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18화 (418/510)
  • 00418 황금의 몰락  =========================================================================

    “…….”

    좌중이 조용해졌다.

    파이몬은 언제나 파벌을 너그러운 인망으로 이끌었다. 산악파 특유의 분위기, 느슨할지라도 넓은 연합이 형성되었다. 지금 시트리가 펼치는 정치는 정반대였다. 공포정치 내지는 협박에 의한 정치라고 봐야겠지…….

    공포정치가 지속적으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첫 번째, 자신만은 철퇴에서 안전하다는 확신.

    다른 사람들이 죽어나가더라도 나는 안전하다. 그와 같은 믿음이 부하들에게 공유되어야 한다. 즉, '어떻게 하면 처벌을 받지 않는지'를 명확하게 알려줌으로써 부하들이 잘 처신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두 번째, 지금은 공포정치가 필수불가결하다는 공감대.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므로 공포정치 따위는 차선……아니, 차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공포정치가 통용되려면 상황이 그만큼 최악에 가깝다는 인식이 필요했다. 무자비하게 통치하지 않는 이상 멸망해버리고 만다, 하고.

    그렇기에 배신자의 처단이었다.

    배신자를 처형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매우 명확한 기준을 주변에 제공했다. 배신하면 죽지만, 배신하지 않으면 안전하다. 이보다 깔끔한 기준이 달리 없었다. 게다가 정말로 배신자가 나왔으니 산악파 마왕들은 현재 사태에 심각한 경각심을 지니겠지.

    ‘좋은 타이밍이었다.’

    말 그대로, 마왕 벨리알은 실로 적당한 타이밍에 배신해주었다.

    첫 번째 조건과 두 번째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켰다. 정말로 배신했는지 안 했는지 증거가 부족했지만 상관없었다. 요는 정치적으로 필요했느냐. 이것만이 중요했다. 시트리의 지도력은 적어도 당분간 필요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여러분. 저는 평원파에 발을 걸친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느낍니다.”

    내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공포정치의 핵심은 현재 상황을 최악에 가깝다라고 인식시키는 것. 어디까지나 최악에 가까운 것이었다. 정말로 최악으로 인식되어서는 곤란했다. 자제력을 잃고 폭주해버릴 위험이 있었다.

    '어쩌면 평원파가 이번 기회에 우리를 말살하려 들지도 모른다.' 이 정도 인식이 딱 좋았다. '평원파가 우리를 말살하고 있다!'라는 인식이 되어버리면 난감했다. 산악파 마왕들은 멸망하기 전에 발악이라도 해보자며 폭주하겠지.

    누군가가 인식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유지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벨리알은 저희 평원파의 마왕 제파르를 비밀리에 만났습니다. 혹시나, 만에 하나라도 평원파 내부에서 산악파를 분열시키려는 생각을 가진 마왕들이 일부 있을지도 모릅니다.”

    “단탈리안. 안타깝지만 당신도 혐의에서 자유롭지는 않소.”

    흰 수염이 덮수룩하게 자란 노신사가 말했다. 전 서열 제21위, 말발굽의 마왕이라 불리는 모락스였다. 마르바스가 타고난 미모를 유지하며 지긋하게 늙었다면, 모락스는 얼굴 이곳저곳에 검버섯이 난 채 노인이 되었다.

    “당신 역시 평원파요. 단순히 그쪽 파벌에 속했을 뿐만 아니라, 바르바토스가 유일하게 마음을 허락한 남성이지. 만약 평원파에 정말로 우리 산악파의 내분을 획책하는 움직임이 있었다면 간부 중의 간부인 당신이 몰랐을 리 만무하오.”

    노신사의 지적에 산악파 마왕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질책하고 몰아세우는 것이 아니라 어디 한번 해명해보라는 분위기였다. 꽤나 정중했다.

    “높이 평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허나 평원파 내부에서 제 발언력은 생각보다 보잘것없습니다.”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리는구려. 그대가 평원파의 실세임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 않소.”

    “저에 대해서 무척 잘 아시는군요.”

    “파이몬 전하께서 많은 말씀을 해주셨지.”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잠시 의도적으로 침묵을 지켰다. 면전에서 파이몬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괴롭다, 라는 뉘앙스를 풍기기 위해서였다. 길게 침묵할 것까진 없었다. 5초에서 6초. 그 정도만 침묵해도 충분히 주변에 제스처를 전달할 수 있었다.

