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17화 (417/510)

00417 황금의 몰락  =========================================================================

요새 나는 황궁의 안치소에서 자주 시간을 보냈다.

오로지 파이몬을 위해서 지어진 이곳은 항상 조용했다. 매일 새벽마다 황궁 시녀가 꽃을 갈아주러 오는 것을 제외하면 들리는 사람도 없었다. 혼자 와서 깊은 생각에 빠지기에 딱 좋았다. 뭐, 대신 정신적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었지만……그건 무시할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파이몬을 애도하기 위해서 일부러 안치소에 들리는 것은 아니었다. 정치적인 제스처였다. 파이몬은 마계에서 가장 지지도가 높았던 마왕 중 한 사람이었고, 아직도 산악파에선 파이몬을 그리워했다.

파이몬의 죽음을 잊지 않고, 나 단탈리안이, 황궁에 올 때마다 대부분의 시간을 안치소에서 보낸다. 그들이 보기에는 썩 기특한 행동거지가 아니겠는가.

“역시 여기 있었네.”

누군가가 입구에서 걸어왔다. 인기척이 느껴져서 고개를 들자, 시트리가 그곳에서 쑥스럽게 웃고 있었다.

“집무실에 들렸는데 없더라구. 딱 여기 있겠다 싶어서 왔어, 헤헤.”

“여기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응, 맞아. 나도 그래. 자아.”

시트리는 오른손에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그걸 건네받아서 안쪽을 들여다보니, 깜찍하게도 샌드위치 비슷한 간식이 예쁘장하게 담겨 있었다. 찐감자까지 앙증맞게 두 개가 들었다.

“이거 진수성찬이군요!”

“도, 도시락을 만들어봤어. 어차피 단탈리안도 점심 안 먹었을 테니까.”

“시트리가 요리에도 일가견이 있을 줄은 몰랐는걸요.”

내가 다소 과장스럽게 감탄했다. 시트리를 보면 한없이 마음이 울적해졌는데, 그걸 감추기 위해서라도 나는 부산하게 떠들었다. 내 반응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시트리가 헤벌레 웃었다.

“요새 신부수업을 하고 있거든!”

“신부수업이라니요?”

“그동안 내가 너무 왈가닥처럼 다닌 것 같아서. 시녀들이나 선생들한테 막 배우고 있어. 헤헤.”

“……그렇군요.”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시트리는 신부수업이라고 표현했지만 실상은 지도자 교육이었다. 파이몬이 서거해버린 이상, 좋든 싫든 산악파를 이끄는 사람은 시트리가 되어주어야만 했다. 산악파에는 시트리보다 인망이 높은 마왕이 없었다.

본인이야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자칫 파이몬의 사후 공중분해 되어버릴 뻔한 산악파를 위기에서 구해준 것도 시트리였다. 마계에 철두철미한 복수극을 펼침으로써 산악파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다.

“신부수업에서 뭐가 가장 어렵습니까?”

“으응. 식사 예절이려나. 난 여태까지 편한 대로 음식을 먹었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그러면 안 된다고 하더라구. 칼 종류만 수십 개가 된다니까.”

시트리가 수업을 듣기 싫어하는 초등학생처럼 툴툴거렸다.

보다시피, 시트리는 일반 교양이 상당히 뒤떨어졌다. 파이몬이 있었을 때는 시트리에게 교양도 뭣도 필요치 않았다. 시트리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산악파가 자랑하는 검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산악파의 수장으로서 회의에 참석하는 것도, 마계에서 유력자들이 접견을 청해올 때 맞이하는 것도, 평원파나 중립파와 정치적인 싸움을 벌이는 것도, 전부 시트리가 짊어져야 했다.

평생을 다만 전쟁터에서 한 자루의 검에 의지해서 살아온 그녀에겐 너무 무거운 짐이겠지.

하지만 시트리는 군말없이 제왕학 교육을 받아들였다.

아니, 본인이 스스로 원해서 먼저 요청했다.

“훌륭합니다, 시트리. 정말로 대단해요.”

내가 시트리의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시트리는 애완 강아지처럼 손길에 몸을 맡기고 더욱 더 내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신기해. 단탈리안이 칭찬해줄 때마다 막 힘이 나.”

“……만약 너무 힘들면 포기해도 좋습니다.”

“으응, 단탈리안도 멀쩡하게 버티고 있는걸.”

시트리는 파이몬의 죽음에서 도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면에서 바라보고 수용했다.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산악파가 붕괴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했다. 그리고 파이몬이 남긴 유산을 하나라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단탈리안이 있으니까 괜찮아.”

“…….”

