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20화 (420/510)
  • 00420 황금의 몰락  =========================================================================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창밖에 어둑했다.

    “…….”

    나는 제파르 형님의 방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창문이 슬그머니 열린 틈새로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한동안 멍하게 새들이 밤하늘에 울려보내는 소리를 들었다. 꼭 청각이 의식의 전부를 차지한 것 같았다.

    “끄으응.”

    점차 시각과 촉각이 청각을 밀어냈다. 우선 뺨이 꺼끌꺼끌했다. 카펫에다 얼굴을 처박고 기절해버린 탓인지 빰에 자국이 잔뜩 눌렸다. 나는 오른손으로 뺨을 쓰다듬으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는데, 이쯤에 와서야 처음으로 머릿속에 생각이라 할 만한 것이 돌아갔다.

    ‘……여기까지는 시나리오대로 흘러가고 있다.’

    그렇다. 시나리오였다.

    그 단어를 떠올리자, 마치 하나의 낚싯줄에 물고기가 여러 마리 매달려서 튀어오르는 것처럼 곧바로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었다. 산악파. 시트리. 평원파. 바르바토스. 내분과 선동――.

    희생양.

    제파르 형님을 희생양으로 삼아버리겠다는 계획. 그것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서둘러 확인해야만 했다. 나는 품속에서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확인했다. 눈가가 쾡쾡했다. 머리가 엉망이었다. 이런 몰골로는 시골 처녀조차 꼬시지 못하겠지.

    하지만 엉망인 정도가 딱 좋았다. 지금은 모든 것이 엉망일 필요가 있었다.

    나의 각본은 간단하면서 효율적이었다.

    먼저, 산악파가 똘똘 뭉치도록 배신자 벨리알을 처단한다. 이건 자칫 파이몬의 죽음으로 인해 산악파가 약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다음으로, 평원파에서는 제파르 형님을 희생양으로 만든다. 제파르 형님은 평원파의 한쪽 날개다. 형님이 무너지는 것은 그 자체로 평원파의 정치세력이 약화되는 걸 의미한다.

    산악파의 힘은 강화한다. 평원파의 입지는 좁힌다. 그리하여 다시금 마왕군에 새로운 균형을 마련한다…….

    다만 제파르 형님만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생각해보라. 산악파는 파이몬을 잃어버렸다. 꼬리나 양팔 따위가 아니라 머리통 자체가 잘린 셈이었다. 제파르 형님에게서 정치적인 생명을 앗아가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균형이 맞지 않았다.

    “좋아.”

    나는 손거울을 집어 넣었다.

    산악파가 머리를 잃었다면, 마찬가지로 평원파 역시 머리를 잃어야 했다.

    무엇을 숨기겠는가.

    “게임을 시작하자……바르바토스.”

    바르바토스는 그녀가 경계선을 넘어버린 것에 대해 스스로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었다.

    *  *  *

    바르바토스는 본인의 침실이 아니라 황궁 뒷정원에 있었다.

    그녀는 포도주를 홀짝이면서 초점이 불분명한 눈길로 정원의 연못을 바라보았다. 내가 발소리를 내면서 다가서자, 바르바토스는 슬쩍 이쪽을 쳐다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요즘 얼굴 보기 어려운 분께서 오셨군.”

    바르바토스가 재미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허구한 날 안치소에서 다른 여자랑 데이트를 즐기는 신사께서 말이야, 오늘은 허파에 무슨 바람이 들어서 옛 애인을 찾아오셨는지 모르겠네. 드디어 시체와는 떡을 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셨으려나.”

    “나는 바르바토스. 너를 만나러 온 게 아니야.”

    바르바토스가 코웃음을 치고 술잔을 약하게 흔들었다.

    “헤에, 그거 신기하네. 지금까지 나는 내 이름이 바르바토스인 줄 알고 살았거든. 이천 년이 넘도록. 혹시 내가 착각하고 있던 거라면 부디 수정해주기를 바라겠어.”

    “평원파의 수장이자 제국의 섭정을 보러 온 거다.”

    “…….”

    바르바토스가 나를 노려보았다. 황금색 눈동자는 명백히 피로에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날카로움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게 전부야? 꼬박 한 달 만에 겨우 찾아와서 하는 소리가 그거야?”

    “바르바토스. 나는 딱히 너를 피한 게 아니야. 가미긴도 만나지 않았어.”

    “하. 감히 그 정신병자 젖탱이랑 나를 비교하지 마.”

    바르바토스가 위협적으로 말했다.