    내가 머릿속에서 시간을 잰 다음 입을 열었다.

    “모락스 님. 제 권력이 어디서 비롯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노구가 아는 대로 대답해보자면, 바르바토스의 총애에서 비롯한다오.”

    “정확하게는 세 사람의 총애에서 비롯했습니다. 바르바토스, 마르바스……그리고 파이몬.”

    내가 살짝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죄책감을 가진 사람이 본능적으로 내비치는 몸짓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파이몬한테 심각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생각했으며, 나는 그런 착각을 계속해서 유지시키고 싶었다.

    “저의 권력은 근본적으로 제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발생합니다. 그건 바로 파벌들 사이의 균형입니다. 산악파든 중립파든 평원파든, 서로가 서로에게 협조를 구해야 하는 순간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바로 그때 제 역할이 빛을 발합니다. 달리 말해, 파벌들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저 따위는 필요가 없어집니다…….”

    “겸손이 지나친 것 아니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릴 뿐입니다.”

    노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건 진실이기 때문이었다.

    “저는 현 시대가 황금의 균형을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균형이 붕괴되는 것은 저에게 있어 최악의 사태나 다름없습니다. 만약 평원파에서 균형을 파괴하고자 획책하는 무리가 있다면, 여러분. 그들이야말로 저의 적입니다.”

    노인이 가늘게 눈을 떠서 이쪽을 바라보았다. 눈살이 거무튀튀하게 주름져 있었다.

    “무슨 방도를 가지고 계시오?”

    “저는 제파르 형님과 의형제를 맺었습니다. 그분에게 벨리알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겠습니다.”

    “지나치게 단순한 방법이 아닌지.”

    “저는 제 방법에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믿음을 구걸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께서 알아주셔야 할 점은, 저에게 영원한 믿음을 건네주실 필요가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이해가 일치할 때만 저를 조건부로 신뢰해주십시오.”

    “…….”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런 시기입니다.”

    마왕들의 시선이 시트리에게 모여들었다. 우두머리가 결정하는 바에 따르겠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시트리는 눈썹 한번 까딱거리지 않았다.

    “이 기회에 확실하게 말해둘게. 나는 단탈리안을 사랑해.”

    “…….”

    “하지만 내 사적인 관계와 우리 파벌의 일은 아무런 관련이 없어.”

    산악파 마왕들의 표정이 변했다.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 집무실 안의 공기가 약간 술렁거렸지만, 시트리는 변함없이 차가운 어조로 말해나갔다.

    “나는 사적인 관계를 앞세워서 우리 파벌의 대소사를 결정하지 않을 거야. 당연하잖아. 산악파는 내 것이 아니야. 파이몬 언니가 피땀을 흘려서 일궈낸, 우리의 장소야. 나는 언니의 기억과 흔적이 남은 이곳을 지키고 싶을 뿐이야.”

    “시트리 전하…….”

    “그러니까 모두가 결정하자. 비록 파이몬 언니는 지금 여기에 없지만……언니라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하면서.”

    일편단심만큼 사람을 쉽게 감동시키는 것은 없었다.

    시트리가 얼마나 파이몬을 사랑했는지는 마계의 꼬맹이조차 알았다. 정치판에서 상대방을 의심하는 게 기본이라지만 시트리의 연심은 믿어도 좋았다. 그 순수성이 마왕들의 마음을 움직였겠지.

    “저는 동의합니다.”

    “저도 동의하겠습니다. 단탈리안은 확실히 교섭역에 어울립니다. 우리가 손해를 볼 일도 전혀 없습니다.”

    “동의합니다.”

    산악파 마왕들이 줄줄이 찬동을 밝혔다.

    마지막에 가서 모락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반대하고 싶을지라도 여기서 시트리에게 반항하는 건 하책. 쓸데없이 분란을 일으키느니 일단 시트리를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올바른 판단이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내가 가슴에 오른손을 올리고 집사처럼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제가 부여받은 역할을 다시 확인하고자 합니다. 저는 평원파에 정말로 이쪽을 분열시키려는 무리가 있는지 알아내고, 황금의 균형이 붕괴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합니다. 이것이 제 역할이 맞습니까?”

    “그렇소.”