“자아. 아앙.”

시트리가 샌드위치를 집어서 내 입에 넣어주었다.

“음.”

베이컨에다 토마토, 양상추가 들어갔다. 베이컨의 풍미에 아삭한 양상추가 씹혀서 딱 좋았다. 토마토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 음식을 인간이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이 엿보였다. 어째서인지 인간들은 토마토를 '흡혈과(果)'라고 부르면서 식용으로 쓰지 않았다. 토마토가 붉은 이유가 사실은 땅속에서 시체의 피를 빨아들였기 때문이라던가. 아직 미신이 횡행하는 시대였다.

“맛있어?”

“예. 무척이나 맛있습니다.”

“그, 그럼 이건 어때?”

시트리가 두 번째 샌드위치를 들었다. 바구니에 담긴 다른 샌드위치와 달리 그것만 모양이 어설펐다. 토마토는 삐죽 튀어나왔고 척 보기에도 베이컨이 지나치게 많았다.

오호라.

이래 봬도 나는 요 8년 동안 눈치밥 하나로 생존했다. 곧바로 진실을 알아차렸다. 갑자기 도시락을 만들어온 여자, 딱 하나만 모양이 엉망인 샌드위치. 그리고 시트리는 왠지 모르게 불안한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과연, 그랬는가. 생각해보니 제왕학 수업에서 테이블 매너는 또 모를까, 요리하는 방법을 가르칠 리가 없었다. 나는 마치 세상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처럼 느긋하게 두 번째 샌드위치를 먹었다.

“흐음.”

일부러 간을 보듯이 천천히 씹어먹었다. 일 초가 흐를수록 시트리의 표정이 점점 더 초조해졌다. 나는 확신을 얻었다.

“어, 어때……?”

“맛있군요. 아니, 아까 전 것보다 훨씬 더 맛있습니다.”

“정말!?”

시트리 얼굴이 활짝 만개했다.

“잘 표현할 수는 없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요. 정성이 담겨 있다……예. 정성이 느껴집니다. 꼭 맛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시나리오가 뻔했다.

아마도 시트리는 오늘 처음으로 요리를 해보았겠지. 샌드위치 비슷한 간식을 만들어보는 것도 처음. 당연히 잘 만들어질 리가 없었다.

시트리는 자신의 실력에 절망해서 황궁 요리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손수 만든 요리를 내게 맛보여주겠다는 욕망을 포기하지 못해서, 몰래 딱 하나, 자기가 만든 샌드위치를 숨겨두었다. 그게 유난히 못생긴 샌드위치였다.

“아까 간식은 조금 기계적이고 지나치게 전문적인 느낌이 들었는데, 이건 약간 모양이 어설플 뿐이지 한결 편안합니다.”

“헤, 헤헤……그래? 잘 됐다.”

부끄러운 듯 뺨을 붉히면서 웃는 시트리.

후후. 이 정도 진실은 내 눈앞에서 손쉽게 밝혀지는 것이다.

우리는 잔뜩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서 간식을 먹었다. 찐감자를 입김으로 호호 불어서 식힌 다음에 반쪽으로 나누어서 내게 건네주는 시트리의 모습은, 그 자체로 명화에 옮겨져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금방 식사를 끝마치고 나는 시트리의 무릎에 누웠다. 시트리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내 머리를 빗질해주었다.

“시트리 님!”

그때 안치소 입구로 집사 차림의 호족(虎族)이 뛰어들었다.

집사가 다가오자, 포근하고 따뜻했던 공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시트리의 얼굴에서 상냥한 미소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대신에 드러난 것은 싸늘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시트리는 살기가 담긴 눈동자로 집사를 쳐다보았다.

“망자가 휴식하는 곳이야. 소리를 낮춰.”

“죄, 죄송합니다……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

집사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우리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그제야 자기가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집사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말했다.

“명령하신 대로 마왕 벨리알을 포획했습니다. 지금 시트리 님의 집무실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좋아. 산악파의 동지들은?”

“모두 모여 있습니다.”

집사와 대화하는 시트리의 목소리는 아까 전과 전혀 달랐다. 냉혹하고 무자비한 지도자의 목소리가 그곳에 있었다. 시트리가 집사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하게 내 귀에 속삭였다.

“단탈리안.”

“상황을 이해했습니다.”

내가 몸을 일으켰다.

시트리가 산악파를 재정비했다지만 완벽하지는 못했다. 더 이상 산악파에 희망이 없다면서 다른 파벌로 도망치려고 획책한 마왕도 있었다. 그것이 전(前) 서열 제68위의 마왕 벨리알이었다.

