈어야 하리라.
단지 나는 그것이 적어도 십 년 후에 벌어질 일이라고 생각했으며.
파이몬과 바르바토스는 지금 당장 벌어지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파이몬은 공화주의 대표회의라는 초강수를 두었고, 바르바토스는 마계대공들을 활용해서 파이몬을 암살했다. 어차피 언젠가 다가올 일이라면 자기가 먼저 선수를 치겠다고, 선수를 치지 않으면 당하는 것은 자신이라고, 두 사람 모두 생각했다.
“…….”
역시나 어설펐던 것은 내 쪽인가.
어디에선가 실수를 저질렀는가.
바르바토스는 의도했건 의도치 않았건 매우 올바르게 지적했다. 나는 영원히 책임을 껴안고 가야만 했다. 파이몬의 뜨거운 피가 내 손바닥을 적셨을 때 나는 이미 그것을 확고하게 직감하고 있었다…….
나는 발길을 돌렸다. 그 방향에는 가미긴이 머무르는 침실이 있었다.
이제부터 나는 가미긴을 설득한다. 다음에는 바싸고다. 멈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바르바토스도, 나도, 시트리도, 결코 멈출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