    “애당초 네가 가미긴한테 애정을 갖고 있기나 해? 처음부터 이용하려고 따먹은 거잖아, 개자식아. 진심으로 그런 년을 나와 동일선상에 놓으려는 거야?”

    “…….”

    우리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파이몬이 죽은 이후로 우리는 항상 만날 때마다 싸웠다.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해서 결국에는 서로의 자존심을 걸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다보니, 이제는 눈짓 하나만 보아도 상대방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거진 짐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에게 네가 제일이라는 걸 다시 증명해주기를 바라는 거냐.”

    내가 입술을 열었다.

    “파이몬으로는 아직 부족해? 가미긴도 죽여야 성이 풀리겠나. 이참에 시트리도 죽여서 아예 너만 바라보고 사는 남자가 되어줄까? 그게 정말로 네가 원하는 것이냐.”

    “나한테, 그딴 식으로 지껄이지 마.”

    “오오. 당연히 공손하게 말씀을 올려야지요, 바르바토스 각하. 각하께서는 평원파의 위대하신 우두머리이시고 저는 각하가 아니었다면 밑바닥 시궁창에서 해매었을 놈이니까요.”

    내가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 만났을 때처럼 존댓말을 써드릴까요? 그러는 편이 각하의 마음에 드십니까? 죄송합니다. 각하의 귓구멍이 이토록 상처에 약하실 줄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

    바르바토스가 이빨을 까득 깨물었다. 이건 그래도 양반이었다. 서로 손찌검이 오가고 고함을 질러대는 날도 심심찮게 있었다. 우리의 관계에서 품위는 점점 더 옅어지고 있었다.

    “너와 싸우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바르바토스. 정치적인 이야기만 나누자.”

    “……좋아. 어디 한번 말해봐, 궁중백.”

    “제파르 대장에게 사과를 시키면 안 돼.”

    바르바토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아마 제파르 형님은 바르바토스를 찾아가서 이번 사태에 대해 설명했겠지. 자신이 부주의하게 실수를 범한 탓에 쓸데없이 산악파를 자극했다고, 그러니 책임을 지고 산악파에 사과하겠노라고 말했으리라.

    하지만 벨리알을 만나라고 조언한 사람이 나라든지, 내 조언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든지, 나와 관련된 사항은 죄다 빼버리고 설명했을 거다. 형님은 이번 일을 자기 선에서 해결하고 싶었을 테니까.

    그러니 바르바토스 입장에서는 내가 이번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것 자체가 수상쩍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몇 시간 전엔 제파르 형님이 '전부 제가 멋대로 몰래 진행해서 생겨난 사고입니다'라고 보고했을 터인데, 지금 내가 당연하다는 듯이 사건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제파르 대장한테 벨리알을 접견하라고 부추긴 사람이 나야.”

    “뭐?”

    내가 덤덤하게 말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라, 바르바토스. 여태껏 제파르 대장이 너한테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 파벌의 중대사를 결정한 적이 있었는지. 대장은 언제나 네 명령에 따라 움직여. 단, 예외가 있다면…….”

    “네가 조언한 경우이지. 개자식.”

    바르바토스가 으르렁거렸다.

    “왠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랬어. 속셈이 뭐야.”

    “산악파에 경각심을 불어넣으려고 했지.”

    “경각심은 무슨 얼어죽을 놈의 경각심?”

    내가 한숨을 쉬었다.

    “시트리가 마계에서 벌인 학살극을 봐라. 시트리는 지금 누가 봐도 비정상적으로 흥분하고 있어. 만약 이런 상황에서 산악파가 급속하게 붕괴되면 시트리는 다시 한번 충동적으로 반응하겠지. 최악의 경우, 내전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

    “일종의 충격요법이 필요했어. 이대로 정신줄을 놓고 있다가는 파벌을 갈아타는 배신자가 나오겠구나, 하고. 벨리알은 산악파 중에서도 가장 허약한 송사리니까 딱 적당히 경각심만 심어주기에 제격이다……그렇게 판단했다.”

    여기서 내 목소리가 한층 어두워졌다.

    “실상은 내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지만.”

    “뭐가 문제였는데?”

    “시트리다. 시트리가 예민해진 정도는 내 상상을 훨씬 뛰어넘어. 시트리의 정신상태가 정상이었다면, 벨리알이 제파르 형님을 두 번째 혹은 세 번째로 만날 쯤에 가서야 반응해야 옳았다. 그런데 시트리는 고작 딱 한 번 형님을 만났다는 이유로 벨리알을 죽여버렸지. 도저히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야…….”