마왕 벨리알은 일전, 제8차 월맹군 초기에 바르바토스한테 은혜를 입은 적이 있었다. 마왕성이 인간군에 함락될 뻔한 것을 바르바토스가 구해주었다. 그 때문이겠지. 산악파가 조금 불안하다 싶으니 얼른 밧줄을 옮겨탔다.

그러나 어수룩했다. 시트리는 나의 조언에 따라서 산악파 마왕에 일일이 감시역을 붙여두었다. 하녀와 정원사, 마부, 하다못해 하인의 자식들을 매수하여 거미줄처럼 감시망을 펼쳤다. 마왕 벨리알이 제파르 형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정황이 곧바로 포착되었다.

제파르 형님은 평원파의 이인자나 다름없었다. 이런 시기,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배신자로 치부되기에 딱 좋은 상황에서 상대 파벌의 이인자를 비밀리에 만났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저도 가겠습니다.”

“……괜찮겠어?”

“저는 시트리의 우군입니다. 이상한 점은 하나도 없어요.”

시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안치소를 빠져나와 시트리의 집무실로 향했다. 본래 시트리에겐 따로 집무실이 없었지만, 파이몬이 사용하던 집무실을 이제는 시트리가 쓰고 있었다. 상당히 넓은 방안에 산악파 마왕들이 전원 집결해 있었다.

방안의 공기는 을씨년스러웠다. 산악파 마왕들은 지금부터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했는지 하나같이 표정이 어두웠다. 시트리가 입장하자 마왕들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시트리 전하를 뵈옵니다.”

“모두, 바쁜 와중에 잘 모여주었어.”

시트리가 오른손을 들어서 예를 생략했다.

산악파 마왕들은 내가 따라온 것을 보고 눈썹을 치켜들었지만 딱히 반발하는 사람은 없었다. 파이몬이 죽었을 때 내가 보여준 눈물, 그리고 이후에 주기적으로 안치소에 들려서 묵념하는 것 등으로 인하여, 산악파 마왕들은 내게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시, 시트리 님.”

집무실 한 가운데에는 마왕 벨리알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두 팔이 뒤쪽으로 꽁꽁 묶였다. 벨리알은 시트리를 보자마자 애절하게 구걸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오해입니다. 저는 정말로 결백합니다. 제가 산악파를 위해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

시트리는 곁눈질로 벨리알을 훑어보았을 따름이지, 그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시트리가 눈길을 돌린 것은 벨리알이 아니라 다른 산악파 마왕들이었다. 시트리가 입술을 열었다.

“우리는 미증유의 위기에 봉착했어. 파이몬 언니는 죽었고, 평원파는 건재하지. 우리는 지금까지 모든 것을 파이몬 언니한테 맡겨두었기에 이런 사태를 앞두고 당황하는 것은 당연해. 솔직히, 나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 우리가 당황해서 분열할수록 좋아할 사람은 따로 있어.”

시트리가 정확하게 누구라고 꼬집어서 말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평원파를 가리킨다는 걸 모르는 산악파 마왕은 없었다.

“파이몬 언니의 장례식을 떠올려봐. 그놈들 중 아무도 눈물조차 흘리지 않았어. 단지 관 앞에서 고개를 까딱거리고, 그걸로 모든 예를 다했다는 것처럼 등을 돌려서 걸어나갔지. 한 명을 제외하고.”

시트리가 나에게 잠깐 시선을 돌렸다. 산악파 마왕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녀석들을 기쁘게 만들어주고 싶지 않아. 동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묻고 싶어.”

“시트리 전하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죽음 앞에서 예를 표하지도 못하는 녀석들에게 당해줄 수는 없습니다.”

산악파 마왕들이 이구동성으로 동의를 표시했다. 열 명의 산악파 마왕이 차례를 돌아가면서 모두 찬동했다. 그럴수록 벨리알의 얼굴색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그럼, 우리 모두가 동의한 거네.”

“전하! 제발 제 말씀을 들어주십시오! 이, 이건 모함입니다! 저는 결단코 아무런 짓도 한 적이――.”

벨리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트리가 허리춤에서 장검을 빼어들어 번개처럼 빠르게 휘둘렀다.

허공에 새빨간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화려한 황금색 카펫에 벨리알의 머리가 퉁, 하고 가볍게 떨어졌다. 곧이어 피가 카펫을 물들였다. 산악파 마왕들은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시트리가 검을 한 번 더 휘둘러서 칼날에서 핏물을 털어냈다.

“배신자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어.”

“…….”

“우리가, 우리 전원이, 파이몬 언니의 유산을 지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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