    마왕들이 동의했다.

    나는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끝까지 한번도 시트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문을 나섰다. 그리고 곧장 제파르 형님에게 배정된 집무실로 발길을 돌렸다.

    *  *  *

    황궁은 크게 동관과 서관으로 나뉘었다.

    이중에서 동관은 평원파에, 서관은 산악파에 배정되었다. 중앙에 가까운 구역은 중립파와 무소속 마왕이 차지했다. 알기 쉬운 배치였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궁은 본래 볼품이 없었다. 전 황제, 그러니까 엘리자베트와 루돌프의 아비가 역사상 낭비벽이 가장 심한 군주였다. 틈만 나면 궁전을 개축하려 들었지만 귀족들이 크게 반발하여 무산되었다.

    게다가 엘리자베트가 월맹군 전쟁 때 수도를 불태우고 파천하면서 황궁의 상당 부분을 해체해서――그렇다, 값나가는 장식이나 조각상은 죄다 떼서 옮겨버렸다! 알고 보면 엘리자베트 통령도 엄청난 구두쇠다――가져간 탓에 몰골까지 꾀죄죄했다.

    지금은 규모가 달라졌다.

    기본 골자를 토대로 마계에서 불러들인 고블린과 난쟁이 장인들이 대대적으로 공사를 벌였다. 크기가 몇 배나 뻥튀기되어서 그 자체가 하나의 소도시로 여겨질 정도로 거대해졌다. 덕분에 나는 산악파가 위치한 서관에서 평원파가 위치한 동관까지 꼬박 수십 분을 걸어가야 했다.

    “어서 오게나.”

    제파르 형님이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얼굴은 여느 때처럼 근엄했지만 목소리에 다정함이 살짝 서려 있었다. 제파르 형님은 작업 중인 서류를 내려놓고 씨익 웃었다.

    “요새 아우를 자주 봐서 나쁘지 않군.”

    “영지를 돌보시는 것이 힘든 모양입니다.”

    “솔직히 브르타뉴의 기사단을 상대하는 것보다 아주 약간 쉬운 정도라네.”

    우리가 작게 웃었다. 약간 잡담을 나눈 뒤에 제파르 형님이 집무실에서 하인들을 물렸다. 내가 표정을 진지하게 고쳐서 말했다.

    “형님. 지금부터 형님에게 드릴 말씀은 당분간 철저하게 비밀로 지켜주셔야 합니다.”

    제파르 형님의 얼굴이 곧바로 심각해졌다. 그는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진지해질 수 있는 남자였다.

    “심각한 일이 발생했군. 안 그런가.”

    “예. 마왕 벨리알이 조금 전에 숙청당했습니다.”

    “…….”

    제파르 형님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잠시 커진 상태에 머물다가 천천히 눈꺼풀에 감겼다. 제파르 형님이 집게손가락으로 콧대를 짚었다.

    “……숙청이라는 것은?”

    “아마도 시트리가 벨리알의 목을 직접 베었습니다. 산악파 마왕들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원 시트리의 집무실에 모여 있었습니다. 아직도 거기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파르 형님이 눈을 감은 채로 한숨을 쉬었다.

    “일이 요란하게 번져버렸군.”

    “아니, 생각보다 심각한 사태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시트리가 저에게 교섭을 요청했습니다.”

    “교섭?”

    “산악파에서는 마왕 벨리알이 자기네를 배신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걸 위해서 형님과 비밀리에 접견을 가졌다고…….”

    제파르 형님의 미간이 구겨졌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군. 지금 상황에서, 이런 시기에, 벨리알과 같은 애송이를 받아들여봤자 좋을 것이 어디 있는가. 괜한 분쟁을 일으킬 뿐이겠지.”

    “산악파들도 아주 멍청하지는 않습니다. 제파르 형님의 생각대로 그들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다만, 가능성이 있다. 그것을 걱정하는 것인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이건 저의 잘못입니다. 제가 책임을 지게 해주십시오.”

    “무슨 소리인가?”

    “형님은 원래 벨리알과 만나는 걸 주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때 형님께 벨리알을 만나라고 조언한 것이 바로 저입니다. 이번 사태는 전적으로 저에게 원인이 있습니다.”

    내가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

    마왕 벨리알은 '실로 적당한 타이밍'에 배신해주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