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19화 (419/510)
  • 00419 황금의 몰락  =========================================================================

    “아니. 말 그대로 아우는 단지 조언을 해주었을 뿐이네.”

    나는 시선을 들어서 제파르 형님을 바라보았다. 형님은 고개를 젓고 있었다.

    “자네의 눈에는 내가 조언자에게 책임을 떠넘길 인물로 비추는가. 결정을 한 사람은 나다.”

    물론 그럴 인물이 아니므로 제파르 형님을 이용했다.

    벨레드 형님이라면 ‘음, 조언을 한 당사자가 마땅히 책임을 져야지’ 하고 나 몰라라 룰루랄라 도망쳐버릴 것이 뻔했다. 오히려 내 실패를 껄껄거리며 비웃겠지. 그래서야 곤란했다. 이번에는 다소 고지식하게 귀족적인 제파르 형님의 성격이 필요했다.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책임을 지는 것이 도리…….”

    “자아. 책임을 운운하기 전에 대책부터 세워보도록 하세. 자네가 좋은 대책을 세워서 사태를 무마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책임을 지는 자세일 터.”

    제파르 형님이 내 말을 끊었다. 회색 턱수염에 단호함마저 서린 것 같았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에 고개를 한층 깊숙하게 숙임으로써 예를 표했다. 내 머리 위로 제파르 형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아는 단탈리안이라는 사람은 한두 개의 해결책도 장비하지 않은 채 사과를 구하러오는 남자가 아니다. 아우. 혹시 내가 사람 보는 안목을 잘못 관리했는가.”

    “……이번 사태에서 입증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고 고개를 들었다. 일단 입을 연 다음에는 또박또박,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얘기를 이어나갔다.

    “현재 산악파는 신경이 지극히 예민해져 있습니다. 산악파 측에서는 마왕 벨리알이 배신했다는 증거도 증인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형님과 접촉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벨리알을 주살했습니다. 상상 이상으로 산악파는 지금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고 있겠지요.”

    “으음.”

    제파르 형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산악파 전체가 예민해진 것인가, 아니면 시트리가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인가.”

    “아직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시트리를 중심으로 남은 산악파 마왕들이 빈틈없이 뭉친 것만은 확실합니다. 아마 이번에 벨리알을 공동으로 처리한 것도…….”

    “파벌 전체에서 경각심을 공유하기 위해서인가…….”

    “예. 그런 의도가 숨어 있을 것입니다.”

    제파르 형님이 낮게 신음했다.

    “얕보았군. 시트리에게 이 정도 정치적인 감각이 있었을 줄이야.”

    “정치감각이라기보다 본능에 가깝겠지요. 위험을 느끼니 과도하게 이빨을 드러내서 주변을 위협합니다. 그 본성은 상처를 입어버린 짐승입니다. 하지만 시의적절하게, 지금의 산악파에는 시트리처럼 앞에 나서주는 우두머리가 필요했을 테지요.”

    “상처 입은 짐승이라……. 성가시기 그지없군.”

    제파르 형님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시트리가 벨리알을 처단한 것은 내 조언에 따른 행동이었지만.

    제파르 형님에게 진실을 알려줄 이유는 전혀 없었다.

    “만일 정치감각으로 움직이는 것이라면 타협할 여지가 넓어진다. 그렇지만 본능에 따르는 것에 불과하다면 곤란하다. 시선이 멀리까지 미치지 못하고 당장 눈앞에 닥친 상황밖에 보지 못하지…….”

    “시트리가 저에게 신뢰를 주고 있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입니다. 본래라면 벨리알을 죽이자마자 우리 평원파에 최후통첩을 날렸겠지요. 제가 적어도 다리의 역할을 해낼 수는 있을 겁니다.”

    “아아.”

    제파르 형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탈리안. 정확히 산악파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저들은 일부 평원파가 산악파에 내분을 일으키기 위해 수작을 부렸다 착각하고 있습니다. 당장 일부의 주동자를 찾아내서 공개적으로 사과시켜라. 그것이 산악파의 요구입니다.”