    바르바토스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말했다.

    “흥, 어차피 파이몬이 아니었다면 생겨나지도 않았을 파벌이 산악파야. 조무래기 녀석들이 오들방절을 떨어대는 것도 당연하지. 그래서?”

    “그렇기에 더더욱 제파르 대장이 사과를 하면 안 된다.”

    내가 똑바로 바르바토스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제파르 대장이 아무리 혼자서 일을 진행시켰다고 말해봤자 아무도 안 믿어. 대장이 네 심복 중의 심복이라는 건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니까. 대장의 배후에 사실 네가 있었다고 모두가 생각할 거다. 심지어 우리와 같은 평원파조차.”

    “…….”

    “그렇게 되면, 바르바토스. 너는 네 자신의 잘못을 자기 부하한테 덮어씌운 사람이 되어버린다. 산악파에게는 비웃음을, 중립파에게는 경멸을, 우리 평원파에겐 실망감을 안겨주게 돼. 그런 사태만은 막아야 한다.”

    내 말이 이어질수록 바르바토스는 표정이 묘해졌다.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내 얼굴에 먹칠하는 꼴이 되니까 안 된다고?”

    “쉽게 말하자면 그렇지.”

    바르바토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럼 사과는 누가 하고? 나쁜 건 벨리알이었고 우리 평원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라고 그냥 생까버려? 시트리 그 미친년이 납득해줄 것 같지가 않은데.”

    “제파르 대장이 사과해서도 안 되고, 네가 사과해서도 안 되고, 사과를 아예 안 해서도 안 돼.”

    내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산악파에게는 내가 사죄한다.”

    “……하?”

    “나는 제파르 대장과 달라. 굳이 너의 명령이 없어도 얼마든지 혼자서 움직일 만한 사람이라는 걸, 거의 모든 마왕이 알고 있어. 내가 사과하더라도 바르바토스 너한테까지 혐의가 옮겨갈 가능성은 적다.”

    바르바토스가 뭐라고 반박하려는 듯 입술을 열었지만 나는 기다리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게다가 나는 대외적으로 평원파의 이인자로 통용되고 있어. 내가 고개를 숙이면 산악파도 수긍할 수밖에 없어. 어느 쪽이든 만족스러운 결과를 맞이할 거다.”

    “야, 잠깐만. 시발, 잠깐 기다려봐.”

    바르바토스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내가 겁나게 멍청해서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라면……내 얼굴에 먹칠하느니 차라리 네가 된통 뒤집어쓰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착각하지 마, 바르바토스. 너를 위해서 희생하겠다는 소리가 아니야.”

    내가 차갑게 단언했다.

    “애당초 내가 제파르 대장에게 잘못된 조언을 올린 것이 사건의 원인이다.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해. 제파르 대장은 자기가 희생하면 전부라고 생각하겠지만, 틀려도 크게 틀린 판단이지.”

    “아니…….”

    “내가 고개를 숙여봤자 피해를 보는 건 나 하나다. 반면에 네가 고개를 숙이면 평원파 전체가 피해를 본다. 우리 둘 중에 누가 사과의 자리에 올라야 할지는 불 보듯 뻔해.”

    바르바토스는 할 말을 잃었는지 잠시 입술이 살짝 벌어진 채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그러니까 잠깐만 기다려보라고……이 멍청아. 그야 네가 단독으로 음모를 꾸몄다고 생각하는 마왕도 있겠지만, 보통은 우리 파벌이랑 관련된 일이니까 나와 상의한 다음에 진행했다고 생각할 거 아냐. 앙?”

    바르바토스가 미간을 잔뜩 좁혔다.

    “그럼, 시발. 나는 내가 책임을 지는 대신에……애인한테 책임을 떠넘겨버리는, 천하의 개쌍년이 되어버리는데? 제파르한테 떠넘기는 거나 너한테 떠넘기는 거나 차이점이 대체 뭐야?”

    “내가 알아서 처리할 거다.”

    내 입에서 무감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걱정하지 마라. 네가 연루되지 않았다는 확신을 주변에 심어줄 테니. 너는 이번 사건에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까 얌전히 빠져.”

    “얌전히 빠지라고……?”

    바르바토스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날 노려보았다. 나는 시선에 응수해주지 않았다. 대신에 등을 돌려서 정원을 빠져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꾸욱, 하고.

    작은 손바닥이 내 손목을 강하게 붙잡았다.

    “지랄하지 마, 단탈리안.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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