    제파르 형님이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그 일부가 설마 나를 가리키는가?”

    “정확하게는 바르바토스 전하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뭐라?”

    내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제파르 형님이 바르바토스 전하의 수족이라는 사실은 만천하가 알고 있습니다. 제파르 형님이 움직였다는 것은 틀림없이 배후에 바르바토스 전하가 있다는 얘기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무슨, 터무니없는 오해를!”

    드디어 제파르 형님의 어조에서 열기가 발생했다. 매사에 침착하고 냉정한 제파르 형님이었지만, 유일하게 바르바토스가 관련되면 마음이 들떠지는 면모가 있었다. 한점의 흐릿함이 없는 충성심이라고 할까.

    충성심 덕분에 제파르 형님은 평원파의 공동이인자로 우뚝 섰다. 하지만 장점이란 으레 시점만 바꾸면 간단하게 단점이 되는 법이었다.

    “그렇다면, 단탈리안. 설마 저들이 구태여 일부를 강조한 이유는.”

    “예. 바르바토스 전하의 직접적인 사과를 얻어내기란 힘들다고 판단했겠지요. 우리 평원파에 바르바토스 전하는 정신적 지주입니다. 간단하게 고개를 숙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일부'라고 조건을 붙인 것입니다.”

    내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마 바르바토스의 사과까지는 요구하지 않을 테니 적당히 알아서 희생양을 만들어라. 산악파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자기들 딴에는 우리 체면을 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요.”

    “바보 같은…….”

    “형님. 산악파는 비난할 대상을 찾고 있습니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이제 제파르 형님도 사태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바르바토스를 대신해서 사과할 인물이라면 벨레드 형님이나 제파르 형님뿐이었다. 이번 사건에 벨레드 형님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즉, 입장상 제파르 형님이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아니면…….

    “왜 제가 책임을 지겠다고 말씀드렸는지 알아주십시오.”

    평원파의 최고참모이자 바르바토스의 애인인 나 단탈리안밖에 없었다.

    “형님께선 이번 사건에 아무런 책임도, 단 한 부분의 잘못이라도 차지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형님께 조언했습니다. 제가 원인입니다. 그러니 제가 산악파에 공식적으로 사과하겠습니다.”

    “잠깐. 자네의 정치적인 입장은 어떡하고?”

    제파르 형님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그런 건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

    “형님. 죄송합니다만, 저는 이미 마음을 굳혔습니다. 이대로 바르바토스 전하께 가서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단지 형님에게 먼저 사정을 설명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기에 여기 왔을 뿐입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방문을 향해서 걸어갔다. 나는 나의 연기에 완벽한 믿음을 품고 있었다. 부드러운 카펫을 밟으면서 걸음걸이를 셌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세 발자국――.

    “거기 멈추게.”

    내가 멈칫했다. 뒤를 돌아보자, 제파르 형님이 양손으로 책상을 짚은 채 일어서 있었다. 제파르 형님은 약간 허리가 굽어진 자세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거운 아우라가 형님을 둘러쌌다. 마치 중력이 형님의 몸만 주위보다 강하게 짓누르는 것처럼.

    “나는 자네에게 해결책을 요구했지, 책임을 지라고 명령한 적이 없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

    “이것이 최선입니다.”

    “아우는 우리 평원파와 산악파를 유일하게 이어주는 가교일세. 아니, 마왕군 전체를 한 장소에 모이게 해주는 통로이지. 자네가 잘못을 인정함으로써 주변의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면 누가 통로 역할을 대신해주는가?”

    내가 주저없이 대답했다.

    “그건 마르바스가 충분히 대신해줄 것입니다.”

    “마르바스는 훌륭한 중재자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가 이미 한 파벌의 수장이다. 양지에서는 빛을 발하지만 음지에서 각 파벌의 의견을 몰래 조정하는 일에는 적합하지 않다. 어디 부정해볼 테면 부정해보게.”

    “…….”

    “단탈리안.”

    제파르 형님이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꿰뚫어보았다.

    “마왕군에는 자네가 필요하다.”

    “…….”

    “시트리는 이성을 잃은 상태일 텐데도 자네에게 의지했다네. 벌써 이것 자체만으로도 아우는 누구보다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 시트리뿐만이 아니야. 바르바토스 각하께서도, 가미긴도, 마르바스도, 중요한 위기 상황에서는 자네에게 교섭을 맡기겠지. 그건 나에게는 없는 재능이다.”

    제파르 형님은 자신의 말에 스스로 확신을 얻었는지 턱을 한 차례 끄덕였다.

    “산악파에 공식으로 사과하는 역할은 내가 맡겠다.”

    “안 됩니다, 형님!”

    “나를 우습게 보지 말게. 사사로운 감정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야. 객관적으로 살펴볼 때 내가 나서는 것이 가장 피해가 적어.”

    제파르 형님이 입꼬리를 슬쩍 들었다.

    “나는 평생을 전장에서 지내온 군인에 불과하다. 솔직히, 나에게 맡겨진 영지를 통치하는 것조차 골치가 아프다. 이제 와서 정치적인 입지가 줄어든다고 해봤자 아무런 타격이 없다.”

    “하! 정치적인 입지 따위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제파르 형님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아마도 내 얼굴은 명백하게 분노로 일그러져 있으리라.

    “누가 실수를 저질렀고 누가 책임을 지느냐의 문제입니다! 방금 전에 형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제 눈에 형님이 조언자한테 책임을 떠넘기는 인물로 비추느냐고요. 똑같은 말을 돌려드리겠습니다. 제가 형님한테 저의 책임을 떠넘길 만한 사람으로 보입니까!”

    “나는 자네가 왜 이러는지 알고 있네.”

    내가 코앞까지 다가와서 눈을 부라렸건만 제파르 형님은 눈썹조차 까딱하지 않았다.

    “아우는 언제 어디서나 냉정하게 정치적인 계산을 해내지. 하지만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을 때는 용납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네는, 파이몬이 죽은 것이 자기 잘못이라고 여기고 있어.”

    “무슨……파이몬은 지금 얘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아니. 자네는 파이몬의 죽음을 자기 책임으로 여기고 있기에, 이번에 산악파가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한 것까지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하고 있다. 파이몬에게 속죄하고 싶어서 어떻게든 자기 자신에게 벌을 내리려는 것이지.”

    나는 한 순간이지만 숨을 멈추었다.

    그 틈새에 제파르 형님은 오른손을 들어서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단탈리안. 자네는 아무것도 속죄하지 않아도 좋다.”

    “넘겨짚지 마십시오……근거 없는 추리입니다. 잘못을 범한 자가 책임을 지는 것뿐입니다. 속죄고 뭐고 거창한 이야기 따위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아아. 그럴지도 모르지. 그때는 내 안목이 어설프다는 얘기이다.”

    “각하!”

    제파르 형님이 입가를 움직여서 작게 웃었다.

    “자네에게 각하라고 불린 것도 오랜만이군.”

    그때, 형님이 오른손을 들어서 내 목을 가격했다. 분명히 오러가 담긴 일격이었다. 나는 컥, 하고 볼품없이 비명을 지르며 무릎이 꺾어졌다. 마치 뇌에 정전기가 일어난 것처럼 눈앞이 순식간에 하얗게 물들었다.

    내가 바닥에 쓰러져서 입을 열었다.

    “어리, 석은…….”

    그러나 간신히 한 마디가 나왔을 따름이다. 더 이상 문장을 잇지 못했다. 빠져나가는 정신을 붙드는 것만으로도 빠듯했다.

    저 멀리서 제파르 형님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바르바토스 각하의 유일무이한 남자 연인을 희생양으로 삼으라니. 대체 제정신으로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아우는 나를 불귀의 객으로 만들고 싶어서 작정했는가. 자네는 조금 더 자신의 위치를 자각할 필요가 있다.”

    제파르 형님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곧이어 시야가 완전히 깜깜해졌다. 발소리가 멀어졌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걸 마지막으로 나의 의식은 사라졌다. 나는 계획을 충실하게 성공시켰다는 사실에 안심하면서, 마음을 놓고 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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